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렌치 디스패치>에 관한 작품비평이라기보다는 웨스 앤더슨의 세계에 관한 노트가 되었다. 눈길을 끄는 외관보다 더 독특한 내부를 생각해보았다.
웨스 앤더슨이라는 연출자에 관해 비평하는 것은 은근히 까다로운 일이다. 그는 명성과 성취에 비해 늘 덜 회자된다. 정확히는 특정한 화제에서만 동어반복되는 편이다. 인상적인 ‘영상미’와 화려한 ‘색감’은 그의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나오는 소리이지 않은가. 물론 감독 스스로가 강박적으로 보일 만큼 화면을 정교하게 디자인하는 데 천착하니 정녕 피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의 미장센은 즉각적으로 아름다우며 이를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가 영화의 외피를 현란하게 재단하는 만큼 영화의 내부 질서 또한 능란하게 조직한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유난히 비주얼리스트로서의 면모만 부각되는 것은 다소 억울한 일이다.
그가 20년 전 연출한 <로얄 테넌바움>은 거짓말에 관한 영화였다. 오랫동안 머물던 호텔에서 쫓겨날 신세가 된 로얄(진 해크먼)은 불치병에 걸려 곧 죽는다는 거짓말로 식구들을 불러모으고는 전 부인 에슬린(앤젤리카 휴스턴)의 집에서 지낸다. 거짓말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크고 작은 장난들을 지나 결말에서 그의 묘비에 적힌 문구로 정확히 완성된다. 문구는 생전 로얄이 멋지다고 생각한 문장을 발췌한 것이지 그의 삶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 아이러니를 빚는다. 식구들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지만, 문제될 건 없다. 이 작은 예로 돌이켜보건대 앤더슨은 오랫동안 서사라는 허구의 기틀 안에서 그 속으로 더 들어가 낱낱이 분할된 픽션의 가능성을 모색해왔다.
조립된 픽션들
그 과정에서 연극 또는 소설처럼 막(幕)과 장(章)을 나눈 이야기, 그리고 계열화된 액자식 구성의 플롯과 같은 장치가 동원된다. 앤더슨의 영화는 자주 전체적인 도식을 프롤로그와 각 챕터, 에필로그로 나눈다. 그는 말하고자 하는 바를 곧장 설명하기보다 일정하게 설계된 구조 속에서 필요한 재료들을 가감하며 에둘러 간다. 가령 이야기는 의식의 흐름처럼 끝없이 이어지고, 그 호흡을 따라가느라 관객의 기억 뒤편에 숨겨졌던 부분들이 다시금 등장해 구체적인 주석을 획득한다. 개인적으로는 책갈피나 가름끈이라고 부르고 싶은 순간들인데, 의도적으로 끊겼던 이야기가 이를 기점으로 재개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로얄 테넌바움>에서 마고(귀네스 팰트로)의 약지가 잘린 이유라든가 그녀와 리치(루크 윌슨) 사이의 은밀한 애정은 테넌바움 가족을 소개하는 프롤로그에서 잠깐 등장했다가 금세 사라지고는 오랜 이후 불쑥 나타나 다시 설명된다. 물론 정보를 지연한 후 공개하는 기법은 그 자체로 특별하진 않다. 다만 앤더슨의 그것은 그가 고집스럽게 덧칠한 인공적이고 장식적인 세계 안에서 벌어진다는 사실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의 픽션에는 늘 인공이라는 외양이 동반되는데, 이 과시적으로 세공된 외관은 너무 완벽해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있을 리 없는) 완벽하지 않은 세계다. 그리하여 픽션의 조각들은 핍진하게 연결된다기보다 어딘가 생략이나 세탁을 거친 채 조립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런데 이것이 도리어 잉여적인 일화들의 개입을 수용하면서 서사의 층위를 증식시킨다.
한편 그의 영화와 관련해 자주 거론되는 또 다른 지점은 그가 유색인종이나 여성 등의 소수자를 차별적으로 그린다는 것이다. 캐시 박 홍의 통렬한 저작 <마이너 필링스>에서도 그의 향수 어린 세계가 백인 남성의 선택적/배제적인 추억에 기인한다며 비판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그는 J. 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기인한 “홀든 콜필드의 발육 정지의 유산”이 미국 대중문화계에 소년 캐릭터를 대거 양산하도록 만든 영향을 언급하면서, 인종문제가 격렬했던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도 앤더슨의 영화가 “인위적이고, 협소하고, 짜깁기”로 채워져 있음을 지적한다. 영화 속 유색인종들이 구체성을 잃은 부차적 존재로 등장한다는 사실도 빼놓지 않는다. 타당한 비판이다. 그런데 이 지적은 역설적으로 앤더슨 영화의 성질을 더없이 적확하게 진술한다. 왜냐하면 그의 액자 안에서는 누구/무엇 할 것 없이 편협한 인위와 부박한 과장을 장착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이를 전면화하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을 이루는 특질에 따라 서로 다른 맥락이 형성되기는 하지만, 그의 영화 속 모든 캐릭터가 ‘앤더슨 세계’라는 일정한 목표에 복무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에도 변함이 없다. 말하자면 그의 캐릭터들은 흔한 캐릭터 분석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거칠게 말할 때 그의 (실사)영화 속 배우들은 그가 연출한 스톱모션애니메이션 <판타스틱 Mr. 폭스>와 <개들의 섬>의 퍼펫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차라리 동물 묘사에 관해 더 설득력 있는 비판이 가능했을 것이다). 앤더슨은 소위 ‘리얼’을 외시하려 시도한 적이 없으며, 그렇다고 허구로 전복을 꾀하는 일을 영화의 본령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인물들은 지도에 없는 곳을 유랑하며 발견되지 않은 유물을 탐낸다. 그의 영화는 매번 거짓을 기반으로 아주 약간의 (진실이 아니라) 진심을 전달할 뿐이다.
부조화의 순간들
신작 <프렌치 디스패치>는 앤더슨의 어떤 작품보다도 풍부한 정보가 녹아 있는 영화로 보인다. 이번에도 가상의 도시가 등장하며 새저랙(오언 윌슨)이 소개하는 이곳 블라제는 어렴풋이 문학, 사진, 영화에서 접한 적 있는 듯한 20세기 중반 프랑스의 꼴을 하고 있다(물론 고정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그야말로 가상의 도시로 보인다). 이후 등장하는 세 기자의 기사/이야기 또한 그러한 인공적인 토대 위에서 전개된다. 다소 우스꽝스럽게도, 프랑스 도시 위에 세워진 잡지사 ‘프렌치 디스패치’는 그 지리적 위치와 달리 영어로 글을 쓰고 책을 발간한다. 이 부조화의 전제는 앤더슨이 그리는 이 잡지사의 풍경이자 공동체의 조건이기도 하다. 눈물이 나오면 ‘눈물 금지’라는 표어를 가슴에 새기며 꾹 참아야 하는 편집장실. 이곳에서 잡지사의 구성원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개별 인물이 앉은 자리마다 숏을 각각 찍어 이어 붙여, 서로가 서로에게 걸쳐진 채 큰 하나를 이루는 각각의 존재들을 확인시킨다.
프렌치 디스패치’의 필진이 잡지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그들이 쓰는 원고, 그들이 발화하는 말, 그리고 그들이 실제로 겪거나 취재한 경험이 맞물려 서술된다. 첫 번째 ‘예술과 예술가’ 지면에서는 베렌슨(틸다 스윈튼)이 강단 위에서 예술가 로젠탈러(베니시오 델 토로)를 소개한다. 그렇다면 도입과 중반마다 끼어드는 이 소개와 설명의 시간 또한 마치 에세이처럼 원고에 쓰이는 셈일까? 아니라면 이따금 흑백과 컬러를 오가며 나타나는, 로젠탈러와 시몬(레아 세두)의 예술적 교류와 카다지오(에이드리언 브로디)의 거래처럼 오직 대과거적 시제만이 적히는 걸까? 작중에서 대부분 불어를 사용하는 시몬의 대사는 베렌슨의 원고에 어떤 방식으로 옮겨질까? 영화 속 기자들이 실질적으로 글을 쓰는 장면은 충분히 등장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취재가 원고가 되는 방식을 선명히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영화는 지속적으로 기이한 부조화의 감각을 회전시킨다. 세개의 기사를 싣는 과정에서 작은 일화들은 물론이며 관객의 미결된 질문들이 계속해서 픽션들의 틈을 간섭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죽은 편집장 아서 하위처 주니어(빌 머리)가 기자들의 원고를 읽고 피드백을 주듯이. 진실은 오리무중이지만, 그게 중요한가. <프렌치 디스패치>가 웨스 앤더슨이 천착해온 바를 성실하게 반복하는 얄궂고도 따뜻한 영화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