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세기 초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깊은 산맥 지대인 카르파티아 지방의 도뷔시 형제는 봉건 영주들의 압제 속에 살아가는 농노 사회의 일원이다. 동생 이반(올렉시이 그나트코우스키이)은 도적이 되어 손아귀에 든 귀족들을 약탈하며 살아가는 한편, 형 올렉사(풀 울란스키)는 군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농민 반란을 체계적으로 조직하기 시작한다. 영화 <도뷔시>는 ‘오프리쉬코’(Opryshky)라 불리는 우크라이나의 반봉건 농민운동 게릴라를 블록버스터 규모로 그린 대작이다. 우크라이나영화 사상 가장 비싼 영화로 기록된 <도뷔시>는 민족의 전통음악, 의상, 풍습을 정확하고 풍부하게 담아내며 박물관적 고증을 이루어낸다. 올레스 사닌 감독은 영화의 시간을 300년 전으로 돌려 민족과 계급을 관통하는 자긍심의 뿌리를 찾는다. 역사와 전설, 그리고 신화가 접하는 지점에서 탄생한 민족 영웅 서사답게 장르의 혼종을 꾀하는 판타지 사극의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리뷰] ‘도뷔시’, 우리 민족은 양이다. 그럼에도 살아남았다
-
갓 수능을 치른 고교생 장완선(굴초소)은 달 착륙 계획 콘서트에 갈 생각이다. 하늘에 띄울 거대한 인공 달 아래에서 그간 좋아해온 여학생 린베이싱(장가녕)에게 고백하고 싶어서다. 함께 자원봉사를 하며 가까워진 두 사람은 대입과 재수의 갈림길에서도 우정을 이어나간다. 기다려온 콘서트 당일, 화려한 이벤트 장소는 대형 참사의 현장으로 잿빛이 되고 이를 목격한 장완선은 사망자 명단에 있을지 모를 린베이싱을 찾아 헤맨다. <별처럼 빛나는 너에게 더무비-일섬일섬량성성>은 중국 OTT 플랫폼 아이치이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동명의 24부작 드라마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되돌리기 위한 타임 슬립이라는 설정이 드라마에 이어 영화에도 적용됐다. 첫눈에 시작되는 짝사랑, 설명할 수 없는 우연들로 추동되는 스킨십 등 청춘 로맨스의 요소요소가 보는 사람의 얼굴에 미소를 드리우기 충분하게 구성됐다.
[리뷰] ‘별처럼 빛나는 너에게 더무비-일섬일섬량성성’, 죽지 마, 같이 우주에 가자
-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독일. 유대인 출신 가수 지망생 스텔라(파울라 베어)는 재즈 가수로 성공해 미국에 진출하기를 꿈꾼다. 그러나 갈수록 심해지는 나치의 탄압에 스텔라의 가족은 아우슈비츠로 끌려가지 않도록 은신을 택한다. 답답함에 거리로 나선 스텔라는 우연히 위조 신분증을 만드는 롤프(야니스 니뵈너)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를 돕기 시작한다. <스텔라>는 나치에 협력해 비밀경찰로 일하며 수백명의 유대인 동포를 사지로 내몬 실존 인물 스텔라 골드슐락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는 시대의 피해자이자 참극의 부역자가 된 여인을 이해하려다 윤리의 역설에 빠지고 만다. 방황하는 영화를 구한 것은 파울라 베어의 입체적인 연기다. 화려한 반주로 영화를 맞이한 그녀의 노래는 곧장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피닉스> 속 니나 호스의 노래를 떠올리게 한다. 파울라 베어는 지옥도를 피한 배신자를 노래하며 독일의 역사를 온몸으로 연기하는 경지에 오른다.
[리뷰] ‘스텔라’, 니나 호스의 대척점에서 지옥도를 노래한 파울라 베어
-
동주(기진우)는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병행하며 8년째 공무원시험을 준비 중이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변변찮은 직업도 없는 그는 늘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긴다. 그래도 인간관계 하나는 나쁘지 않았던 걸까. 주변에는 언제나 그를 진심으로 돕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식 채용 제의마저 거절한 동주는 인생을 되돌아보기 위해 도피에 가까운 여행을 떠난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에서 각자의 삶을 살던 친구들이 세월을 거스르는 그를 반긴다. 거듭되는 만남 속에서 우연과 인연이 여러 번 교차하지만 어쩐지 동주는 세계 속을 부유하는 듯 보인다. <늦더위>는 <종착역>에서 10대 소녀들의 여정을 그린 서한솔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이다. 배우들이 현장에서 완성했다는 대사가 작위적이지 않아 ‘살아 있는’ 느낌을 준다. 극적인 사건을 의도적으로 덜어낸 이야기는 잔잔하게 흐르는 시냇물을 닮아 있다.
[리뷰] ‘늦더위’, 한점의 거슬림도 없이, 잔잔하게
-
-
10년 전 딸을 앞세운 병호(박원상)는 자그마한 배를 타고 바다로 나선다. 그날의 기억을 지울 수도 떠올릴 수도 없는 그는 기억상실과 이명이라는 두 증상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오랜 친구와 자신을 도와주는 이웃들은 물론 평생을 함께한 아내의 이름조차 사고의 잔해 속에 파묻혀 있다. 하지만 괴로움에 빠진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유가족 단체의 부회장을 맡았던 병호는 수사가 진전을 보이지 않자 애꿎은 경찰에게 화풀이하며 주먹을 휘두른다. 병호의 우발적인 행동이 혹여나 언론의 먹잇감이 될까 두려웠던 유가족들은 그를 부회장직에서 내쫓고자 한다. <목화솜 피는 날>은 어느덧 10주기를 맞이한 세월호 참사와 유가족들이 감내해야 하는 외상을 고스란히 담은 작품이다. 빛 번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선체 내부를 환상적으로 그린 장면은 같은 소재를 다룬 조현철 감독의 <너와 나>를 연상시킨다.
[리뷰] ‘목화솜 피는 날’, 기억과 상실 모두가 고통이다
-
지독한 워커홀릭인 게임 회사 대표 지미(허광한)는 모종의 이유로 해임된 뒤에야 주변을 둘러본다. 얼마 뒤 지미는 고등학생 시절 노래방에서 잠시 함께 아르바이트했던 아미(기요하라 가야)의 그림엽서를 발견한 뒤 충동적으로 그녀의 고향을 찾는 여정에 나선다. <신문기자>를 연출한 후지이 미치히토의 신작 <청춘 18X2 너에게로 이어지는 길>은 새로움을 강점으로 내세우는 작품은 아니다. 익히 아는 첫사랑 영화, 청춘영화, 여행영화와 궤를 같이하는데, 기본에 충실하면서 이런 장르에서 기대하는 감동을 충분히 전달한다. 그렇게 영화는 첫사랑의 신비와 아픔을 경쾌하게 묘사하고 젊은 주인공이 시련 끝에 한뼘 더 성장하는 과정을 제대로 밟아나간다. “여행은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즐겁다”는 주제에 걸맞은 에피소드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의미를 강화하고 아름다운 자연 풍경도 가득 선사한다.
[리뷰] ‘청춘 18X2 너에게로 이어지는 길’, 기본에 충실한 청춘영화, 첫사랑영화, 여행영화
-
전력망 붕괴, 폭염과 팬데믹, 화폐 가치의 하락….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인류를 위협하는 대혼란은 시대를 막론하고 반복된다는 스크린 밖 진리를 강조하며 영화 속으로 뛰어든다. 모든 자원이 품귀한 파멸의 시대, 영화의 작중 배경은 문명 붕괴 후 45년으로부터 출발한다. 대지의 풍요가 가득한 녹색의 땅에 살던 소녀 퓨리오사(애니아 테일러조이/알릴라 브라운)는 바이커 군단에 납치된다. 퓨리오사의 어머니 메리 조 바사(찰리 프레이저)는 맹렬한 집념으로 바이커 군단을 추격하지만 끝내 딸의 눈앞에서 디멘투스(크리스 헴스워스)에게 끔찍한 최후를 맞는다. 그날 이후 퓨리오사는 디멘투스에게 ‘리틀 디멘투스’라 불리며 그와 바이커 군단이 벌이는 흉포한 약탈과 폭력에 내내 노출된다. 바이커 군단은 가스타운을 정복하기 위해 임모탄 조(러치 험)가 압제하는 시타델에 쳐들어가고, 민족간 혈맹을 이유로 퓨리오사를 임모탄 조의 신부로 넘긴다. 퓨리오사는 임모탄 조의 신부들이 처한 유린을 목도
[리뷰]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도파민의 시대에 생의 의욕을 집요하게 고양하는 아드레날린 시네마
-
강남 대치동의 국어과 학원강사 서혜진(정려원)은 학부모들이 줄을 서는 등급 올리기의 귀재다. 그가 전설을 쓰기 시작한 건 14년 전, 꼴찌가 특기인 고등학생 준호(위하준)를 공부시켜 명문대에 보내면서다. 졸업 뒤 대기업까지 입사해 영원한 자랑으로 남을 줄 알았던 제자는 어느 날 혜진의 학원에서 하는 신입 강사 채용에 응시할 거라면서 혜진을 기겁하게 한다. 얼마 뒤 둘의 관계는 사제에서 동료로, 그리고 더욱 밀착된 사이로 변해간다. <밀회>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봄밤> 등 세밀한 디테일을 그러모아 만든 유려한 이미지 속에서 한국 사회의 곪은 문제들을 날카롭게 찌르고 우아하게 터뜨렸던 안판석 감독이 5년 만에 신작을 냈다. 세속적 욕망이 들끓는 대치동의 학원강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tvN 드라마 <졸업>은 20년간 홍보 업계에 있다가 창작의 세계에 입문한 박경화 작가의 첫 장편 드라마이기도 하다. <졸업>이 2화까지 공개된
[피플] 이 시대에 우리는 드라마로 말하려 한다, <졸업> 안판석 감독, 박경화 작가
-
안미옥 지음 / 창비 펴냄
시인 안미옥의 첫 번째 산문집. 아들 ‘나무’가 태어나 5살이 될 때까지의 시간을 안미옥의 시간과 나란히 두고 기록한 글인데, 성장하는 아이와 함께 익숙한 언어를 낯설게 배우고, 언제까지고 낯설 세상을 즐겁게 익히는 기록이기도 하다. “재미있고 신기한 것은 알수록 재미있고, 두렵고 무서운 것은 알수록 이해가 되어 무섭지 않게 된다. 요즘 나도 내게서 신기하고 무서운 것을 계속해서 발견해나가는 중이다. 나무와 함께하면서, 잊었던 어린 나의 세계를 한번 더 살아보는 것 같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일들은 마음에 오래 남는다고 했던 <여름잠>을 떠올리게 하는 문장 사이로, 우는 사람에겐 어느 것이 자신의 것인지 모르게 더 큰 눈물을 선물하고 싶다고 했던 <여름 끝물>을 연상시키는 시어 사이로, 삶의 여름을 향해 쑥쑥 커가는 아이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풍경은 삶이 되어 구체성을 띤다. 안미옥은 구름을 보며, 비가 올 것처럼 흐리다가
씨네21 추천도서 - <조금 더 사랑하는 쪽으로>
-
이병률 지음 / 문학과지성사 펴냄
이병률의 새 시집이 나왔다. 더이상 설명이 필요 없겠지만…. 이번 시집은 ‘두 사람’으로 시작한다. 문을 여는 시 <어떤 그림>은 미술관의 두 사람이 이 방과 저 방을 지키는 일을 한다는 문장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두 사람은 각자 담당하는 공간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나란히 공간을 옮겨 다녔다// 그림이 그 두 사람을 졸졸 따라다녔다.” 그리고 다음 시(<공원 닫는 시간>)에서 (아마도 같은, 아마도 다른) 이 두 사람은 같은 길을 가는 중이다. “각자 태어난 두 나무가 서로 몸을 끌어 가까워져/ 담을 만들고 물을 흐르게 하고/ 서로에게서 솟아난 영감은 서로 엉키고/ 누구도 그들의 엉킴을 풀지 못하는 것/ 그것이 인생의 전모라지만.”
사랑의 말을 듣고 싶을 때 이병률을 찾는 이들을, 이번 시집은 실망시키지 않는다. 코로나19의 풍경을 말할 때도 그렇다. 중국에서 봉쇄당한 경험, 한국에서
씨네21 추천도서 -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
-
김유태 지음 / 글항아리 펴냄
책이 인생을 바꿀 수 있을까?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꿀 수 있다고 증언하는 책이 나왔다. 김유태의 <나쁜 책>은 이른바 ‘금서’로 취급되어 출간이 금지되거나 작가가 고발당하거나 심지어 작가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진 책들을 다룬다. 금서는 왜 금지당하는가? 사회의, 나아가 국가의 치부를 들춰내고 고발하기 때문이다. 그 거침없는 당당함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지식을, 깨달음을, 해방을 준다. 이 책들은 작가의 수난 시대로 이어지는가 하면 베스트셀러의 영예를 안기기도 한다. 이 책 자체가 매력적인 작품들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이다. 저자 김유태는 각 책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책에 얽힌 우여곡절을 상세히 전한다. 하나같이 읽고 싶게 만들면서.
박찬욱 감독이 시리즈로 만든 <동조자>는 베트남전쟁을 소재로 하는 이야기임에도 베트남에서 금서다. 공산당 모독이 반복해서 서술되는 데다 베트남의 국부로 통하는 호찌민을 직접 비판한
씨네21 추천도서 - <나쁜 책>
-
미쓰다 신조 지음 / 민경욱 옮김 / 비채 펴냄
호러와 미스터리를 결합한 독특한 분위기의 소설. <검은 얼굴의 여우> <하얀 마물의 탑>에서 이어지는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다. 전후 일본 사회를 충실히 담아내는 역사물로서의 매력과 초현실적인 공포를 느끼게 하는 사건의 연쇄, 그리고 이성으로 차근차근 짚어가는 사건풀이가 두루 재미를 준다. 시간순으로는 <검은 얼굴의 여우> 이후의 사건이며, <붉은 옷의 어둠> 이후에 <하얀 마물의 탑>의 시간으로 진입한다.
시리즈에서 명탐정 역할을 하는 인물은 모토로이 하야타. 탄광에서 검은 얼굴의 여우로 불리는 괴기와 밀실 살인을 해결한 그는 만주 건국대학에서 만난 동창 구마가이 신이치에게서l 연락을 받는다. 도쿄에 와서 이상한 사건을 해결해주었으면 하는 요청이다. ‘붉은 미로’라 불리는 비좁은 미로 같은 암시장에서 여성들을 뒤쫓는 ‘붉은 옷’이라 정체불명의 괴인에 대한
씨네21 추천도서 - <붉은 옷의 어둠 >
-
붉은 옷의 어둠 - 미쓰다 신조 지음
나쁜 책 - 김유태 지음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 이병률 지음
조금 더 사랑하는 쪽으로 - 안미옥 지음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5월의 책
-
원작 연재 초반부터 오랜 인연을 암시한 네코마 고등학교는 카라스노 고등학교 배구부가 거쳐가야 할 숙명의 라이벌이 되어 봄철 대회에서 재회한다. 이전 연습 게임에서 패배한 카라스노는 그사이 더 발전한 팀워크로 공을 향해 질주한다. “힘들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오직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일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소년들의 세계는 현재에 전력을 다하는 것으로 충분한 가치를 얻는다. 2012년부터 2020년 겨울까지 8년 반 동안 <하이큐!!>를 연재한 집영사의 <주간 소년 점프> 편집자를 서면으로 만났다. <극장판 하이큐!! 쓰레기장의 결전>이 지닌 희망을 들여다보기 위해 1대 편집자 혼다 히로유키, 2대 편집자 이케다 료타, 3대 편집자 아즈마 리키에게 질문을 건넸다. 무언가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결국 성장한다. 간단하지만 그 어떤 명제보다 중요한 논리를 증명하기 위해 오랜 시간 분투한 이들의 다정한 시선을 전한다.
- 8년간의 원작 만
[피플] 소년만화적 승리와 패배의 미학, <하이큐!!> 편집자 혼다 히로유키, 이케다 료타, 아즈마 리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