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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 소희를 연기한 김민정씨는 올해 갓 스물이다. 지난해 한양대 연극영화학과에 입학했지만 한 학기밖에 다니지 못했다. 소희 때문이다. “촬영에 몰두하기 위해 휴학했어요. 소희가 한 학기를 잡아먹은 거죠.”<버스, 정류장>의 소희는 연기하기 쉬운 캐릭터가 아니다. 열일곱의 나이에 세상의 부조리를 거의 다 알아채버린 데다 상처와 환멸이 지우기 어려울 만큼 깊다. 소희란 캐릭터와 자신의 공통점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펄쩍 뛴다. “너무도 다르죠. 원조교제나 자살 같은 일들은 신문지상에선 많이 봤지만 제 주위에선 보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소희라는 아이를 연기하는 일은 매우 흥미로웠어요. 말투와 행동도 재미있지만 어른들도 감당하기 힘든 조숙한 아이라는 설정이 매력적이었죠. 직접 소희처럼 깊은 상처를 겪어보진 못했지만, 그런 아이를 표현하는 일에 거부감은 없었어요. 사람들은 누구든 상처를 입고 살아가게 마련이잖아요? 크든 작든. 다른 사람들이 상처라 여기지 않더라도 자신에겐 아픈
`상처` 깊은 소희 온몸으로 느끼려 휴학까지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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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섭(김태우)은 학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시간강사다. 소설을 써보려고 끄적거리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는 세상과 담을 쌓고 산다. 학원 동료들과 회식자리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피해 다닌다. 좋아했던 대학 동기 혜경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모임에 나가보지만 주식투자 따위가 화제인 술자리가 부대끼기만 한다. 재섭이 속마음을 털어놓는 유일한 사람은 그가 ‘혜경’이란 이름을 붙여준 창녀뿐이다. 재섭이 출강하는 학원에 여고 1학년 소희(김민정)가 새로 등록한다. 수다스럽고 당돌한 아이들의 도발을 받아넘기는 데 이골이 난 재섭이지만, 나이에 걸맞지 않게 조숙하고 냉소적인 소희는 왠지 무시하기 어렵다.어느날 재섭은 우연히 지하철 역에서 중년 남자와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소희를 목격한다. 재섭의 집까지 따라온 소희는 진실을 하나만 포함시켜 말하는 ‘거짓말 게임’을 제안한다. “우리 아버지는 뇌물 받아먹는 공무원이고, 엄마는 수영 강사와 바람났고, 제 친구 미정이는 성적 때문에 오늘 자살했고
<버스정류장> 너도 세상과 담 쌓고 살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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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수정>의 키워드가 `기억'이었다면 <생활의 발견>은 `모방'이다. 남녀 사이에 한쪽이 컵을 들 때 새끼손가락을 내뻗는 버릇 따위를 다른 쪽이 따라하는 건 다른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생활의 발견>은 이런 자잘한 습관에서부터 한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동인에 이르기까지 모방의 외연을 확장시킨다.20대의 경수(김상경)가 있다. 연극배우였다가 영화로 옮겼는데 일이 잘 안 풀린다. 영화 출연계획이 무산되자 춘천 사는 한 선배에게 들렀다가 부산의 부모에게 갈 작정으로 여행을 떠난다. 춘천에서 무용학원을 하는 명숙(예지원)을 만나 하룻밤을 보낸다. 그러나 다짜고짜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사랑해”라고 말해달라는 푼수같은 명숙이 부담스럽다. 게다가 알고보니 명숙은 경수의 춘천 선배의 애인이었다. 재수 옴 붙었다는 기분으로 부산 가는 기차를 탔다가 거기서 경주 사는 유부녀 선영(추상미)을 만난다. 선영을 쫓아 경주로 새고, 집까지 뒤쫓아가 불러내 몸을 섞
사랑마저도 `모방`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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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26일 개막하는 `2002 전주국제영화제` 개최설명회, 디지털영화 프로젝트 공개오는 4월26일부터 5월2일까지 열리는 `2002 전주국제영화제`의 본격적인 밑그림이 나왔다. 전주영화제 조직위원회는 지난 2월27일 아트선재센터에서 영화제 개최설명회 및 디지털 삼인삼색 제작발표회를 겸한 기자회견을 갖고, 영화제의 전반적인 프로그램과 매년 특별기획으로 마련해온 디지털영화 프로젝트를 공개했다. 예년의 전북대 문화관 대신 대규모 공연장인 소리의 전당을 주상영관으로, 덕진예술회관, 고사동 극장가 일부 상영관에서 치러질 세 번째 전주영화제에서 만날 영화는 모두 30여개국에서 온 190여편. 1회부터 이어온 대안영화와 디지털영화, 아시아 독립영화라는 지향을 바탕으로 이번 영화제가 내세운 주제는 ‘전쟁과 영화’다. 최근의 9·11 뉴욕 테러까지 국지적, 국제적 전쟁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세계 영화계가 변화하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영화란 무엇인가 하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파졸리니 보러 전주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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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로 놀며, 고민하며, 실험하며올해로 3회째를 맞은 `디지털 삼인삼색`에 참가한 왕샤오솨이와 스와 노부히로는, 둘 다 부산과 전주 등의 영화제를 통해 국내에 소개된 바 있다. 먼저 <북경자전거>의 왕샤오솨이는 지아장커, 장위안 등과 더불어 지하전영에서 활동하며 6세대라 불리는 젊은 감독군 중 하나. 자본주의 유입과 함께 급변하는 중국사회의 현실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개인의 삶을 직시하는 영화를 만들어왔던 그의 관심사는, 디지털 프로젝트에도 이어진다. <설날>은 설을 앞두고 위독한 아버지를 찾아가는 아들의 이야기. 미국에 가 있던 아들과 어머니는 9·11 사태로 미국 이민자에 대한 영주권이 보류되면서 발이 묶이고, 아버지는 중국에 홀로 남아 사경을 헤매고 있다. 마지막이 될 설을 가족과 함께 보내고 싶어하지만, 간신히 중국으로 온 아들만 보고 다른 가족들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는다. 왕샤오솨이 감독은 이미 촬영을 마치고 마무리 작업하랴, 새 영화 준비하
세 번째 디지털 삼인삼색, 감독과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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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트가 레오폴드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기이한 것은 이들이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아왔다는 사실. 케이트는 21세기 뉴욕의 커리어우먼이고, 레오폴드는 19세기 알바니 공작 3세다. 레오폴드는 케이트의 전 남자친구가 발견한 시간의 틈에서 빠져나왔지만, 사람들은 그가 시대극에 출연중인 배우쯤으로 생각한다. 레오폴드는 출세지향적인 케이트에게 삶의 작은 기쁨들을 돌아보게 하고, 케이트는 레오폴드에게 문명의 이기들을 예시해 보이며, 서로가 자기의 반쪽임을 깨닫는 기쁨에 들뜬다. 이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 100년이 넘는 세월의 강을 뛰어넘어야만 한다. 하지만 어떻게?<케이트 & 레오폴드>는 심상치 않은 로맨틱코미디다. 음악 영화 <헤비>, 범죄 스릴러 <캅 랜드>, 소녀들의 성장영화 <처음 만나는 자유>의 제임스 맨골드 감독이 “1940년대와 50년대 로맨틱코미디의 광팬”이었던 자신의 전력을 살려 도전한 작품. 로맨틱코미디의 요정으로 불리기에
해외신작 <케이트 & 레오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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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너 오늘은 오버하지 마라. 누가 얘 좀 말려줘요.” 김민에게 눈까지 흘기며 말하던 김원희는 물론이고 이미숙 김현수까지 다섯대의 카메라가 돌아가자 화려한 오버 춤연기로 나이트클럽 세트장을 흥분의 도가니로 만든다. 3대째 라이벌 관계인 네모클럽의 인수 위협에 맞서 라라클럽을 지키기 위해 결성된 기상천외한 댄스그룹 ‘울라라 씨스터즈’의 데뷔 무대인 오늘 촬영분은 의상과 무대배경과 음악을 바꿔가며 디스코, 로큰롤, 재즈댄스, 막춤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배우들이 4개월간 연습했다는 춤실력이 만족스러운 듯 박제현 감독의 오케이 사인이 쉽게쉽게 떨어진다. <울랄라 씨스터즈> 촬영장은 아침 9시부터 체조와 함께 시작해서 저녁 7시 정도면 어김없이 끝난다. 이는 치밀한 사전준비를 통한 합리적 제작시스템 도입 덕분으로 배우와 스텝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고.‘유쾌 상쾌 통쾌한 논스톱 슈퍼 코미디’를 표방한 <울랄라 씨스터즈>는 슬랩스틱보다는 등장인물 각각의 독특한 캐릭터
<울랄라 씨스터즈> 촬영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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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유학 때 사고치고 돌아온 뒤 한국생활에 몸이 근질근질했던 21살의 고등학생 성환(송승헌), 가정방문 호스트 아르바이트에도 불구하고 성적이 좋은 우섭(권상우), 인터넷 방송사를 운영하며 방송사 PD를 꿈꾸는 엉뚱한 행동의 진원(김영준). 그들은 시끌벅적한 고3의 하루를 마치고, 성환이 ‘그 자식’이라 부르는 졸부 아버지의 생일에 다녀오던 길에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차 지붕 위로 떨어진 피투성이 시체와 수십억대의 달러를 만난다. 순식간에 선택의 기로에 놓인 것. “이걸 갖고 튀어? 말어?”강남 아셈센터와 압구정, 둔촌동 창덕여고 등에서 촬영중인 <일단 뛰어!>는 세명의 청춘스타가 등장하는 바람에 항상 많은 여성팬들이 모여들었다. 특히 외진 지역에 위치한 창덕여고에서의 촬영은 어떻게 알고 왔는지 많은 팬들이 모여 스탭들이 통제하기 힘들 정도였다.난데없이 떨어진 수억대의 돈을 둘러싸고 압구정동 한복판에서 악동들과 신참 형사가 벌이는 좌충우돌 추격전을 그리는 청춘명랑
<일단 뛰어!> 촬영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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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간 `뜀박질` 넉달간 `주먹질`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 링으로 올라서는 샷을 찍는 2시간여 동안, 유오성(34)씨는 단 한차례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김득구의 등장을 환호하는 관중들의 모습을 위에서부터 훑어 내려가며 찍는 샷으로 유씨의 얼굴은 카메라에 자세히 잡히지도 않았으나, 그는 촬영을 멈추는 잠깐 잠깐 조차도 자신이 김득구임을 잊지 않았다.“그가 참 외로웠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이라곤 관장과 코치, 딱 2명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외로운 상황 속에서 14라운드까지 싸운 것만으로도 그가 존경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유씨는 김득구역을 처음 제안받았을 때 많이 망설였다. “돌아가신 분이라 연기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았고, 행복한 삶을 산 분도 아니었죠. 그럼에도 이 역을 하기로 한 건, 그의 삶이 개인의 삶이라기 보다 인간의 보편적인 삶이고, 용기를 가진 삶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돌아가신 분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
<챔피언> 김득구역의 유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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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1월 14일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열린 레이 맨시니와 김득구의 WBA(세계권투협회) 라이트급 세계타이틀 쟁탈전. 한국 최초로 라이트급 세계 챔피언에 도전한 김득구는 14회에 KO패한 뒤 병원에 실려갔다가 며칠 뒤 숨졌다. 20년 가까이 흐른 지난 1일, 로스앤젤레스 근교 세펠베다 댐 옆에 새로 만든 특설링 세트에서 이 비운의 복서의 마지막 경기를 재현하는 작업이 시작됐다.김득구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챔피언>의 곽경택 감독은 800여명의 미국인 엑스트라를 동원해 6일 동안으로 예정된 김득구와 맨시니 경기장면 촬영의 `레디 고'를 외쳤다. 곽 감독의 전작 <친구>에 나왔던 장동건씨가 제작진을 격려하기 위해 촬영장에 와 있었다. 이날 찍은 건, 김득구의 등장을 환호하는 관중들의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담은 샷으로 생생하고 자연스러운 관중들의 환호 모습을 뽑아내기 위해 곽 감독의 이런저런 주문 아래 10여 차례 이상 촬영이 반복됐다.“지금 눈에 보이는 건 허
`권투`가 아닌 `꿈`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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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아이어 감독의 <아이리스>는 영국 작가 아이리스 머독(1919∼1999)의 실제 삶에서 빌려온 이야기다. 감독은,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희곡과 소설을 통해 자기 세계관을 피력해온 이 위대한 작가의 ‘작품세계’ 대신 사랑이야기에 관심이 있다. 사랑이야기라면 우선 청춘남녀가 떠오를 테지만, 영화는 사랑이 젊은 날의 열정일 뿐 아니라 삶의 긴 여정과도 동행할 수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젊은 날의 아이리스(케이트 윈슬렛)는 수면 위를 막 차고 오른 물고기처럼 거침없고 솔직하다. 파티에서 처음 만나 그를 안경 너머로 몰래 지켜보던 존 베일리(휴 본빌)라는 풋내기 영문학 강사는 말도 더듬는 데다 소년처럼 수줍은 발그레한 볼을 지녔다. 독수리나 사슴으로 변해 달아나는 그리스 신화의 여신처럼 아이리스는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분방한 삶을 살지만, 존은 그런 아이리스를 지켜볼 뿐이다.영화는 젊은 날의 이야기와 노년의 이야기를 엇갈려 보여준다. 작가로서 명성을 확고하게 쌓은 아이리스
화려한 봄날은 가도 사랑은 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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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토레 피시첼리 선두로 극단출신 나폴리 출신 영화인들 활약 두드러져이탈리아영화의 중심이라 한다면, “영화는 가장 강한 무기”라는 슬로건 아래 무솔리니에 의해 세워진, 말 그대로‘영화의 도시’라 할 수 있는 세트장 치네치타와 영화학교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국립영화센터(Scuola Nazinale di Cinema, 1905년 설립)가 위치한 로마다. 영화라는 강한 무기는, 이제는 TV의 침공을 받아 참패했고, 네오리얼리즘의 힘도 사라진 90년대 중반까지 이탈리아영화의 중심은 토스카나 지방의 감독들(로베르토 베니니, 레오나르도 피라초니, 다리오 아르젠토 등)로 옮겨갔다. 이들은 이탈리아영화의 중심부로 진출해 코미디, 멜로, 공포 등 여러 장르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하며 이런 지역적 흐름이 남쪽의 항구도시인 나폴리까지 이어지고 있다. 최근 들어 나폴리 출신의 여러 감독, 제작자, 배우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낙후된 땅 나폴리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옮겨 이탈
[로마리포트] 이탈리아영화 나폴리로 중심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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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로 걷기>, 장편영화 대상과 관객이 뽑은 최고의 동성애 영화상 수상 지난 2월17일 이른 새벽녘, 포츠담 광장 베를리날레 팔라스트 극장에서 거행될 베를린영화제 시상식의 곰 트로피 수여자를 둘러싼 온갖 추측이 난무하던 그 순간, 전철 한 정거장 거리에 있는 재즈 극장 템포드롬에서는 또 하나의 시상식이 그 절정을 이루고 있었으니…. ‘베를린영화제- 동성애영화 시상식’, 일명 테디베어상 시상식이 그것이었다.올해로 16회를 맞는 이 행사는 독일 동성애자 연맹이 주최하며, 베를린영화제와는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나 행사 공식명칭에 ‘베를리날레’를 살짝 도용하고, 개최 시기 역시 영화제 마지막 일정에 맞물려 개최하는 심술을 부림으로써 몇시간 뒤 치뤄질 폐막식 행사의 김을 빼버리는 영화제의 악동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화려한 스포트라이트는 없지만, 시상식 후 곧바로 요란한 댄스파티로 이어지는 이벤트적 성격 덕분에 베를린영화제 참석 인사들의 관심도 공
[베를린통신] 동성애영화제 테디베어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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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가 산자를 눌렀다. 지난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R&B 가수 알리야의 유작 <뱀파이어 퀸>니 미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뱀파이어 퀸>은 현대의 록음악이 모든 뱀파이어들의 여왕 아카샤를 깊은 잠에서 깨우면서 시작되는 영화로 2월23일 개봉해 첫 사흘동안 1520만달러를 벌었다. 전 주 1위였던 <존 큐>는 2위로 물러났다.
알리야 유작 <뱀파이어 퀸>, 1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