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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4일 CGV 전주고사 1관에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4K 리마스터링> 류승완 감독의 전주대담이 진행되었다. 전주국제영화제의 25주년과 한국영상자료원의 설립 50주년을 기념하는 ‘다시 보다: 25+50’ 특별전의 일환이다. 네 편의 단편영화로 구성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200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되었던 류승완 감독의 데뷔작으로, 전주의 초창기를 빛낸 네 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그의 초기작 특유의 거칠고 매력적인 필체를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다는 소식에 예매 경쟁은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 이날 진행을 맡은 김영진 영화평론가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디지털 리마스터 버전이 공개되었던 제17회 전주국제영화제 당시 프로그래머를 역임했다. 류승완 감독과도 막역한 사이인 그는 영화에 대한 심도 있는 감상과 감독과의 에피소드를 적절히 배합해 대화를 노련하게 이끌어갔다.
상영관을 가득 채운 관객들은 상영이 끝난 후
JEONJU IFF #3호 [스코프] 다시 보다: 25+50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4K 리마스터링’ 류승완 감독, 영화를 통해 만나는 다음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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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4일 저녁 7시 CGV 전주고사점 앞에서 행자 퍼포먼스 콘테스트 ‘영화의 거리에서 행자되기’가 열렸다. 본 행사는 세계 최초로 차이밍량 감독의 ‘행자 연작’ 10편 전편을 상영하는 특별전을 기념해 열렸다. 극 중 세계 여러 도시를 맨발로 천천히 걷던 붉은 승복 차림의 행자(이강생)처럼 참가자들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느리게 걸으면 차이밍량 감독과 이강생 배우가 그중 가장 아름다운 퍼포먼스를 선보인 사람을 우승자로 뽑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참가자는 사전 신청을 통해 받았으며 최종 22명으로 추려졌다. 콘테스트 직전 사전모임을 통해 한차례 몸을 풀고 온 참가자들이 현장에 도착하자 차이밍량 감독은 “연작 전편을 한 번에 선보이는 것도 이런 이벤트도 처음이라 신난다. 경쟁이라고 생각지 마시고, 어떻게 해야 행자처럼 보일까 고민도 하지 마시고 임해 주셨으면 좋겠다. 천천히 걸으면 모두가 행자다”라는 인사말로 용기를 내준 이들에게 따뜻한 격려를 보냈다. 그리고 이어서 44개의 발이 동시에 움직
JEONJU IFF #3호 [스코프] 행자 퍼포먼스 콘테스트 '영화의 거리에서 행자되기‘ “우리 모두 자기만의 방법으로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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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천을 두른 맨발의 승려가 아주 천천히 프레임을 가로지른다. 카메라는 아무런 미동 없이 수행하는 육체를 담아낸다. 차이밍량 감독이 오로지 느린 걸음만으로 이뤄진 영화, 행자 연작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영겁의 시간을 체화한 그의 페르소나 이강생 덕분이었다. 단호하고 확신에 찬 걸음으로 인터뷰장에 들어온 차이밍량 감독 뒤로 느긋하게 이강생 배우가 들어왔다. 30년을 함께 해온 두 사람은 서로의 속도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처음으로 행자 연작의 모든 작품을 상영하게 됐다. 감회가 새로울 것 같다.
차이밍량 꿈이 실현된 기분이다. 행자 프로젝트를 작업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열 편을 완성하면 꼭 모든 작품을 한 곳에서 상영하기를 원했다. 행자는 느린 걸음으로 이어진 단순한 작품이다. 똑같은 내용처럼 보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한다면 저마다 다른 깨달음을 얻는 수행의 시간이 될 것이다.
이강생 지금까지 행자 연작은 주로 미술관에서 상영됐다. 물론 새
JEONJU IFF #3호 [인터뷰] 차이밍량 감독 X 이강생 배우 대담 “천천히 흘러가는 느린 걸음의 의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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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 그림 배우러 다니는 남자(하성국)는 여름 한낮의 종로 한복판에서 아는 여자(이명하)와 우연히 만나 잠시 길을 걷는다. 2막. 몇 년 뒤 여자는 폐관을 앞둔 서울극장을 찾고 극장 관계자인 남자(박봉준)와 함께 그림 배우던 남자와 거닐었던 그 길을 다시 걷는다. 3막. 어느새 화가가 된 남자(하성국)는 지인의 장례식에서 아는 여자와 재회하고 둘은 서울의 밤거리를 배회하다 익히 아는 카페를 찾는다. 두 남녀가 몇 년에 걸쳐 같은 공간을 거닐다 헤어지는 조각들을 담은 <미망>은 심심하게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안엔 많은 차이들이 숨겨져 있다. 날씨, 건물, 의상, 대화 등의 미세한 차이는 일상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무의미한 시간이 아닌 매일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는 생동의 시간임을 증명한다. 그리고 그 차이들은 개개인의 기억에 침투해 “나의 연인과 친구, 내 삶을 떠올리게 하는(김태양 감독)” 촉매제가 된다. 첫 장편 데뷔작 <미망>이 한국경쟁에 올
JEONJU IFF #3호 [인터뷰] '미망' 김태양 감독, “우리는 매일 같은 것 같아도 조금씩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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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둘, 셋 러브>의 세계 속에서 사랑은 힘이 세다. 수정(류현경)이 여행하는 생경한 장소들에는 미미한 권력에 취한 채 욕망을 채우려는 사람들이 가득하지만, 수정과 수자(한양희)가 공유하는 단순한 사랑에의 믿음은 그들을 감화하기에 충분하다. 김오키 감독의 삶 속에서도 사랑의 영향력은 마찬가지다. 영화에 품은 오랜 연심은 결국 그를 영화제작의 길로 이끌었고, 그가 차린 촬영 현장은 동료들을 향한 깊은 애정을 발산하는 즐거움의 공간이 되었다. 코리안시네마 섹션에 초청된 알록달록한 장편 데뷔작 <하나, 둘, 셋 러브>의 감독이자 ‘전주씨네투어x음악’의 무대를 수놓을 뮤지션으로 전주를 찾은 멀티 아티스트 김오키에게 그의 창작을 이끄는 긍정적인 가치들에 관해 물었다.
- 처음 영화 제작에 도전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 영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 자체는 어릴 적부터 있었다. 댄서로 활동하던 시절에는 16mm 캠코더로 다양한 촬영에 도전하기도 했고. 하지만
JEONJU IFF #3호 [인터뷰] '하나, 둘, 셋 러브' 감독 김오키, “모두가 즐겁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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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과 관객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전주톡톡은 영화인들의 현장 경험, 흥미로운 비하인드 스토리, 작품과 현시 사이를 잇는 메시지 등을 가볍고 유쾌하게 들어볼 수 있는 토크 프로그램이다. 5월 3일 금요일, 청명한 날씨가 이어지는 가운데 문화광장 부근의 소담한 카페에서 <목화솜 피는 날>의 감독과 배우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작품을 지휘한 신경수 감독을 필두로 박원상, 우미화, 조희봉, 최덕문 배우가 관객들을 만났고 이들의 이야기를 경청할 준비를 마쳤다는 듯 적극적으로 질문을 꺼내는 공승연 배우가 진행을 맡았다.
'코리안시네마: 세월호 참사 10주기 특별전'에 소개된 <목화솜 피는 날>은 10년 전 참혹한 사고로 둘째 딸을 잃은 부부 병호(박원상)와 수현(우미화)의 이야기를 다룬다. 10년 동안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을 외쳐온 병호는 다른 유가족들과 갈등에 충격을 받아 기억을 잃고 만다. 서서히 희미해지는 과거에도 그에게는 마음 한 편에 영원히 잊지 않는
JEONJU IFF #2호 [스코프] ‘목화솜 피는 날’ 전주톡톡 “슬픔과 애도를 전유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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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바쁘고 지쳐있는 대학병원 간호사 유정(박예영)은 좀처럼 얼굴 보기 힘든 고3 동생 기정(이하은)의 소식을 전화 너머 경찰에게 듣는다. 기정이 교내에서 벌어진 영아 유기 사건의 당사자라고 자수해서 구속됐다는 것. 엄마가 기정을 낳다가 돌아가셨기에 일찍부터 자기를 엄마 대신이라고 여겼던 유정은 동생을 구하고자 애쓰지만 쉽지 않다. 친한 친구도 모르고 똑똑하고 알아서 잘하는 애라고밖에 동생을 설명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기정에 대해 무지했다는 걸 그제야 깨닫는다. <언니 유정>은 가까운 사이라고 해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간과하고 있는 건 아닌지 예리하게 묻는다. 서툴지만 분명하게 한 사람을 진심으로 알아가려는 작업에 돌입한 사람을 따뜻한 시선으로 따라가며 그의 분투하는 시간을 먹먹하게 담아낸다. 정해일 감독에게 첫 장편작 <언니 유정>은 유정에게 기정이 그렇듯 애틋한 존재다. 영화를 놓아줄 때가 되어서야 그는 5년가량 한 작품을 붙들고 있는 동안 많은 용기를 얻었
JEONJU IFF #2호 [인터뷰] '언니 유정' 정해일 감독, “누구도 상처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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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청약에 당첨된 정서(나애진)는 차용증을 들고 아버지 영주(안석환)를 찾아 묵호항으로 향한다. 떼인 돈을 받으러 온 고향에서 정서는 내내 복잡한 마음이 든다. 돈독 오른 아버지에 지쳐 하루 빨리 이 곳을 떠나고 싶지만, 자신을 닮은 이복동생 정해(김진영)가 내내 마음에 걸린다. 정서는 돈으로 얽힌 낯선 가족의 모습에서 자신이 작업한 웹툰 속 뱀파이어의 모습을 떠올린다. 바닷바람이 차게 불던 묵호항에서 이야기를 건져 올렸다는 장만민 감독과 <은빛살구> 속 복잡하게 얽힌 가족이란 관계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 첫 장편 <은빛 살구>는 어디서 시작하게 되었는가.
= 뿌리를 잃었던 시기가 있었다. 최대한 멀리 떠나고 싶은 맘에 고향 순천에서 가장 떨어진 도시를 찾아 동해시로 홀로 향했다. 무뚝뚝해도 정이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고요한 곳이다. 그런 점에서 순천과 동해시가 참 닮아 있었다. 외지에서도 고향을 발견한 셈이다. 그렇게 4월의 묵호항에서 주인공 김
JEONJU IFF #2호 [인터뷰] ‘은빛살구’ 감독 장만민, “뱀파이어의 형상에서 낯선 가족을 발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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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고국에 돌아온 응우옌(민 쩌우)에게 현대의 하노이는 어색하다. 결혼을 준비하는 조카 반(하 푸엉)의 단순한 삶의 태도는 더욱 이해할 수 없다. 반이 백화점과 지하철을 오가며 오늘을 살아가는 사이 응우옌은 추억이 담긴 장소들을 방문하며 먼 과거를 더듬는다. 영화는 어떠한 사념도 없이 응우옌의 순례에 차분히 동행한다. 옛 노래의 빛바랜 음색을 통해, 흑백의 거친 촉감을 통해, 쿨리의 신비로운 눈을 통해 그녀의 깊은 회한을 감각한다. 팜응옥란 감독은 개인의 기억과 베트남의 현대사를 우아하게 엮어낸 장편 데뷔작 <쿨리는 울지 않는다>를 들고 전주국제영화제 국제경쟁 부문에 초청됐다. 진중한 눈빛으로 시간과 공간을 바라보는 팜응옥란 감독의 이야기를 전한다.
- 공간, 인물, 사건 등에서 이전에 제작한 단편들과 느슨히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 처음 영화를 만들어야겠다 마음먹은 때가 2016년이다. 그때부터 <쿨리는 울지 않는다>의 제작을 준비하
JEONJU IFF #2호 [인터뷰] '쿨리는 울지 않는다' 감독 팜응옥란, “시간의 절대적 방향성을 존중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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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면에서 몇 차례 언급했듯 ‘매끄러움’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상징적 현상이다. 유튜브와 넷플릭스는 전세계 시민들을 동일한 인터페이스로 끌어들인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수십억 인구의 손가락이 비슷비슷하게 움직인다. 전세계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글로벌 기업의 설계는 매끈한 사용자 경험을 향해 최적화한다. 손가락 밑 터치스크린 기기들의 모양새는 비슷해지다 못해 제조사를 구분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피처폰은 물론 스마트폰 초기 시절만 해도 제각각이던 휴대전화기 디자인은 매끄러움의 극단으로 수렴하고 있다. 세계 어느 도시에 가든 글로벌 직영 커피숍과 프랜차이즈 매장이 늘고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가게 분위기나 음식 맛을 탐색할 필요는 없다. 거침없이 입장해 스스럼없이 주문하면 예상된 서비스가 제공된다. 매끈해져가는 이용자 패턴 앞에서 국경도, 문화도, 개인의 특성도 경계를 지운다. 매끈함은 시각·촉각적인 것에만 국한되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느끼는 아름다움, 환경이 강제하
[비평] 매끈한 것들, ‘<범죄도시> 현상’에 대한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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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강정>에 이어 <삼체>를 봤다. SF계의 노벨상이라는 휴고상을 아시아인 최초로 수상한 류츠신의 소설 <삼체>를 각색한 드라마다. 언뜻 지구의 과학 발전을 중단시키려는 외계인이 등장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공교롭게도 드라마가 공개된 올해 3월은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 대폭 삭감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연구 현장의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공감하며 봤다는 과학자 지인들이 많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과학 연구를 하지 못하게 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체인. <삼체>에서 지구로 오는 중인 외계인들을 부르는 이름이다. ‘오는 중’이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설정이 흥미롭다. 삼체인이 원래 살던 행성은 태양이 세개인 삼중 항성계에 있어 궤도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극심한 더위와 추위에 시달리던 끝에 태양이 한개뿐이라 기후가 안정적인 지구에 이주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다행히
[임소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400년 후의 인류 생존 대 닭강정이 된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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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생일이 1월이나 2월이란 걸 알게 되면 왠지 반갑다. ‘빠른’이라 불리는 그들은 나이를 밝힐 때가 되면 자신 없는 목소리로 출생연도를 말하고 단호한 표정으로 재빨리 ‘학교 나이’를 덧붙이는데, 나는 그때 드러나는 그들의 한국적인 자존심과 뻔뻔한 태도가 너무 좋아서 속으로 키득거린다. 열두달 중 가장 이른 때에 태어났지만, 세는 나이 일곱에 학교에 입학하면서 원치 않게 무리의 막내가 되어버린 태양의 아이들! 또래 그룹이 숫자와 서열을 터득한 시점부터 그들은 늘 자신의 출생을 해명하고 그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며 ‘족보 브레이커’로 지목되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개미 같은 아이들! 나이에 대한 그들의 완강한 태도는 사는 동안 수없이 시달리며 형성된 애처로운 결과물이다! 언젠가 그들이 ‘빠른’의 원념을 한데 모아 이 미친 서열과 족보 문화를 파괴하는 히어로가 되어준다면….
아니, ‘빠른’은 이미 히어로일지도 모른다. 한살이 많아도 같이 학교를 다녔으니 친구, 한살이 어려
[복길의 슬픔의 케이팝 파티] <혼자만의 사랑>(김건모,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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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매체와 포맷이 범람하는 시대에 과연 우리는 이미지를 감각하고 있는가. ‘박홍열의 촬영 미학: 물질로 영화 읽기’는 서사에 가려 보이지 않는 영화 속 물질들로 영화 읽기를 시도한다. 빛, 색, 질감, 렌즈 등 촬영 도구들로 영화를 감각하며, 이미지를 감각하기 위해선 응시와 관조의 시간이 필요하다. 서사와 담론을 벗어난 이미지들 사이에서 영화 속 무수한 물질들이 만들어가는 또 다른 의미들의 세계를 만나본다.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에는 롱테이크가 많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롱테이크는 기존 영화와 다른 위치에 있다. 이 영화의 많은 롱테이크 화면은 이미지를 수축된 습관으로 만들고 그 습관들을 배반하기 위한 기제로서 작용한다. 카메라의 지각으로서만 포착할 수 있는 이미지들을 롱테이크로 보여주고, 한컷 안에 낯섦과 익숙해지는 낯섦을 다시 낯설게 하기 위해 렌즈의 광학적 성질을 활용한다. 컷과 컷을 광각렌즈와 망원렌즈의 물리적 성질과 컷의 길이로 충돌시킨다. 대상을
[박홍열의 촬영 미학: 물질로 영화 읽기] 카메라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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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무언가를 유심히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시각으로부터 시작된 자극이 오감으로 퍼져가는 시간이 소중했다. 워낙 소심했던 터라, 언변이 좋지도 않았을뿐더러, 사람들 앞에서 내 생각과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말’이라는 것을 무서워했다. 쉽게 퍼져나가는 음성 속에 숨겨져 있는 날카로운 무게들이 나에겐 예민하게 다가왔다. 글쓰기는 아주 큰 위로가 되었다. 누군가에게, 혹은 스스로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생각과 느낌들을 물방울 튀기듯 툭 덜어낼 수 있는 매개체가 되었다. 투박하게 늘어놓은 단어들은 문장이 되었고, 이어진 문장들은 나의 자취로 남아 있었다. 그게 참 좋았다. 어떠한 대상을 관찰하며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종이에 적어내는 것이 어느샌가 작은 습관이 되어 있었다. 종종, 내가 글을 즐겨 쓰는 것을 아는 지인들은 어떤 식으로든 글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었다.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거니와, 일기 수준인 나의 글을 누군가에게 보여준다
[김민하의 타인의 우주] 일기장을 훔쳐보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