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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계단 바로 앞방이 수미라는 맏딸이 쓰던 방입니다. 층계참부터 그랬지만 2층의 방들은 전부 꽃무늬 벽지로 발라놓았어요. 샌더슨이라는 영국 사람 작품이라네요. 여자아이들이 이런 방에서 자라면 자기도 꽃인 줄 알고, 세상은 동화 속 같은 줄만 알겠죠? 더러운 꼴 참고 사는 게 인생인데, 쯧쯧. 북향 방이지만 바닥까지 내려오는 긴 창까지 창이 세개나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환해질 수 있는 방이에요. 하지만 저렇게 무거운 커튼이라면 오후 3시에도 한밤중처럼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낮잠을 많이 자는 소녀였는지…이 방의 침대는 더블베드예요. 워낙 두 자매가 사이가 좋아서 달리 친구없이 둘이서 붙어다녔는데, 언니 방 침대가 아마 둘에게 편한 놀이터였나봐요. 침대 발치에 있는 건 뚜껑을 열 수 있는 의자예요. 귀중품이나 내놓기 싫은 물건들을 차곡차곡 담아둘 수 있는. 감탄하실 줄 알았어요. 뚜껑 달린 책상에 오밀조밀한 액자에 조그만 괘종시계까지. 무척 곰살궂고 화사한 여자아이가 눈에 선하죠?
그녀들의 집으로 오세요,<장화, 홍련> 세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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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90컷! 남기남식 영화찍기의 진수를 보여주마남기남 감독의 <갈갈이 삼형제와 드라큘라> 촬영현장 하이라이트 지상중계전설의 남기남 감독을 아시는지. 속사(速射)로만 따지면 충무로에서 그를 따를 자가 없다. 1년에 무려 9편을 찍기도 했던 1970년대, 그는 짧게는 3일, 길어야 일주일이면 촬영을 끝마치곤 했다. 1989년에는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10일 동안 영화 2편의 촬영을 끝냈다는 믿기 어려운 일화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외화 수입 쿼터를 따내기 위한 수단으로 한국영화 제작이 이뤄지던 시대이기에 ‘빨리찍기’의 대가인 그는 충무로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평양맨발>(1980), <영구와 땡칠이>(1989) 등의 히트작을 내놓으면서 그의 주가는 한층 치솟았다.하지만 1990년대는 그를 벼랑으로 내몰았다. 이후 10여년 동안 그는 9편의 어린이, 멜로, 코믹액션영화를 제작·연출했지만 번번이 미끄러졌다. 오직 빨리 찍기 위해 터득한 허술한 트릭은
남기남 감독 신작,전설의 현장을 가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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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칠 아낙들은 어디에 있습니까.영구 이게 바로 남 감독, 특유의 전매특허인 몰아찍기죠. ‘나까누끼’ 라고도 불립니다. 관중이야 저렇게 해서 그림이 나올 수 있을까 의심들 합니다만, 남 감독 나중에 아낙들의 인서트 장면을 따로 찍어서 편집에서 이어붙일 것이 분명하거든요. 아니면 ‘끼약’하는 사운드로만 설정을 준다든가. 나중에 보면 배우들의 연기가 자연스럽진 않은데는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감독이 머릿속에 콘티를 넣어가지고 다니지 않으면 이런 번개 작전은 시도 자체가 불가능하죠. 남 감독은 실제로 다음날 촬영이 있으면 새벽까지 콘티 들여다보느라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답니다.땡칠 아, 그렇군요. 그런데 견학온 어린이들이 내는 소음 같은 것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데는 무슨 복안이라도 있는 겁니까.영구 이번 작품은 동시녹음이긴 한데 이 장면은 나중에 후시로 처리할 듯 보입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남 감독 아예 환호성들을 따로 담아놓으라고 시키네요. 그렇군요. NG컷 모
남기남 감독 신작,전설의 현장을 가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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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이 영화에 주목하세요촬영 초읽기에 들어간 화제의 뉴 프로젝트 11편 미리 보기현상적으로 영화는 관객이 소비자이고 제작자나 감독이 생산자인 시장이다.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따라오고 반대로 공급이 수요를 만들기도 한다.하지만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지점은 관객과 제작자의 의도대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최근 충무로에서 스타급 배우는 무엇보다 중요한 변수다. 스타급 배우들이 한정된 상황에서 수많은 영화기획이 배우에게 간택받기 위해 줄을 선다.2003년 초여름의 충무로 풍경도 그렇다.캐스팅이 확정되면 제작자뿐 아니라 감독도 환호성을 지를 수밖에 없다.투자위축이 심각했던 올해지만 제작편수가 많이 줄어들 것 같지는 않다.대신 준비하는 작품이 많은 만큼 캐스팅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는 양상. 몇 가지 고비를 넘기고 조만간 첫 촬영에 들어갈 영화 11편을 모아봤다.이들 영화의 감독들이 전하는 이야기에서 앞으로 우리가 보게 될 영화의 모습을 그려보자. 편집자편집 심은하 eunhasoo@hani.c
2003 화제의 뉴 프로젝트 11편 미리보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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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균 감독의 <낭만자객>황당한 놈들이 떴다! 얼빵 자객들의 좌충우돌Director's Story“그땐, 바보였죠.” <두사부일체>의 첫 촬영이 있던 날, 윤제균(34) 감독은 무척이나 버벅거렸다. 적절한 앵글 사이즈가 뭔지도 잘 모르겠고, ‘레디 액션’ 하긴 했는데 언제 ‘컷’을 불러야 할지도 헷갈렸다. 광고회사를 다니던 시절 틈틈이 썼다가 “현상금에 눈이 멀어” 제출한 시나리오 <신혼여행>이 당선작으로 뽑힌 것이 그때까지 충무로 이력의 전부. 연출수업은 받은 적도 없던 낙하산(?) 감독을 스탭들은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뭐, 물어보면 잘 모르겠다고만 하니 스탭들도 황당했겠죠.”광고회사를 나와 네티즌 펀드 사업체인 엔터펀드에서 일하던 시절, 그는 투자사였던 필름지쪽에서 “요즘 좋은 시나리오 없냐”고 묻자 슬쩍 자신이 쓴 <두사부일체> 시나리오를 밀어넣었고, 급기야 연출까지 맡게 됐다. “촬영하면서 거짓말은 안 했어요. 궁금한 게 있
2003 화제의 뉴 프로젝트 11편 미리보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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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현 감독의 <웰컴 투 동막골>인간애와 평화의 감동을Director's Story만약 영화가 한 감독의 총체적인 인격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묻지마 패밀리> 중 <내 나이키>를 연출했던 박광현 감독을 ‘나쁜 남자’로 보긴 힘들 것이다. 공부 못하는 모범생, 싸움 못하는 깡패, 개인택시 없는 택시기사, 나이키 없는 소년 등 어딘가 삐걱거리는 비영웅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결국 소박한 행복의 의미를 전해주었던 <내 나이키>는 재기보다는 진심이 느껴졌던 데뷔작이다. 그가 기획했던 ‘선영아 사랑해’ 광고나 그가 연출했던 맥도날드 CF(‘신하균 버스’ 편, ‘박해일 수위실’ 편) 의 예까지 든다면 이는 확신으로 변할는지 모른다. “어떤 수준의 영화를 만들겠다는 집념보다는 늘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이 ‘69년생 소년’의 방부처리된 순수는 “바쁘신 부모님 때문에 4살 때부터 10살때까지 전라도 두메산골에서 할머니하고 둘이 살
2003 화제의 뉴 프로젝트 11편 미리보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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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동 감독의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초보 순경의 야시시 내사랑 쟁탈전Director's Story90년대 중반 뉴욕대 영화·TV제작과에 들어갔을 때, 이건동(35) 감독의 머릿속에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생각은 거의 없었다. ‘경영 전공이 아니면 대학을 보내지 않겠다’는 부친의 눈을 피하기 위해 1991년 미국에 당도한 이래 한 학교에서 1년 이상 붙어 있지 않았던 그였기 때문이다. 플로리다, 인디애나, 필라델피아의 대학을 돌며 연극, 무용, 스페인어, 아동심리학 등 거듭 전공을 바꿔간 것은 끝없는 여정을 좋아하는 그의 성격과 관련이 깊다. 만약 그때 그가 뉴욕에서 곽경택 감독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더 많은 대학과 전공을 섭렵했을지도 모른다. 우연한 기회에 곽 감독의 <영창이야기>에서 붐마이크를 들게 된 그는 영화의 맛, 그리고 사람의 맛을 알게 됐다. “경택이 형처럼 인간적인 사람은 처음 만났다. 그리고 영화란 게 결국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일이니
2003 화제의 뉴 프로젝트 11편 미리보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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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시인, 도시와 영화에 관해 읊조리다빔 벤더스 걸작선 서울아트시네마에서 6월13일부터 19일까지 열려홍성남/ 영화평론가 gnosis88@yahoo.com빔 벤더스의 초기작 <도시의 앨리스>(1970)의 마지막 부분에는 주인공 필립이 “잃어버린 세상”이란 헤드라인이 붙은 존 포드의 부고 기사를 읽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이 은근슬쩍 암시하고 있듯 벤더스는 구로사와 아키라가 그랬듯 존 포드를 흠모하고 존경한 영화감독이었다. 사실 그는 몇몇 평자들이 지적하듯이 과거에 존 포드가 영화를 통해 이뤘던 것을 그보다 이후의 영화로 재창조해낸 시네아스트라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포드가 스크린 위에 그려놓은 것이 미국의 과거 세계의 풍경화였다면 벤더스가 자신의 캔버스 위에 펼쳐놓은 것은 현대사회의 씁쓸한 풍경화였다. 뿌리없고 외로운 사람들의 길 떠남을 카메라로 기록함으로써 창조된 황량하면서도 시적인 현대사회의 풍경화.주지하다시피 벤더스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현대사회의 풍경화란 현
6월 13일부터 열리는 빔 벤더스 걸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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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의 예술가들, 신세기 할리우드 점령하다작가주의 블록버스터 시대 맞은 할리우드, 그 대변신 드라마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샘 레이미, 피터 잭슨, 브라이언 싱어, 리안, 워쇼스키… 이들이 누구인가. 신세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영웅적 지휘자 아니던가. 그런데 불과 5년 전만 해도 이들은 할리우드 변방의 예술파 혹은 컬트감독 아니었던가. 이건 정말 경악할, 아니 경이로운 일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이제 멍청하고 엉성하긴커녕 블록버스터 시대가 열린 1970년대 중반 이래 가장 심오하고 정교해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 편집자1998년 10월, 유니버설픽처스는 재정난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개발 중이던 <헐크> 프로젝트를 포기했다. 이미 2100만달러가 들어갔던 <헐크>는 <아마겟돈> <쥬만지>의 작가 조너선 헨슬리를 감독으로 정해두고 있었다. 그러나 2년 뒤 유니버설은 <헐크>의 봉인을 뜯었고, 리안을 불러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세대교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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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레이미 감독<스파이더 맨>값비싼 실패작들이 휩쓸고 간 폐허 위에 <매트릭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영리한 제작자 조엘 실버는 뭔가 재미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무슨 말인지는 이해가 안 가는 시나리오를 들고 온 워쇼스키 형제에게 <바운드>를 먼저 만들어보라고 했다. <바운드>는 4500만달러짜리 소박한 액션영화였지만, 동성간에 흐르는 애정과 적대감, 좁은 공간을 장악하는 스토리의 긴장이 살아 있는 영화였다. 실버는 감독으로서 그들의 능력을 평가했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흐름을 바꾸는 커다란 굽이를 파냈다. 철학과 문학과 종교가 교접하고, 동양의 시선과 동선이 서양의 테크놀로지와 합창한 <매트릭스>는 성공한 한편의 할리우드영화가 아니라, 변두리에서 교류되던 동서양 관객의 취향과 문화가 한곳에서 만나 마침내 거대한 해일을 만들어낸 기념비였고, 할리우드의 오래된 블록버스터 멘털리티를 한방에 날려보낸 혁명아였다. 그런 면에서 <매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세대교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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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영화제 최악의 해이해할 수 없는 <도그빌>과 <미스틱 리버> 수상 제외, 라인업도 부실황금종려상 <엘리펀트> 구스 반 산트(미국)심사위원 대상 <우작> 누리 빌게 세일란(터키)감독상 구스 반 산트 <엘리펀트> (미국)남우주연상 무자파 오즈데미르, 메메트 에민 토프락 <우작> (터키)여우주연상 마리 조세 코르제 <야만족의 침략>(캐나다)각본상 드니 아르캉 <야만족의 침략>(캐나다)심사위원상 <오후 5시> 사미라 마흐말바프(이란)황금촬영상 <리컨스트럭션> 크리스토퍼 보(덴마크)황금종려 단편상 <크래커 백> 글렌딘 이빈(호주)FIPRESCI상 <아버지와 아들> 알렉산더 소쿠로프(러시아)<아메리칸 스플렌더> 셰리 스프링어 버만(미국)<그날의 시간들> 제이미 로잘레스(스페인)주목할 만한 시선 대상 <청춘의 베스트
2003 칸 영화제 결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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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빛나는 칸에니콜 키드먼부터 키아누 리브스까지, 칸 레드카펫을 빛낸 스타들칸은 밤에 피어난다. 좀처럼 해가 기울지 않는 남프랑스의 바닷가에 슬그머니 어둠이 내리면, 빨간 주단 위로 별이 하나둘, 그리고 어느새 촘촘히 박히기 시작한다. 열이틀 동안 칸을 밝힌 그 스타들을, 여기 한자리에 불러모아본다.♣ 꼭 보고 말 거야. 이른 저녁부터 레드카펫 위의 스타를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뤼미에르 극장 주변은 인산인해를 이룬다.(사진 왼쪽)♣ 눈이 부신 니콜 키드먼. “여우주연상은 내 차지라구”라고 말하는 듯 보무도 당당히 걸어가는 모습. 그러나 그녀를 유난히 사랑한 칸영화제도, 그 사랑을 상으로 증명해 보이진 않았다.(사진 오른쪽)♣ “나, 집에 갈래.” 억지로 끌려나온 듯 심드렁한 모습의 키아누 리브스. 전용 이발사가 같이 못 온 모양이다. 레드카펫 입장 시간에도 지각해 <매트릭스2 리로디드> 팀의 애를 태웠다.(사진 왼쪽)♣ 아놀드 슈워제네거/ “나, 돌아왔어요!" 환갑
2003 칸 영화제 결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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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평단에서 좋아해? 내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군”클린트 이스트우드부터 구로사와 기요시까지, 칸을 달군 감독 12人 어록영화보다는 사람이 남은 영화제. 칸을 다녀간 스타감독들이 그들의 작품에 대해, 영화제에 대해, 연출관과 세계관에 대해 솔직하고 대담하게 발언했다. 취재수첩을 뒤져 찾아낸 그들의 주옥같은 말, 말, 말들.클린트 이스트우드 (워너브러더스를 제작 파트너로 만나게 된 경위에 대해) 수많은 스튜디오가 이 프로젝트를 거절했다. 심지어 내가 잘 아는 스튜디오 관계자들로부터도 거절을 당했다. “우린 이거랑은 좀 다른 타입의 영화를 찾고 있네. 그리고 타이츠(긴축 재정을 의미하는 듯)는 자네하고 어울리지 않는다고. ” 이건 요즘 기준으로는 저렴한 영화다. <미스틱 리버 리로디드>가 아니지 않은가. 결국 이 영화는 독립적인 방식으로 제작됐다. 워너브러더스와 빌리지 로드쇼에서 부분 투자를 했는데, 이렇게 해외영화제에 온 것이 그들에게 얼마간 기쁨과 보람이 됐으면 좋겠다
2003 칸 영화제 결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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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원인을 관객 스스로 생각하게 하고 싶었다”황금종려상과 감독상 휩쓴 <엘리펀트> 감독 구스 반 산트를 만나다꼭 1년 전 칸영화제는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볼링 포 콜럼바인>을 초청했었다. 미국사회에 전방위적 공격을 가하는 <볼링 포 콜럼바인>은 감독의 선언과 주장과 쇼맨십으로 가득한, 그렇게 떠들썩한 센세이션을 기도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똑같은 소재를 정반대 스타일로 다룬 극영화 <엘리펀트>가 ‘애프터서비스’ 내지 ‘비교체험’을 권장하기라도 하듯이 올해 칸을 찾아왔다. 주관과 분석이 이상하리만치 배제돼 있는 ‘영상시’ <엘리펀트>는 욕구불만의 영화제 내방객은 물론, 잊혀져가는 어린 망자들의 넋을, 조용히 그리고 따뜻하게 어루만져주고 있었다. 심사위원단은 영화제 규정(특정 작품에 상을 몰아주면 안 된다는)을 어기면서까지 <엘리펀트>와 구스 반 산트에게 황금종려상과 감독상을 동시에 안기는 파격적인 결단을 내렸고,
2003 칸 영화제 결산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