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데타는 성녀일까 사기꾼일까. 영화의 마지막, 페샤에서 도망친 베네데타가 다시 페샤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그녀를 의심했던 나의 과오를 깨달았다.
여자는 어딘가로 가고 있다. 무언가에 탄 상태로 미지의 세계로 진입한다. 폴 버호벤 감독의 두편의 영화 <베네데타>와 <쇼걸>은 비슷하게 출발한다. 또한 영화의 전반적인 부분이 서로 닮아 있다. 두 주인공은 욕망을 추진체 삼아 앞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간다. 뒤를 돌아보는 플래시백도 없다. 그렇게 영화가 끝에 다다르면 두 주인공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 <쇼걸>의 노미(엘리자베스 버클리)는 라스베이거스의 쇼 비즈니스 중심에서 스스로 나와 또 다른 미지의 세계를 향해 히치하이킹을 한다. <베네데타>의 베네데타(비르지니 에피라)는 자신이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도망쳐온 페샤로 발걸음을 다시 옮긴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다음과 같다. 베네데타는 왜 자신에게 지옥이 된 그곳으로 스스로 걸어간 것일까?
환영과 실제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하나의 규칙에 의거하여 영화를 바라보고자 한다. 그 규칙은 <데블스 에드버킷>에서 존 밀튼(알 파치노)이 케빈(키아누 리브스)에게 하는 대사에 있다. 존은 신이 지켜보는 것을 좋아하는 장난꾸러기며 인간에게 본능을 준 동시에 정반대되는 규칙을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눈으로 보되 만지진 마라. 손으로 만지되 맛보진 마라. 입으로 맛보되 삼키진 마라.” 이 규칙에서 중요한 감각을 꼽아보자면 시각과 촉각이다. <베네데타>도 이 규칙에 따라 극을 진행하며 두 가지 감각을 활용하여 영화를 구성한다. 영화는 크게 보면 ‘접속’에서 ‘접촉’으로 이행한다. 이를 알아보기 위한 출발점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성당에서 연극을 선보일 때, 베네데타는 예수의 환영을 본다. 예수의 역할을 한 수녀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이라는 종교적 색채를 띤 매개체를 보고 그녀는 현실 너머의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로 접속한다. 영화의 관객은 양 떼를 몰고 오는 예수와 그에게 달려가는 베네데타를 본다. 하지만 영화 속 연극 무대의 관객은 그녀의 움직이는 다리만 본다. 마치 VR(가상현실) 체험을 하는 사람을 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베네데타의 움직이는 다리를 보고 동료 수녀는 움직이지 말라며 터치한다. 그 순간 환영은 중단되고 베네데타는 현실로 돌아온다. 종교인들에게 너머의 세계는 진실에 해당하기 때문에, 더군다나 영화의 배경인 17세기엔 더욱이 그러했을 것이다. 환영을 VR로, 현실과 분리된 것으로서 비유하는 것이 신성모독에 해당할 수도 있겠지만 <로보캅>과 <토탈 리콜>을 연출했던 감독의 필모그래피 덕분에 가능한 영화적 상상이라 말하고 싶다. 또한 가상현실이 실제와 뒤섞이는 작금의 현실 속에서 이는 자연스러운 발상이기도 하다.
베네데타만 볼 수 있던 환영의 이미지는 비슷한 모습으로 그녀의 실제 삶에 물리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환영과 실제가 뒤섞이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벌어지는 장소는 베네데타의 몸이다. 수녀원 문을 박차고 바르톨로메아(다프네 파타키아)가 양 떼를 몰고 들어온다. 이는 베네데타의 환영 속 예수의 이미지와 겹친다. 바르톨로메아는 수녀원에 입소하면서부터 베네데타와의 신체적 접촉을 시도한다. 커튼을 사이에 두고 이뤄진 둘의 접촉은 이후에 장막이 걷히고 섹스로까지 이어진다. 바르톨로메아의 접촉은 베네데타를 예수의 세계로 접속하게 만들었다. 또한 그 안에서 예수와의 신체적 접촉까지 가능케 했다. 영화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베네데타의 환영에서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있다. 그의 부름에 베네데타는 그의 몸 위로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포갠다. 그 순간 그녀의 손바닥에 피가 흐르며 몸에 성흔이 각인된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성흔은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베네데타를 성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물리적 증거이다. 하지만 원장 수녀(샬럿 램플링)는 성흔을 보고도 베네데타의 주장을 신뢰하지 않는다. 이 지점까지 영화의 관객만이 그녀를 신뢰할 수 있다. 이유는 베네데타와 환영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에 환영의 이미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때부터 관객은 베네데타와 환영을 공유하며 쌓아올린 믿음에 금을 내기 시작한다.
수녀원장은 신부와 함께 베네데타의 성흔을 검사하면서 예수가 쓴 가시면류관의 흔적이 그녀의 이마에서 발견되지 않았다고 그녀를 의심한다. 이후에 베네데타는 바르톨로메아의 부축을 받고 밖으로 나온다. 잠시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겠다며 베네데타는 바르톨로메아를 먼저 보낸다. 그사이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나며 사람들이 뛰어나온다. 엎드린 베네데타가 고개를 들자 그녀의 이마에 성흔이 보인다. 그녀는 변조된 목소리로 주님을 대신해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한다. 그 말씀은 베네데타를 믿지 못한 죄로 전염병이 발생할 것이라는 것이다.
영화는 보이지 않는 존재를 믿는 것에 대한 판단 근거를 시각에 의존하는 아이러니한 수녀원의 분위기를 포착한다. 관객 역시 보이는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인다. 베네데타와 환영을 공유하며 내부에 머물렀던 관객의 시선은 영화 속 인물들과 같이 외부의 시선으로 물러나며 베네데타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여기서 폴 버호벤 감독은 일종의 신의 위치에서 관객을 시험에 들게 한다. 그는 베네데타를 온전히 믿을 수 없는 존재로 만든다. 이것이 이 영화가 주는 매력이기도 하다. 감독은 베네데타를 성녀로도, 사기꾼으로도, 그 어느 쪽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었다. 성과 속이 공존하는 베네데타. 그녀의 몸의 출처는 예수에게 있다. 영화는 예수를 복사해서 베네데타의 몸에 붙여놓은 듯한 인상을 준다. 어쩌면 베네데타는 폴 버호벤이 영화로 재창조하고 싶었던 예수의 초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영원한 현재를 향해
이후 베네데타는 수녀원장 자리에 오르지만 전 수녀원장이 피렌체 교구에 회부한 종교재판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아 페샤 밖으로 도망친다. 함께 도망친 바르톨로메아는 베네데타에게 새로운 곳으로 가자고 말한다. 하지만 베네데타는 다시 페샤로 향한다. 베네데타는 <데블스 에드버킷>에서 나온 규칙의 마지막 단계까지 가버린 셈이다. 그녀가 삼킨 것은 무엇일까? 선악과일까? 영화의 마지막 장소는 에덴동산을 연시킨다. 아담과 이브처럼 벌거벗은 몸으로 잠에서 깨어난 베네데타와 바르톨로메아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페샤를 멀리서 바라본다. 베네데타가 바르톨로메아와 달리 옷을 챙겨 입은 것은 수치심의 발로일까? 하지만 그녀는 “주님의 사랑과 보호 아래 수치심이란 없다”라고 말하면서 바르톨로메아에게 가슴을 보여달라며 자위를 한 인물이다. 이 장면에서 접촉은 다시 접속으로 바뀌게 된다. 바르톨로메아는 그녀의 상상 속에 머물며 과거가 돼버린다. 반면에 수녀원은 베네데타에게 영원한 현재다. 그곳은 그녀가 아는 세상의 전부이며 그녀의 상상력은 그 안에 머물러 있다. 따라서 베네데타가 페샤로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베네데타가 수녀원을 떠나리라 생각한 것은 그녀를 사기꾼이라 판단하고 믿지 못한 나의 고해성사다. 나 역시 바르톨로메아의 시선에서 의아하게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