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영화관 씨네큐브 개관 25주년을 맞아 제작된 앤솔러지 영화다. 세편의 단편영화가 묶여 있고, 앞뒤로 씨네큐브의 풍경을 담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엮인다. 이종필 감독의 <침팬지>는 2000년대 젊은 시네필들의 자유분방함을 그리면서 과거와 영화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다. 윤가은 감독의 <자연스럽게>는 영화감독으로 등장한 고아성 배우가 7명의 어린이 배우와 함께하는 영화 촬영기를 담는다. 장건재 감독의 <영화의 시간>은 양말복, 장혜진 배우가 연기한 두명의 중년 여성이 극장을 매개로 재회하는 이야기다. 세 감독이 그간 보여줬던 고유의 개성이 뚜렷이 드러나면서 보는 재미를 키운다. 극장과 영화를 주제로 한 앤솔러지 영화이니만큼 극장에서 마주하는 특별한 순간들이 주요하게 다뤄진다. 부산국제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상영됐다.
[리뷰] 극장에서 마주하는 특별한 순간들, <극장의 시간들>
-
부당한 이유로 회사에서 해고된 나오이 레이토는 주변인의 꾐에 넘어가 회삿돈을 훔치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친구의 배신으로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고 암울한 미래만이 남은 것처럼 보인다. 그때 레이토를 찾아온 일면식 없는 변호사. 운 좋게 석방된 레이토는 도움의 손길이 어머니의 이복언니이자 대기업 야나기사와 그룹의 리더 야나기사와 치후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색한 첫 만남 속에 치후네는 레이토에게 거절할 수 없는 명령 혹은 부탁을 남긴다. “월향신사에 있는 녹나무의 파수꾼이 되어주세요.” 일종의 녹나무 관리자가 된 레이토는 각기 다른 사연을 지닌 사람들을 마주하게 된다. 특히 반전처럼 드러나는 미스터리한 녹나무의 힘은 죽음과 단절, 삶과 연결의 진정한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용의자 X의 헌신> 등을 집필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작을 처음으로 애니메이션화한 작품이다.
[리뷰]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을 기다려온 이들을 위한 축사, <녹나무의 파수꾼>
-
중학교 과학 교사인 그레이스(라이언 고슬링)는 갑작스럽게 우주 한가운데의 헤일메리호에서 깨어난다. 동승한 우주비행사들은 전부 사망했고, 기억을 잃은 채 혼란스러워하던 그레이스는 자신이 인류를 구원할 방법을 찾기 위해 승선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던 중 같은 이유로 우주를 유영하던 외계의 존재 로키와 조우한다. 로키와 그레이스는 각자의 고향을 살릴 방법을 찾아 함께 타우세티 행성으로 향한다. <마션>을 쓴 작가 앤디 위어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다. 우주에서 홀로 실존적 질문을 던지고 생존법을 탐구하며 외계인과의 소통 통로를 구축하는 서사에서 나아가 인간과 외계인의 관계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로키와의 우정을 통해 그레이스는 역으로 외로움을 절감하고 진정한 희생의 의미를 깨닫는다. 좁은 선체와 광활한 우주의 대비, 양쪽을 격렬히 오가는 두 주인공의 모험이 흥미롭게 그려 진다.
[리뷰] 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구원하는 것, <프로젝트 헤일메리>
-
제니퍼(제시카 채스테인)와 페르난도(이삭 에르난데스)는 뜨겁게 사랑한다. 매카시 가문의 상속자와 가문이 후원하는 예술학교의 발레리노로 처음 만난 이후, 두 남녀는 국경을 오가며 열애를 이어간다. 하지만 이들은 조건이 극명하게 다른 탓에 세상 앞에 당당하지 못하다. 페르난도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제니퍼를 만나기 위해 멕시코에서 밀입국을 감행해야 하는 반면, 제니퍼는 언제든 전용기를 타고 멕시코로 날아가 페르난도를 자신의 멕시코시티 별장으로 부를 수 있다. 페르난도는 제니퍼의 마음이 시혜에 그치는 것 같아 부담스럽고, 제니퍼는 페르난도가 자신을 떠날까봐 두렵다.
미셸 프랑코는 오랫동안 육체적·정신적 고통 앞에서 몸부림치는 개인을 탐구해왔다. 그러나 전작 <메모리>를 기점으로 그는 변화의 기미를 내비쳤다. <드림스>는 제니퍼와 페르난도의 관계를 통해 멜로에 기반한 ‘프랑코 2기’가 한층 원숙해졌음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한편 제니퍼와 페르난도는 현실의 문제가
[리뷰] 서로를 해칠 수밖에 없는 한쌍의 아메리칸드림, <드림스>
-
-
취기가 남았는지 헤실헤실, 둥글둥글한 얼굴에 공손한 말투. 한밤중 슈퍼에서 난동을 부리다 연행된 스즈키 다고사쿠(사토 지로)는 평범한 취객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남자가 대뜸 자신은 촉이 좋다며 곧 도쿄 한복판에서 폭발이 일어날 거라고 예언한다. 토도로키 형사(소메타니 쇼타)는 헛소리라 여기지만 곧 동료가 취조실로 뛰어들어와 폭발 사건이 발생했다고 전한다. 혼란스러워하는 토도로키를 향해 스즈키는 웃음기 어린 얼굴로 말한다. “이제부터 세번. 다음 폭발은 1시간 후입니다.”
재일 교포 작가 오승호의 동명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폭탄>은 용의자와 형사가 마주 앉아 벌이는 두뇌 싸움을 치열하게 펼친다. 제한된 시간 안에 스즈키의 말 속에서 폭탄이 숨겨진 장소를 찾아내지 못하면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한다는 사실이 긴장감을 한층 끌어올린다. 스즈키가 진짜 범인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대리인에 불과한지 추리하는 과정 역시 흥미롭다. 영화는 설계자이자 전능자 위치에 있는 스즈
[리뷰] 뒤틀린 두뇌 게임, 더 난해한 인간, <폭탄>
-
2004년 2월14일 현대중공업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였던 박일수 열사가 분신 투쟁으로 사망한다. 하지만 그의 죽음 이후 노동조합 진영은 각종 분열과 대립에 빠진다. 영화는 박일수 열사를 기억하는 두 사람을 카메라에 담는다. 한명은 박일수 열사의 동지였던 조성웅씨다. 그는 산속에서 시를 쓰고 땅을 일구며 산다. 한명은 아이들과 동요를 만들어 부르고 있는 민중가수 우창수씨다. 두 사람은 박일수 열사의 역사를 두고 한국 노동권과 자본주의사회가 드러낸 과오를 짚으면서 또 다른 극복의 방식을 논한다. 맞닿기 어려운 이상과 현실의 균열, 기록과 실제의 차이가 양분할 스크린을 횡단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26’ 후원작가 선정 등 미술계와 영화계를 오가며 활동 중인 홍진훤 감독의 두 번째 장편다큐멘터리다.
[리뷰] 실패의 기록인가, 기록의 실패인가, <오, 발렌타인>
-
사회고발 프로그램을 만드는 PD 채소연(조윤서)은 일본 기자 마츠다(곽시양)와 함께 의문의 종교 집단을 취재하기 위해 한 마을을 방문한다. 외부인을 경계하는 주민들, 예언을 둘러싼 기이한 의식, 취재가 진행될수록 의문의 사건이 이어지며 이들의 실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탐사취재라는 현실적 장치를 출발점으로 삼은 영화는 사라진 줄 알았던 일제강점기의 종교 사건을 현재의 인물들과 연결하며 폐쇄된 공동체와 종교적 광기를 결합한 한국 오컬트의 익숙한 틀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공동체의 집단적 신념이 만드는 비밀스러운 분위기는 점차 초자연적 영역으로 기울고 서사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취재 과정의 설득력과 직업적 전문성이 충분히 강조되지 못한 점은 아쉬움을 남기지만 모던한 장면 연출과 일정하게 유지되는 서늘한 온도는 눈여겨볼 만하다.
[리뷰] 공포는 특수분장이 아닌 서사의 구체성에서 나온다, <삼악도>
-
내쉬는 입김마저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의 밤, 데이비드(앨런 리치)는 손님 한명 없는 레스토랑에서 허기를 달랜다. 별안간 한 남자(얀 투알)가 쳐들어와 웨이트리스 애나(니나 베르그만)를 협박하자 그는 사태를 수습한다. 다시 운전대를 잡고 평온을 찾나 싶지만 아까 본 남자의 트럭이 데이비드의 차를 쫓는다. 트럭을 피하던 그는 결국 사고를 당하고 고립된다. <콜드 미트>는 겨우 지난 혹한의 고통을 소환한다. 고립된 이의 얼굴이 점점 사색이 되고 숏에 빛이 줄어들수록 공포와 긴장은 커진다. 극한 상황에서 본성이 드러나는 심리극이자, 손에 쥔 물건들이 곧 생존 도구가 되는 재난영화다. 여기에 정체불명의 생명체를 암시하는 환상 동화적 분위기도 스민다. 중반 이후 꼬아놓은 난제를 쉽게 풀어버리며 맥이 일찍 빠지는 감이 있으나 아직 쌀쌀한 3월에 즐길 만하다.
[리뷰] 체온이 떨어질수록 긴장은 오른다, <콜드 미트>
-
1936년 미국 시카고. 의학 박사 유프로니우스(아네트 베닝)는 한 여성의 사체를 소생해낸다. 새 생명을 얻은 ‘신부’ 페넬러피(제시 버클리)는 교감에 목말랐던 피조물 프랑켄슈타인(크리스천 베일)의 연인이 된다. 두 커플은 미국 전역을 오가며 기행을 일삼고, 이들의 뒤를 명석한 수사관 미르나 멀로이(페넬로페 크루스)가 추적한다. <브라이드!>는 <프랑켄 슈타인의 신부>(1931)로부터 느슨한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의 속편을 집필한다는 대전제나, 한 배우가 신부와 메리 셸리를 모두 오가는 설정 등이 1931년작과 동일하다. 다시 태어난 <브라이드!>를 지탱하는 두축은 서양 영화사와 페미니즘이다. 표현주의부터 할리우드 클래식 뮤지컬, 필름누아르와 아메리칸 뉴웨이브에 이르기까지 서양 영화사의 명작들이 러닝타임 내내 오마주되고, 동시대 가장 훌륭한 여성배우들이 고전기 남성배우들에게 주로 돌아가던 배역을 미덥게 재해석한다
[리뷰] 선대 페미니스트를 향한 오마주, 선배 필름메이커를 향한 콜라주, <브라이드!>
-
인간이 구름 위에 집을 짓고 사는 서기 2932년. 소년 아르코(오스카 트레사니니)는 날고 싶다. 12살이 되기 전까지는 비행할 수 없대도 말이다. 자신을 뺀 온 가족이 하늘을 누비는 게 부러웠던 그는 모두가 잠든 사이 누나의 날개와 다름없는 무지갯빛 망토를 슬쩍해 창공을 가른다. 얼떨결에 착륙한 땅은 잿빛 기류가 자욱한 2075년의 지구. 부모 대신 어린 동생을 로봇과 공동육아하는 소녀 아이리스(마고 린가드 올드라)가 아르코를 발견하면서부터 둘 사이에 우정이 싹트는데, 수상한 선글라스를 낀 세 남자가 이들을 주시하며 거리를 좁혀온다.
시간 여행, 첨단기술, 기후 재난의 상상력을 친숙한 화법으로 풀어낸 애니메이션 <아르코>는 어린이를 ‘귀엽게’ 그리는 일에 관심이 없다. 보호자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때로는 어른들이 내뿜는 위협마저 느끼면서 문제를 대면하는 이들은 미래의 주인이라는 정체성을 자신하듯 늠름하다. 잇따른 이별의 순간에도 마찬가지다. 14살에 <모노
[리뷰] 귀엽지 않아서 귀한, 미래의 늠름한 주인들, <아르코>
-
어려서부터 동물을 사랑하는 메이블은 우리 안에 갇힌 교내 동물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거북이, 개구리, 뱀 등을 책가방 안에 욱여넣어서라도 구출하려 하지만 얼마 안돼 선생님의 눈에 띄어 저지당하기 일쑤다. 지극히 일방적이고 서툰 계획. 그러나 실패할지언정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실천하는 것은 메이블에게 몹시 익숙한 사랑의 방식이다. 유년 시절 많은 것을 함께한 할머니를 떠나보내고 그와의 오랜 추억이 새겨진 연못가는 이제 제리 시장의 도시개발 계획 아래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마음이 힘들 때마다 연못가에서 같이 놀았던 비버, 노루, 오리, 잠자리들도 터전을 잃었다. 제리 시장으로부터 연못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아래 샘 교수를 찾고, 그가 인간의 의식을 동물 로봇에 옮기는 ‘호핑’ 기술을 발명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 메이블의 계획은 더욱 선명해졌다. 호핑 기술을 이용해 비버가 되어 실제 동물 세계에 잠입하는 것. 그리고 비버들을 이끌고 연못을 찾아가 아직 이곳에 많은
[리뷰] 웃은지 오래됐나요? 여러분 여기입니다, <호퍼스>
-
부구청장의 비리로 구청이 뉴스에 오르내리자 기획과장 국희(염혜란)가 출동한다. 국희는 완벽주의에 실행력까지 갖춘 구청의 해결사. 반면 소심한 성격 탓에 동료의 실수까지 떠안을 때가 많은 연경(최성은)은 상사인 국희의 일거수를 기록하며 자신의 롤 모델로 삼는다. 통제광인 엄마에 지친 딸 해리(아린)는 의절 편지만 남기고 가출하고, 국희는 뭔가 인생이 잘못되고 있음을 감지한다. 완고했던 직장 여성이 우연히 플라멩코를 접하며 성장한다는 내용의 <매드 댄스 오피스>는 오랜만의 원톱 여성 코미디다. 낯선 도전 속에서 새로이 자신을 발견해가는 과정은 참신할 게 없지만, 미시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인물 군상을 맡은 배우들의 앙상블이 발군이다. 배우 염혜란의 주연작으로 중소 규모 영화에서 여성주인공의 등장도 반갑지만, 욕심을 덜어내고 할 수 있는 만큼의 이야기에 도달하는 연출이 미덥다.
[리뷰] 더 보탤 것도 없이 완급 있는 코미디, 적소에 배치된 믿보 배우의 앙상블, <매드 댄스 오피스>
-
그레이스(제니퍼 로런스)와 잭슨(로버트 패틴슨)은 잭슨의 죽은 삼촌이 남긴 외딴집으로 이사한다. 작가 지망생인 그레이스는 집필에 몰두하고, 음악가인 잭슨은 새 앨범 작업에 전념하려 하지만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아이가 태어난 뒤 그레이스의 조울은 한층 심해지고, 잭슨은 그레이스를 이해하려 애쓰지만 아내를 혼자 두는 쪽을 택한다. <케빈에 대하여>를 연출한 린 램지 감독은 <다이 마이 러브>를 통해 이번에도 자기 자신을 견디지 못하는 여자를 탐구한다. 고립감과 우울에 휩싸여 소리를 지르고 집을 부수는 그레이스를 감독은 제지할 마음이 없다. 관객이 느낄 압박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모든 시청각적 요소의 강도를 올릴 뿐이다. 극장을 나가고 싶은 충동이 들다가도 제니퍼 로런스의 연기가 발목을 붙잡는다. 밀도 높은 퍼포먼스다. 그의 폭발과 침잠을 오가는 에너지에 이끌려 집 밖 숲으로, 거대한 환영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여자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리뷰] 그녀가 얼마나 부서지든, 부서지는 대로, <다이 마이 러브>
-
1946년 이탈리아. 전쟁은 끝났고 여성에겐 참정권이 생긴 첫해다. 하지만 델리아(파올라 코텔레시)는 시민으로서 동등한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 사회에서는 오직 여성이라는 이유로 임금차별을 받고, 가정에서는 남편 이바노(발레리오 마스탄드리아)가 자행하는 가정폭력에 매일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델리아는 여느 때처럼 세계의 부조리를 내면화하며 살던 중, 앞으로의 인생 전체를 뒤흔드는 편지 한통을 수령한다.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는 여성이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인식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블랙코미디다. 이때 델리아의 각성은 제목에 ‘우리’가 명시된 만큼 수많은 여성들에게도 유의미하게 퍼져나간다. 2023년 개봉 당시 이탈리아의 모든 흥행 기록을 새로 쓴 영화로 2차 세계대전 직후 성행한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문법, 칸초네풍의 삽입곡 등 작품에 인용된 이탈리아 시네마의 유산을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리뷰] ‘시네마 천국’의 유산으로 깨우쳐가는 페미니즘,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