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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론은 영원의 땅이다. 원탁의 기사를 이끌고 많은 피를 흘린 아서왕은 마지막 순간이 오자 그의 적이며 누이이고 연인인 모르가나의 품에 안겨 아바론으로 떠난다. 거기엔 영원한 삶이 있다. 불멸의 삶, 그리고 무한 회귀의 삶이다. 아바론에는 끝이 없다. 아홉 여신의 손길에 따라 모든 게 무한히 반복되고 재생된다. 신화는 게임 ‘아바론’을 통해 현실로 진입한다. 사람들은 끝없이 리셋되는 게임 속에서 영원한 재생이라는 무거운 짐에 허우적댄다.보는 것은 믿는 것이다서로를 응시하던 로미오와 줄리엣이 입을 맞춘다. 계속된 NG에 지친 배우들이 중간에 화장실에 갔다가 손도 씻지 않고 돌아오지 말았을 거란 법은 없지만, 스크린을 보고 있는 사람들과는 관계없다. 스크린 속 키스신은 이미 현실의 운동이다. 영화를 보며 이미지들이 연속적으로 주어지는 것에 불과하다고 받아들이는 관객은 없다.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의 여백은 맹목적인, 혹은 자기보호적인 신뢰에 의해 메워진다.백문이 불여일견, 보이는 것에 대
어떤 세계를 원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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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 크루소> 홈페이지http://www.thegrid.net/fern.canyon/pirates/robinson/crusoe.htm알렉산더 셀커크 홈페이지http://members.madasafish.com/~kirkcaldy/Alexander/Selkirk.html<캐스트 어웨이> 공식 홈페이지http://www.castawaymovie.com/<걸리버 여행기> 그리고 <로빈슨 크루소> 등은 어린 시절 상상의 세계를 풍요롭게 해주는 대표적인 탐험 혹은 모험소설들이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이런 소설들일수록 원작을 제대로 읽은 이들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도 사실. 대부분 아동용으로 적당히 각색된 내용을 읽었거나, 아니면 명절에 TV를 통해 방영되던 애니메이션을 보고 익숙하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0여년 전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걸리버 여행기>의 원본이 출간되어 한동안 베스트셀러가
300년 전 캐스트 어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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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칼 리미트> 보다가 졸았다는 지난번 글 때문에 욕깨나 먹었다. 다 재미있게 봤는데 넌 무슨 용가리 통뼈라고 잘난 척하느냐가, 비난의 주된 요지였다. 근데 이번에도 욕먹게 생겼다. 안팎에서 흥행돌풍을 일으킨다는 <캐스트 어웨이>조차 뒤틀리도록 재미가 없었던 거다. 폭설 내리던 바로 그날 아침, 모처럼 딸네서 하룻밤 묵은 모친과 함께 조조할인으로 보았는데, 왜 이리 쓸데없이 길담 하면서 2시간20분을 버틴 딸과는 달리, 모친 또한 남들처럼 꽤나 재미있게 보신 모양이었다. 낭패다. 일없이 놀던 시절 재미삼아 논픽션 서바이벌 스토리들을 어지간히 읽어두었던 터여서 그런지, 이번엔 <버티칼 리미트> 때보다도 재미없는 정도가 훨씬 심했는데. 왜냐라는 물음으로 넘어가는데, 척이 하는 짓이 영 요령부득이었기 때문이다.모래사장에 통나무로만 ‘HELP’라는 글자를 만들어낼 수 있고, 또 4년 동안이나 캠프 파이어를 꺼트리지 않을 만큼 나무가 풍부한 섬에서, 왜 척은
낙원에서 고생했다면 누가 믿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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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을 거부합니다.”“이것 보세요 피고! 피고는 재판을 거부할 권리가 없어요.”“재판을 안 받겠다고요!”“저, 재판장님. 잠시 정회를 요청합니다!”죄수와 판사 그리고 변호사의 고함이 한마디씩 오간 법정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구형받은 여자와 그녀를 변호하는 변호사, 그리고 그들의 사랑을 그리는 영화 <인디언썸머>의 촬영현장. 법원관리들에게 끌려나가던 죄수는 재판을 안 받겠다며 계속 울부짖는다. 제법 큰 규모의 법정 세트가 눈길을 끄는 양수리 종합촬영소 세트장. 평소 차분하게 촬영이 진행되던 이곳이 오늘은 좀 소란스럽다. 이번 촬영장면이 극중 30%가 넘는 법정 신 중, 유일하게 액션(?)이 있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스탭들이 탈진 상태에 이를쯤 노효정 감독은 OK 사인을 낸다. NG의 주범은 법정관리를 맡은 단역배우들. 평소에는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됐는데 이 대목에선 죄수를 끌어내는 연기(?)까지 맡은 탓이다. 영화는 얼핏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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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이가 죽었다.
유난히 춥게 느껴졌던 10년 전 겨울 어느 날 투신했다. 옷은 따뜻하게 입고 갔을까. 아무도 그 애가 왜 죽었는지 모른다. 오랜만에 꺼내본 사진 속에서 그 애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실은 늘 우울한 표정이어서 가끔씩 내비치는 미소가 더 마음속까지 파고들었었는데. 10여년 전 사진 속에서는 그 아이도, 나도, 주변의 풍경까지도 풋풋하고 싱그러워 보였다. 사진은 언제나 그렇다.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을 때라도 그 사진을 보며 과거를 추억할 때를 미리 염려해서인지 찬란하고 과장되게 웃고 있다.
좀 특별한 아이였다. 제일 가까운 언니와도 나이 차이가 스무살이나 났다. 현이가 태어났을 때 언니가 시집을 갔는데 처녀가 애를 낳고 시집을 갔다고 소문이 났다며 쑥스러운 듯 비밀스럽게 얘기해줬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제들 탓인지 현이는 동년배로서는 가질 수 없는 어른스러움을 가지고 있었다. 뭔지 모를 어두운 가족사를 가진 아이 같았다. 밝고 재미있는 사람이 편하기야 하지
혹시, 사랑하세요?,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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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수잔 토드, 제니퍼 토드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각본 크리스토퍼 놀란, 조너선 놀란 촬영 월리 피스터 편집 도디 돈 음악 데이비드 줄리안 출연 가이 피어스, 캐리 앤 모스, 조 판톨리아노 수입·배급 씨네월드 메멘토. 기억하라. 당신이 지나온 촌음의 발자국들을. 잉크로 쓴 글씨가 물에 젖어 번지며 제 형태를 잃어가듯, 기억이란 어차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왜곡되거나 희미해지는 불완전한 삶의 발췌록이다. 하지만 레너드에겐 그 정도가 좀 심하다. 자신의 아내를 강간하고 살해한 남자와 싸우다가 다친 뒤부터, 기억이 15분 이상 지속되지 않는 희귀한 기억상실증을 앓게 된 것이다. 경찰이 별 성과없이 사건에서 손을 떼자 분노한 레너드는 보험조사관 일을 접고 직접 범인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바로 15분 전의 일도 기억할 수 없는 그에게 뚜렷한 것은 사랑하는 아내의 마지막 모습과 복수뿐. 중요한 실마리까지도 단숨에 잊고 마는 기억력을 대체하기 위해 그는 생활방식을 바꾼다. 가는 장소, 만나는
15분, 기억의 퍼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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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신비주의와 샤머니즘 계열의 1978년작 <옛날옛적에 훠어이 훠이>는 최인훈의 희곡작품이었는데 어느 극단의 공연을 보고 나는 영상화하는 꿈을 키웠다. 마침 나의 전작인 <문>(1977)이 우수영화상을 수상하자 제작자 강대진(현 전국극장연합회 회장)이 그 공로를 인정했음인지 나의 간절한 청을 들어주었다. 어차피 흥행물은 아니니까 적은 예산으로 만들어 보라는 것이었다.연극은 무대라는 좁은 공간에 그 일루전을 집약적으로, 구심점을 갖고 표현했으나 영화는 넓은 공간과 다양한 영상표현이 가능하기에 나는 시네포엠으로 그 몽환적 세계를 표현하려 했다. 그러나 관객의 반응은 화면은 아름답고 서정적이나 너무 상징적이어서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흥행은 참패하고 말았다.1979년 <장마>는 <불꽃>(1975)으로 대종상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남아진흥의 고 서종호 사장이 제안한 영화다. 어느 날 윤흥길의 소설 <장마>를 들고
한국의 윌리엄 와일러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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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처음 본 조지 팔의 영화는 <엄지동이 톰>이었습니다. 구체적인 연도는 생각나지 않지만 굉장히 어렸을 때였다는 건 분명합니다. 유치원 다니기 전이었을지도 몰라요. 영화의 줄거리도 잘 생각나지 않는군요. 기억나는 것은 사람 손바닥 위에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든 러스 탬블린의 작은 모습이 정말로 경이로웠다는 것입니다.정작 팔의 영화를 온전히 즐길 수 있었던 틴에이저 때는 그의 영화들이 그렇게 대단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슬슬 영화와 SF 장르에 눈이 뜨이기 시작하자 건방져지기 시작한 것이지요. 전 그의 촌스러운 특수효과를 비웃었고 순진하기 짝이 없는 스토리에 야유를 퍼부었습니다.아, 그것도 또 나이가 드니까 변합니다. 이런 순진무구한 영화들이 희소가치를 띠게 되고 또 세월이 지나면서 그런 자잘한 단점들이 오히려 재미있어지니까요. 예전에는 우주선 가장자리에 블루스크린 터치 때 남는 까만 선만 나와도 짜증이 났지만, 요샌 80년대 SF영화에 나오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촌스러움에 갈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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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씨네21> 288호에 실렸던 <눈물>에 대한 응답이 도착했다. 의 영화 평론가 이상용에게서. 그의 반론은 크게 세 가지로 대별될 수가 있겠다. 첫째 <눈물>에 대한 사회적 함의에 대한 평가, 둘째 영화 평론가 심영섭의 <눈물>의 비평에 대한 메타 비평 그리고 이와 맞물려진 필연적인 귀결이지만 셋째 이상용 자신을 포함한 김영하의 십대 오리엘탈리즘 등과 연관된 <눈물>의 비판에 대한 옹호와 입장 표명 등으로 대별되는 것 같다.먼저 <눈물>의 사회적 함의에 대한 평가 부분에서 이상용이든 나든 심지어 <눈물>이 십대 오리엔탈리즘을 조장한다는 김영하이든 <눈물>이 대한민국 주류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메스를 가하고 십대들의 감추어진 이면을 다루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는 데는 별다른 이견이 없는 것 같다. 그러니 이 점에 대해서는 넘어가기로 하자(왜냐면 이상용 본인도 ‘<눈물>과 연관되어 이 사
제발, 텍스트로 돌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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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년이 자라 어른이 되기까지에는 어떤 힘들이 작용하는 것일까? 현대 생물학은 유전자가 개체 성장의 비밀을 쥐고 있다고 말하거나 적어도 그렇게 말하고 싶어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인간의 성장이 유전정보만으로 결정되는 것이라면 성장은 드라마가 아니라 이미 결정돼 있는 것의 따분한 운명적 전개에 불과하다. 우리가 ‘위인’이라 부르는 사람들, 예술의 천재들, 탁월한 인생을 전개한 개인들의 삶은 인생이 생물학적 운명의 단순 전개가 아니라 그 운명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유전적 결함과의 싸움이 아니었다면 베토벤,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헬렌 켈러는 없었을 것이고 인간 창조성의 보물창고는 한없이 초라해졌을 것이다. 미래사회는 개체의 유전적 결함을 제거하는 데 막대한 정성을 쏟게 되겠지만, 그러나 잊지 말지어다, 인간적 위대성은 어떤 완전성의 결과이기보다는 오히려 결함의 결과라는 사실을.사람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 모든 성장의 서사(Bildungsroman)가 우리를 매혹하는 것은
바람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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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댄서>셀마는 아들과 살고 있다. 곧 자기 눈이 멀거란 걸 알지만 아들 역시 그대로 두면 앞을 볼 수 없는 처지가 되기 때문에 아들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악착같이 돈을 버는 셀마에게는 춤과 노래만이 구원이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각본, 비욕, 카트린 드뇌브 출연, 비베크 윈델로프 제작, 미로비전 수입·배급, 상영시간 134분박평식 모성애에는 국경이 없고 눈물엔 국적이 없다. ★★★☆심영섭 영화를 보는 내내 내 가슴은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홍성남 비욕, 수잔 헤이워드와 줄리 앤드루스를 융합해 새로운 줄리에타 마시나를 탄생시키다 ★★★☆ <도쿄 맑음>시마즈와 요코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즐긴다. 어느 날 요코가 작은 실수를 저지른다. 예민한 성격의 요코는 뜻밖의 반응을 보이며 자신을 탓한다. 이후 요코는 심상치 않은 행동을 일삼는다. 놀란 시마즈는 함께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을 한다. 다케나카 나오토 감독, 다케나카 나오토, 나카야마 미호, 마쓰
어둠 속의 댄서 / 도쿄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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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계의 지각변동을 예고하는 사건인가, 단순한 기업인수일 뿐인가. 지난 2월12일 로커스홀딩스(대표 박병무)가 시네마서비스(대표 김정상)를 인수한다는 발표를 한 뒤 충무로가 술렁이고 있다. 시네마서비스 인수에 관한 소식은 충무로 관계자들에게 의외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첫째로 1년 전 시네마서비스는 워버그핀커스로부터 거액의 외자를 유치해 또다른 회사가 대주주로 등장하리라 예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며, 둘째는 시네마서비스를 인수하는 주체가 영화를 포함한 종합 엔터테인먼트 업체인 싸이더스의 대주주 로커스홀딩스라는 점 때문이다.60% 지분 확보한 최대주주로 부상사실 금융에 관한 지식이 해박한 사람이 아니라면 로커스홀딩스의 시네마서비스 인수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번 거래의 내용을 단순하게 바라본다면 로커스홀딩스의 주식과 시네마서비스의 주식을 맞바꾼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이러한 주식 맞바꾸기 거래, 즉 스와핑이 허용되지 않으므로 흔히 사용되고 있는 제3자 배
충무로, 금융자본과 함께 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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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상 후보작 발표 - <글래디에이터> 최다부문작품난에 대한 우려와 분분한 예측을 뒤로 하고,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가 각 부문 후보를 추리고 행사 준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지난 2월13일 아카데미상 후보가 최종 확정 발표됐다. 수상이 유력하다고 점쳐진 작품들이 주요 부문에 두루 지명됐는데, 이중 <글래디에이터>가 12개 부문에, <와호장룡>이 10개 부문에 올라 있다. 이 밖에 <에린 브로코비치> <트래픽> <초콜렛>이 5개 부문 수상 후보로 지명됐다.올 아카데미의 최고 이슈는, 외국어영화로서 역대 아카데미 최고 노미네이션을 기록한 <와호장룡>이다. <와호장룡>은 미국 내 최고 흥행기록(6천만달러)을 수립한 외국어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제치는 등 높은 대중적인 지지도를 보이고 있는 중. 그러나 최우수작품상과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동시 지명된 와 <인생은 아름다워>
로마 검투사 vs 중국 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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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훈 이사장을 비롯, 영화제 집행위원 15인 위촉제38회 대종상 영화제 집행위원회가 구성됐다. 2월16일 영화인협회와 영화인회의가 각각 동수로 추천한 집행위원에는 유동훈 영협 이사장과 이춘연 영화인회의 이사장을 포함 총 15인이 위촉됐다. 대종상 영화제는 그동안 영협이 주관해왔으나 올해부터 영화인회의쪽과 공동으로 치르게됐다. 사무국에 따르면 집행위원회는 심사위원단 선정뿐 아니라 애니메이션, 단편영화, 다큐멘터리 등의 부문을 신설, 운영하는 등 명실상부한 국내영화제로 발돋움하기 위한 구체적인 논의를 진행할 예정이다. 4월25일 열리는 영화제 집행위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유동훈(영화인협회 이사장)이춘연(영화인회의 이사장)이용관(영화진흥위원회 부위원장)문성근(스크린쿼터문화연대 이사장)유인택(한국영화제작가협회 회장)채윤희(여성영화인모임 대표)정용탁(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원용진(서강대 교수)민병록(동국대 교수)김유진(감독)임원식(감독협회 회장)팽정문(촬영감독 협회 회장)신우철(배우협회 회
대종상 영화제, 돛을 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