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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 미켈센
조명이 어두운 식당에서 네 남자가 술잔을 기울인다. 은은하게 번지는 조명이 남자의 얼굴에 내려앉고 우물처럼 깊은 눈가에 촉촉이 눈물이 차오르는 순간, 비로소 장면이 완성된다. 마스 미켈센의 얼굴은 그 자체로 이야기이고 영화이며 정서다. 별거 아닌 독백도 이 남자의 얼굴을 거치는 순간 잘 숙성된 와인처럼 깊은 향을 머금는다. 2004년 <킹 아더>로 할리우드에 진출한 마스 미켈센은 주로 무표정하게 적들을 무찌르는, 고독하고 프로페셔널한 전사 역할을 자주 맡아왔지만 실은 누구보다 섬세한 감정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 중 한 사람이다. 2012년 <더 헌트>에서 집단의 광기 속에서 묵묵히 이를 감내하는 인물을 통해 얇은 피부 아래 터질 듯한 정념, 무표정의 격정이 무엇인지 여실히 증명했으며 이 영화로 칸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거머쥐기도 했다. <007 카지노 로얄>(2006)의 섹시한 악역이나 <NBC> 드라마 <한니발>에서
'어나더 라운드' 트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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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란 무엇인가. 인류사에서 아무도 해결하지 못한, 아니 해결할 의지가 없는 질문. 토마스 빈터베르의 <어나더 라운드>는 술에 관한 흥미로운 고찰을 시도한다. 무료한 일상에서 사라진 열정을 되찾기 위해 알코올 농도에 대한 실험을 벌이는 이 영화는 술에 대한 유쾌한 통찰과 애정으로 가득하다. 2021년 미국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과 영국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비결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균형감각에 있다. 술을 사랑하게 되는 중년 남자들의 해프닝을 해맑게 그리다가도 불현듯 묵직한 울림을 남기는 감독의 솜씨는 그야말로 잘 익은 위스키처럼 성숙하다. 여기에 <더 헌트>(2012)에서 호흡을 맞췄던 마스 미켈센, 토머스 보 라센 등 배우들의 연기는 한층 농익어 표정만으로도 보는 이의 마음을 흔든다. “진실은 술 속에 있다. 진실을 이야기할 기분이 되기 위해서는 취해야 한다.”(리케르트) 영화가 전하는 진심 속에 흠뻑 취해봐도 좋을 것이다.
술은 꼬리가 길
애주가에 대한 아주 흥미로운 고찰 '어나더 라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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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ARE YOU
2020년 초겨울, 박유림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호출을 받고서 들뜬 마음으로 그의 전작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감독에 대한 사소한 정보까지 철저히 암기하고 나간 자리에서 상대는 태연스럽게 “지금까지 무얼하며 살았는지 말해달라”고 질문했고 배우는 오히려 크게 당황하고 만다. 이후 안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의 한 대목까지 소리내어 읽은 뒤 첫 만남은 마무리됐다. 두 번째 만남에서 박유림은 같은 대목을 수어로 연기했고, 이 경험은 나중에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유나(박유림)가 연출가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와 첫 대면하는 오디션 장면으로 이어진다. 당시 그의 나이 28살.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하고 오랫동안 오디션을 준비했지만 좀처럼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았던 때에 “우울과 자기 의심이 한번에 뒤집히고 용감해지는 마음”이 그녀 안에서 급격히 일렁였다. 배우가 자신의 강한 에고를 최대치로 비워내길 주문하는 하마구치의 연기지도법은 아
'드라이브 마이 카' 박유림, 우울과 자기 의심이 한번에 뒤집히고 용감해지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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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리들리 스콧의 20년 프로젝트였던 이유
<하우스 오브 구찌>의 서사는 구조적으로 볼 때 승계와 전복, 몰락의 서사가 어우러진 왕가의 대서사시와 닮았다. 어이없게 어리석은 일이 벌어져 모든 것이 망가진다는 점까지도 그렇다. 실로 구치가는 패션계의 왕조라 할 만했고, 상류사회의 전유물이었던 명품 패션이 글로벌 자본주의 시장의 먹잇감이 되는 시대적 역동 속에서 함께 절멸했다. 구치의 행보는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 스포르차 가문처럼 스스로를 위대하다고 믿었으나 결국 장인 정신을 져버리고 만 자기 배반의 역사이기도 하다. 각본가인 로베르토 벤티베그나는 이를 하나의 아이러니로 일축한다. “자신들이 하고 있는 행위가 스스로 일궈놓은 것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그저 서로를 비난한다.” 이미 많이 가진 자들의 싸움이 대개 이러한 모양새라지만, 구치 일원들은 자신들이 부호인 동시에 예술가이기도 하다는 마음 저편의 믿음 때문에 한결 더 복잡하게 불행해졌다.
'하우스 오브 구찌'를 향한 사소한 세 가지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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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오브 구찌>는 구찌 브랜드의 세계적 명망이 높아지고 이에 따라 가족 갈등과 탈세, 무리한 라이선스 확장 사업이 동반되던 1970년대 후반 무렵에서 출발한다. 창립자 구치오 구치의 두 아들 알도(알 파치노)와 로돌프(제러미 아이언스)가 경영권을 나눠 가진 상황. 알도의 아들 파올로(자레드 레토)는 디자이너가 되려 하지만 주변으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지 못하고, 로돌프의 아들 마우리치오(애덤 드라이버)는 패션 제국을 물려받는 일보다 법률 공부에 관심을 쏟는다. 구치가를 물들인 야망과 죽음의 서사는 마우리치오가 운송 회사의 딸 파트리치아 레지아니(레이디 가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남몰래 싹을 틔운다. 로돌프의 반대에도 결혼을 감행한 이후 파트리치아는 알도와 공조해 마우리치오가 구치 가문의 리더가 되게끔 인도하지만 훗날 마우리치오는 외도와 함께 이혼을 요구한다. 구치가에서 배제된 파트리치아를 잠식한 것은 갖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없애버리겠다는 파괴심이었다.
#토스
키워드로 보는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와 실화 사이의 복잡다단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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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사라 게이 포든의 책 <하우스 오브 구찌: 살인, 광기, 화려함, 그리고 탐욕의 충격적 스토리>(이하 <하우스 오브 구찌>)가 출간된 직후, 리들리 스콧과 그의 아내인 지안니나 스콧이 운영하는 제작사 스콧 프리는 재빨리 판권을 사들였다. 3대를 거듭한 구치 가문의 요란하고 아이러니한 흥망성쇠를 읽은 리들리 스콧은 영화 전체를 지배할 비장한 욕망과 시각적 구조를 차근차근 건축해나가기 시작한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에 이은 2020년대 리들리 스콧의 두 번째 영화로 <하우스 오브 구찌>가 모습을 드러냈다. 19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브랜드의 명성이 요동칠 동안 가문의 역사에 커다란 말뚝을 박은 단 하나의 사건은 청부 살인의 피해자가 된 마우리치오 구치의 죽음이다. 그리고 그 뒤엔 구치의 영원한 외부자이자 불명예의 아이콘으로 남을 파트리치아 레지아니가 있다. 사랑과 야심이 탐욕과 복수로, 나아가 살인으
'하우스 오브 구찌'가 보여주는 구치가 살인 사건의 전말과 럭셔리 패션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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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애입니다.”
인터뷰 장소를 직접 의논하기를 원한 이영애가 전화 저쪽에서 자기를 소개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새삼 뉘앙스가 강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고귀함, 현명함, 공명정대함, 불변성과 거기 불가피하게 따르는 보수성까지 한 세트의 가치가 따라다니는 무슨 상징 같은 이름. 윗사람의 딸을 높여 부르는 ‘영애’라는 말도 있지만 <막돼먹은 영애씨>(2007~19)라는 시리즈의 작명이 방증하듯 이영애는 아이콘적 속성이 강한 배우였고 지금도 그렇다. “그가 프레임에 들어오는 것만으로 공기가 변한다”는 감독과 스탭들의 경험담도 맥을 같이할 것이다. 단단한 팬덤과 시즌2에 대한 열렬한 요구 속에 12월12일 종영한 12부작 <구경이>를 돌아보는 이영애는, 그 이름이 부르는 연상 가운데 이제 ‘재미’도 포함될 수 있지 않을까 기뻐하고 있었다. <사임당, 빛의 일기>가 공백기 이전 이영애의 연장이었다면, <구경이>는 CF 외에 연기하는 이영애를 실시간으
<씨네21> 선정 2021 시리즈 부문 최고의 여자배우, <구경이>의 이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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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조직이나 이런 사람은 하나씩 꼭 있다. 박용우가 맡은 오영은 한때 국세청 조세국 에이스였지만 지금은 “일을 안 하는 게 신념”이라고 말하는 인물이다. 새집 지은 헤어스타일, 느슨하게 풀어헤친 넥타이, 며칠 면도하지 않은 콧수염과 턱수염, 낡아빠진 멜빵바지 등 그의 후줄근한 외양은 과거 어떤 일을 겪었는지 궁금하게 한다. 현재 극장에서 상영중인 영화 <유체이탈자>와 한창 촬영 중인 시리즈 <트레이서> 등 영화와 시리즈를 활발하게 오가고 있는 박용우는 “직장 생활에 많이 치이거나, 사회생활에 염증을 느끼거나, 뜻대로 일이 안 풀리는 이들이 <트레이서>를 본다면 오영을 통해 위안도 받고, 저런 어른이 되면 참 좋겠다, 라는 마음을 느낄 것”이라고 오영에 대한 단서를 던져주었다.
-정리정돈이 안된 헤어스타일, 느슨하게 묶은 넥타이,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콧수염과 턱수염 등 외양이 눈에 띈다.
=대본을 읽고 머릿속에 떠올린 오영의 이미지는 크게
'트레이서' 박용우, 느슨한 유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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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은 간데없지만 온기는 남아 있다. 만원 때문에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에, 사직서를 안고 사는 중앙지방국세청 조사관 서혜영(고아성)은 희망보다 유리한 꼼수를 부린다. 명의를 빌려줬다가 피해를 입은 23살 가장이 죽음을 택한 현장에서 그에게 불리한 문자를 지우거나, 의문스런 사고를 당한 내부고발자의 유족에게 남몰래 CCTV 기록을 건네는 식으로. 대기업(<삼진그룹 영어토익반>)과 경찰서(<크라임 퍼즐>)를 지나 국세청에 도착한 배우 고아성은 전작들보다 느슨하고 유연하지만 여전히 쪽팔리게 살 수만은 없는 프로페셔널을 연기한다. 일하는 여성 캐릭터의 스펙트럼을 어떻게 잇고 넓힐 것인가. 고아성의 화두는 <트레이서>를 만나 더 깊어지고 있다.
-작품에서 착용한 출입증, 사원증을 개인 작업실에 모아둔 것을 봤다. 이번엔 국세청 조사관 신분의 이름표가 생겼다.
=다양한 직장인 캐릭터를 연기해봤지만 국세청 조사관은 한번도 가깝게 느껴본 적
'트레이서' 고아성, 성실한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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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잘 알면 엿도 더 잘 먹일 수 있다. 대기업 돈세탁을 전문으로 하던 전직 회계사 황동주는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각성해 잘나가던 직장을 그만두고 국세청에 입성한다. 공무원 하면 떠올리는 딱딱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뻔뻔하고 독한 추진력으로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황동주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 등에서 보여준 임시완의 ‘얄밉게 약 올리는’ 얼굴을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제대 후 쉬지 않고 여섯 작품을 내리 촬영했다는 임시완을 만났다.
-<트레이서>에는 어떻게 합류하게 됐나. <미생>의 CP(책임 프로듀서)였던 이찬호 스튜디오 웨이브 대표와의 인연 때문인가.
=<미생>이 나올 때만 해도 tvN 드라마는 시작 단계에 있었다. 그때처럼 선구자 역할을 웨이브에서도 잘해주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무엇보다 대본을 처음 받았을 때 국세청에 대해 아주 철저하게 조사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글
'트레이서' 임시완, 완성형의 임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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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 체납자에게 이들은 저승사자보다 더 무서운 존재다. 2022년 1월7일 첫 공개되는 웨이브 오리지널 시리즈 <트레이서>(제작 웨스트월드스토리·연출 이승영·극본 김현정)는 국세청 조세5국이 검은돈, 숨긴 돈, 구린 돈을 찾아나서는 활극이다. 경찰, 검찰 같은 수사기관을 배경으로 한 추적 드라마는 많지만 국세청을 배경으로 체납자를 쫓는 이야기는 이 작품이 처음이다. 한창 <트레이서>를 촬영하고 있는 배우 임시완, 고아성, 박용우 등 조세5국 삼총사는 코믹, 정색, 진지 등 변화무쌍한 포즈를 시시각각으로 선보이며 끈끈한 팀워크를 자랑했다. 다음 장부터 세 배우에게 듣는 <트레이서> 출연기를 전한다.
시리즈 '트레이서'의 배우들: 임시완, 고아성, 박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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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인터뷰가 서툴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인터뷰를 앞두고 의지를 다지는 백성철을 보니 산타와 첫 면접을 보던 나제희 팀장(곽선영)의 마음이 이랬을까 싶다. 그가 연기한 산타는 구경이(이영애)의 게임 길드 멤버였으나 조사B팀 소속이 되어 구경이, 나제희 팀장, 오경수(조현철)와 함께 사건을 파헤쳐가는 인물이다. 하나 정작 산타 본인은 끝막인 12화에 이르러서야 어렴풋이 진실이 밝혀지는, 드라마 <구경이>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캐릭터였다. 역할을 맡은 배우에게조차 산타는 베일에 싸여 있었지만 백성철은 적은 대사를 천번가량 읊고 행동과 표정, 마임까지 연습하며 가능한 영역 안에서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구경이> 종영을 앞두고 산타에 관한 숱한 질문에 후련한 마음으로 답할 수 있게 된 배우 백성철을 만났다.
산타 나도 산타의 본명이나 나이 등 관련 정보를 하나도 모르고 시작했다. ‘산타를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단순하게 생각하라’는 게 미팅 때부터 감독님이 주
'구경이' 백성철, 베일이 싸여 있던 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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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를 부산 사투리로 해도 될까요?” 서은수는 변성현 감독이 쓴 <킹메이커> 시나리오를 받고 이렇게 물었다. 변성현 감독의 전작을 좋아하는 데다 함께하는 선배 배우들의 이름을 듣고 속마음으로는 “대사가 없어도 참여하고 싶을 정도”로 기뻤지만, 그는 약간의 디테일을 더해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다. 김운범(설경구) 캠프의 젊은 선거운동원 수연은 본래 서울말을 구사하는 캐릭터였다. “이 보좌관(전배수)도 사투리를 쓰는데 수연도 지방에서 김운범을 돕기 위해 서울로 온 캐릭터로 만들고 싶었다.” 실제로 정치 현장에서 선거 캠프가 꾸려지면 각지에서 온,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인데 마침 부산에서 온 캐릭터가 없기도 했다. 변성현 감독은 “부산 사투리를 쓰는 캐릭터가 없으니 대사를 바꿔도 좋다”고 흔쾌히 허락했다.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라 부산 사투리라면 자신 있는 서은수는 그길로 대사의 어미를 모두 바꾼 뒤 변성현 감독에게 보여줬고, 리딩 때 그가 손질한 대사로 선
'킹메이커' 서은수, 투지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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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메이커> 현장에는 ‘전배수 복덕방’이 있었다. 종종 현장에서 대기 시간이 길어질 때 배우들은 그가 따로 마련한 ‘전배수 복덕방’에 삼삼오오 모여서 담소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나중에는 가장 선배 배우였던 박인환까지 “여기가 전배수 복덕방인가?”하며 자리를 찾을 정도였다. “배우보다는 FD의 마음으로 현장에 나갔다”는 그는 카메라 밖에서나 안에서나 분위기 메이커였다. 전배수가 연기하는 이 보좌관은 정치인 김운범(설경구)이나 그의 선거 전략가 서창대(이선균)에 비해 드라마틱한 감정 변화를 요하는 캐릭터가 아니었지만 프레임 안에서 매컷 다양한 모습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전배수의 모습을 두고 현장에서는 “이번에는 전배수가 무엇을 할까”라며 일종의 게임까지 만들어졌다. 서창대가 등장하기 전 선거 사무실은 오합지졸에 가깝기 때문에 그는 어떤 격식을 차리기보다 “동네 이장보다는 조금 유능한 정도의 느낌”을 주는 데 집중했고, 그외의 시간엔 동료들이 편하게 연기할 수 있도록
'킹메이커' 전배수, 관계성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