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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도시에서 만난 서로 다른 두 청춘. 한때 서로 유일했던 두 사람. 소소한 일에도 즐거웠던 그 시절. 진지하게 그와 남은 여생을 꿈꾸던 그녀. 이대로 시간을 멈출 수 있다면. 지금 가진 걸 앞으로도 소중히 여길래.’ <우견니>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노랫말은 자오양과 저우찬이 함께 거쳐온 긴 시간을 함축한다. ‘너를 만나’(=우견니) 자기 삶을 사랑하게 된 이들은 이제 네가 없이도 앞으로 나아간다.
<우견니>의 사랑은 전학을 타고 시작한다. 대입을 앞둔 고등학생 저우찬(이문한)이 베이징에서 외진 도시 추잉시로 이사온다. 인재 배출로 유명한 추잉시가 아들의 명문대 경영학과 진학이 인생 목표인 그의 부모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저우찬은 어쩔 수 없이 미술에 대한 꿈을 접지만 같은 반 여학생 자오양(서약함) 덕분에 다시 붓을 쥔다. 저우찬의 그림 실력을 알아본 자오양이 본인이 운영하는 오락 클럽에 붙일 포스터를 그릴 기회를 그에게 준 것. 저우찬은 자오양의
[리뷰] 나를 성장시키는 씁쓸한 연애에 관하여, <우견니>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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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기운이 완연했던 2024년 밸런타인데이에 중국 청춘영화 <우견니>가 한국을 찾아왔다. 언뜻 <우견니>는 가장 젊고 빛나는 시절을 함께 보낸 연인의 러브 스토리가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 같은 반이 된 고등학교 여학생 자오양(서약함)과 남학생 저우찬(이문한)이 대학 시절을 거쳐 20대 중반까지 연애하는 과정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따라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볼수록 그 안에서 건져 올려지는 또 다른 것들이 있다. 연애 관계에 지독하게 훼방을 놓는 현실적인 문제에도 카메라를 가져다대는 영화는 사랑의 비참한 면도 들추며 예쁜 청춘영화와 노선을 달리한다. 달콤하기보단 쌉싸름한 <우견니>의 리뷰를 먼저 싣는다. 그리고 뤄뤄 감독과의 서면 인터뷰를 동봉한다. 읽다보면 <우견니>가 어떻게 현실을 저버리지 않는 사랑영화가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화권 청춘영화가 우리의 무엇을 건드려 2000년대부터 지금까지
[커버] 너를 만나 성장하다, <우견니> 리뷰와 뤄뤄 감독 인터뷰 그리고 중화권 청춘영화에 관한 짧은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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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괴함. 기이하고 괴상망측하다는 뜻이다. 조금 더 길게 풀자면, 평상의 것들과는 너무도 달라 예측하거나 헤아리기 어렵다는 의미이다. 여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이 전통시장을 찾고 기자들에 둘러싸여 카메라 세례를 받는 일이야 그저 식상할 뿐 기괴할 것까지는 없었다. 총선 전이고, 게다가 설 연휴를 앞둔 차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가 한손에는 날것의 털 뽑힌 목 잘린 닭의 아랫부분을 쥐고, 다른 한손에는 시장상품권 뭉치를 펼쳐 든 모습을 보았을 때, 내 머리는 이물질이 낀 톱니바퀴마냥 덜컥거렸다.
‘저게 대체 무슨 장면인 걸까?’
본래 의미가 파악되지 않는 장면을 보면 잠시간 멈칫할 수는 있다. 그래서 그 사진이 실린 기사를 읽어보았다. 보통은 제목이라도 보거나 맥락을 담은 문자 정보와 결합되면 이해하기 어려운 이미지도 그럭저럭 납득이 되는 법이다. 그런데 읽고 나서도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양계농가들의 시위 장면도 아니고, 지역화폐 활성화를 부르짖는 시장 상인도 아닌데, 게다가 그 두
[정준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생닭,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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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사회. 정제된 표현으로 감쌌지만 결국 ‘늙었다’는 속삭임이다. 지난 몇년간 우리는 현실을 진단하고 처방전을 내는 데 몰두했다. 늙음은 자주 수술대에 오르듯 공론의 장에 올라 이리저리 들춰지고 해부된다. 하지만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노년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본 적 있었나? 적어도 나는 아니었음을 고백한다. 활자와 숫자를 넘어, 뜨거운 숨을 내쉬는 이들에 대한 응시가 필요한 때. 이 시기에 노년의 마지막을 다룬 두편의 영화, <소풍>과 <플랜 75>가 우리를 찾아온 것은 필연일지도 모르겠다.
소재는 비슷하지만, 두 작품은 서로 닮은 점이 없다. 한 가지만 빼고 말이다. 이들이 공유하는 은밀한 특징이 하나 있는데, ‘누워 있는 노인’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꿀 같은 잠이나 편안한 휴식은 아니다. 그들은 몸이 망가져서, 혹은 일어나지 않기로 결심해서 누웠다. 이 상태는 죽음을 향해 가는 길목에 있다. 그래서 누운 노인의 형상은 죽음에 대한 인
[비평] 눕고 일어나는 생의 행위, <플랜 75>와 <소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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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웹소설이 원작인 드라마가 늘어날수록 ‘드라마 덕후’는 바빠진다. 예전에는 드라마만 보면 되었지만, 이제는 ‘쿠키’를 굽고, 코인을 구매해 원작을 정주행한 후 드라마를 영접하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드라마를 먼저 보고 원작을 순례할 때도 있다). 드라마와 원작을 함께 보는 건 ‘제3의 눈’을 가지게 된 것과 같다고나 할까? 하나의 작품을 입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어서 유익할 때가 많다. 물론 ‘선악과’를 먹어버린 것처럼 ‘차라리 원작을 안 봤더라면 재미있게 봤을 텐데’라는 후회가 몰려올 때도 있다.
웹툰의 질문, 드라마의 질문
시청자뿐 아니라 창작자의 고민도 깊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매의 눈’으로 원작과 비교 분석하는 깐깐한 원작 팬들을 설득시켜야 함과 동시에 드라마 팬들도 만족시켜야 하기에 마치 저글링하듯 드라마를 제작하지 않을까? 원작이 소위 ‘레전드’ 반열에 오른 유명한 작품일수록 그 부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넷플릭스 시리즈 <살인자ㅇ난
[비평] 복잡하고 난감한 질문은 어디로, <살인자ㅇ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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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 게 뭐야?” 블랙아웃의 화면 위로 던져진 첫 질문이다. 산드라(잔드라 휠러)의 입을 빌려 쥐스틴 트리에가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 성공한 한 여성의 남편이 의문의 추락사로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이 사건은 관객을 유혹하는 미끼일 뿐이다. 미끼의 떡밥으로 배를 채울 수 없듯,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 <추락의 해부>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이 궁금증을 관객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도록 한다는 데 있다. 나는 무엇을 믿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때, 우리는 각자의 서사를 완성할 수 있다. 결국 <추락의 해부>를 완성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빈틈, 진실의 자리
작가 산드라와 그 작품 세계에 대한 논문을 준비 중인 학생 조에(카미유 루더퍼드)의 인터뷰는 사뮈엘(사뮈엘 테이스)이 음악을 크게 틀면서 중단된다. 하지만 사뮈엘은 (그것이 자살이든 타살이든) 죽음을 통해 자신이 중단시킨 인터뷰를 지속시킨다. 그르노블에서 다시 만나 인터
[비평] 사실의 빈틈에서 관객이 마주하는 것들, <추락의 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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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획이 정해지면 취재가 시작된다. 취재를 한 후에 데스크에서 정리한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계간지는 계절의 변화에 맞춰서, 월간지는 한달의 시기에 따라서. 지금 일하는 부서는 월간지라 대부분 월초에 치열하게 기획 회의를 마치고 중순까지 취재를 마치고 남은 기간 마감을 치는 형태로 한달의 업무 스케줄이 짜인다. 그나마 주간지에서 일하는 게 아니라 다행이라 해야 하나.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잡지를 만드는 사람에게 야근은 대부분 필연적이다. 나 역시 그렇다. 심지어 옮긴 팀에서 첫 취재였고, 첫 인터뷰였다. 어떤 형태로든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녹취를 풀기 전에 저장해둔 좋아하는 인터뷰 기사를 다시 찾아 읽었다. <씨네21>이 금정연, 오한기, 이상우와, 정지돈 작가와 나눈 대화, 인터뷰에서 브래드 피트가 앤서니 홉킨스를 인터뷰한 기사, <뉴요커>에서 마이클 슐먼과 프랜 리보위츠의 인터뷰. 각각 톤과 방식은 다르지만, 좋은 인터뷰의 요
[김민성의 시네마 디스패치] 맛과 요리 섹션: 인터뷰 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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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슐레겔 지음 / 박상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펴냄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낭만주의 문학이론을 주도한 철학자이자 작가다. 프랑스혁명으로 변화의 바람이 불던 때, 슐레겔은 문학계 역시 새로운 문학운동이 필요함을 역설했고 그 일환으로 <루친데>를 서술했다. <루친데>는 그가 남긴 유일한 소설이며 다양한 장르와 형식, 요소들이 섞여 있다. 이는 법칙 없이 모든 것을 포괄하고자 하는 낭만주의 문학이론을 실험적으로 체현한 결과다. 책은 총 13개의 텍스트로 구성됐으며 개별 텍스트들은 대체로 편지글의 형태로 알레고리와 농담, 상상, 성찰 등의 주제를 다룬다. 7번째 <남성 수업 시대> 텍스트를 중심으로 앞뒤의 6개 텍스트가 대칭적으로 분리된 구조인데 한 텍스트의 말미와 다음 텍스트의 도입부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도 시간적, 내용적 측면에서의 연결고리가 약한 것이 특징이다. 개별 텍스트의 흐름 자체는 흥미로운 반면 이러한 독특한 구조와 문체로 인해 일반
씨네21 추천도서 - <루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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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콘수엘로 드 생텍쥐페리 지음 / 윤진 옮김 / 문학동네 펴냄
<어린 왕자> <전시 조종사>를 쓴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가 아내 콘수엘로와 15년간 주고받은 168통의 편지를 책으로 묶었다. 장정이 아름다운 이 책의 목차는 1930년부터 1944년에 이르는 동안 ‘남아메리카, 프랑스, 북아프리카’, ‘뉴욕’, ‘북아프리카, 사르데냐’로 나뉘어 있다. 전시 조종사로 살았던 생텍쥐페리의 삶의 궤적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콘수엘로는 화가이자 조각가인 동시에 비행사이자 작가의 아내였고, 남편이 속한 세상에서 자주 외면받는, 바람기 있는 남편 때문에 쉼 없이 고통받던 여자였다. 이 책에서는 세상에 대해 절망하던 전쟁 중의 생텍쥐페리를 생생하게 만날 수 있는데, 무엇보다도 <어린 왕자>가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그 글이 콘수엘로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쓰인 이 문서의 묶음. “옛날 옛적에 한
씨네21 추천도서 - <생텍쥐페리와 콘수엘로, 사랑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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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 지음 / 창비 펴냄
“내가 살고 싶은 삶은 책기둥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생의 목격자 양천도서관이 일러준다. 너무 멀리 가지 말 것. 헛수고와 헛걸음으로 우연 앞에 나를 풀어둘 것.” 에세이, 인터뷰, 르포르타주 등 다양한 논픽션 글쓰기를 해온 은유 작가가 자신을 만들어온 책읽기 앞으로 돌아가 글을 적었다. 쓰는 사람이기 이전에 읽는 사람으로 살아온 시간을 지탱해온 책들부터, 오늘날의 개인과 사회를 두루 둘러볼 수 있는 책들까지 빼곡한 책 편지 묶음이다. 책에 기대 삶을 목격한 고통과 기쁨을 때로 소박하게 때로 격렬하게 풀어내는 일은 은유 작가의 매력일 텐데 이 책 역시 그렇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기혼 유자녀 여성으로서 내적 분투의 기록인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의 문제의식에 여전히 붙들려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상념을 첫글에서 만난다. 그 한복판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뒤 아버지가 홀로 지내시는 집의 풍경이 있다.
책뿐 아니라 영화도 중요한 순간들에 생각
씨네21 추천도서 - <해방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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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밤> - 은유 지음
<생텍쥐페리와 콘수엘로, 사랑의 편지> -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콘수엘로 드 생텍쥐페리 지음
<루친데> - 프리드리히 슐레겔 지음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2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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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는 매주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취향과 영감의 원천 5가지를 물어 소개하는 지면입니다. 이름하여 그들이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화이트 칼라>
지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자주 보는 드라마다. 각 캐릭터의 사정과 상황이 현실적이면서 희망적이고, 주인공이 생각하는 방식이 나랑 비슷한 부분이 있어 더 공감된다. 작품의 색깔이나 분위기도 편하게 볼 수 있어서 질리지 않는다.
<그 해 우리는>
카리나 편하게 볼 수 있던 드라마. 로맨스가 귀여웠다.
<최강야구>
윈터 요즘 가장 즐겨보는 예능 프로그램. 야구에 한창 빠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응원했던 선수들이 은퇴 후 다시 마운드에 올라 경기를 치르고 있다. 매회 한계를 뛰어넘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면서 감동받고 있다.
<노팅 힐>
닝닝 최애 영화! 최근에도 봤고, 볼 때마다 재밌고 낭만적이다.
<안나>
카리나 작품의 복선이 흥미롭고, 주인공
[LIST] 에스파가 말하는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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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사 크론 지음 / 문지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영화 <다이하드>에서 주인공 존 맥클레인은 깨진 유리 위를 맨발로 뛰고 기관총을 피하며 50층짜리 건물의 엘리베이터 통로로 뛰어든다. 이 모든 행동의 목표는 무엇인가? 영화 첫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별거 중인 아내 홀리를 되찾는 것이다. 존 맥클레인 앞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그녀가 존을 떠난 이유를 직면하게 하는 동시에 극복하게 한다”. 이야기의 핵심은 일어난 일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일이 주인공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느냐에 있다. 흔한, 혹은 뻔한 액션영화처럼 보이는 <다이하드>에도 매력적인 이야기만이 갖는 필살기가 숨어 있다. <멋진 인생>에도 <현기증>에도 마찬가지다. <다이하드>는 잘 만들어진 복선의 사례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성공한 ‘이야기’를 어떻게 만드는지를 다루는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는 12개의 챕터를 통해 어떻게 도입부를 쓰는
[리뷰]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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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봄, 부산의 한 세트장에서 촬영된 영화 <더 킹>. 제목 그대로 대한민국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검찰 세력의 협잡질, 카르텔화, 무속, 조폭 그리고 정치까지, 법을 권력으로 알고 그 위에서 국민을 내려다보려는 영화 속 검찰의 모습이 작금의 현실과 닮았다. 재개봉을 한다면 불황인 현재의 영화계에 1천만 관객을 안겨주지 않을까 내심 기대해본다
[ARCHIVE] 정치 검찰의 시대, 현실과 닮은 영화 ‘더 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