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을 가리는 성격 탓에 타인에게 먼저 다가가는 일이 없었던 임재춘씨는 다니던 공장에서 정리해고된 이후 성격이 바뀌기 시작한다. 사람들과 어울리게 된 것이다. 한 회사에서 30년 동안 기타를 만드는 기능공으로 일했던 그는 이제 무대에 서는 배우가 된다. 레이스 원피스를 입고 오필리아로 분한 그의 모습에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나온다. 늦은 밤까지 대사를 암기하고 동선을 숙지하는 재춘씨는 어째서 실직한 마당에 이런 생활에 뛰어들게 된 것일까.
<깔깔깔 희망버스> <나쁜 나라> <시 읽는 시간> 등 독립다큐멘터리를 연출해온 이수정 감독의 신작 <재춘언니>는 동료들과 밴드를 결성해 음악을 연주하고 매일 생활 수기를 쓰는 재춘씨의 예술적이자 정치적인 일상에 동참한 다큐멘터리다. 그는 가장 노릇을 하지 못해 두딸에게 미안한 마음을 거두지 못하면서도, 딸들이 말리는 시위 현장으로 벌써 8년 넘게 발걸음을 옮긴다. 이미 만성이 된 실직 상태에 체념의 정조가 짙게 드리워져 있지만, 그럼에도 그는 미소가 피어나는 순간들을 꿋꿋이 포착한다. <재춘언니>는 사회적 약자의 투쟁을 다룬 다큐멘터리지만 마냥 딱딱하거나 무겁지 않으며, 오히려 재춘씨의 소탈한 웃음만큼이나 긍정적이다. 영화는 임재춘씨와 동료들의 생활을 좇으면서 시위가 예술적 수행이 된 과정에 집중하는 한편, 박영호 콜트콜텍 사장과의 면담과 단식 농성 현장을 따라가며 이들의 간절한 복직 의지도 부단히 기록한다. 무엇보다 인물들이 자신의 경험을 곧장 피해의 서사로 번역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느 것을 선택해도 겁박인 현실의 난제를 받아들이는 숭고한 태도에 관한 이야기로 확장된다. 우정에 관한 이야기로도 그 미덕을 고이 간직하며, 결말에 이르러 예상치 못했던 묵직한 여운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