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자를 넘어설 각오가 필요해
프랭크 허버트의 <듄>영상화와 관련된 신화와 진실
프랭크 허버트의 <듄>은 1965년에 처음 출간된 뒤로 두 가지 미신을 끌고 다녔다. 하나는 SF 역사상 최고 걸작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화가 불가능한 소설이라는 것이다. <듄>이 최고의 SF 소설 또는 소설 중 하나라는 주장은 거의 직관적으로 반박될 수 있다. 일단 몇 페이지만 읽어도 그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드니까. 대단한 야심작이기는 하다. 적어도 첫 번째 책은 재미있다. 장르에 끼친 영향은 엄청나다. 하지만 걸작이 되기엔 문제가 많다.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이 책이 결국 한 무더기의 패스티시 덩어리라는 것이다. <듄>의 세계는 어떤 곳인가. 인류가 항성간 여행을 통해 전 은하계를 커버하는 제국을 건설했는데, 그 세계에서 백인 남자들이 공후백자남 놀이를 하며 만년의 시간을 날리고 있다. 이 자체가 통탄할 일이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이 세계를 묘사하는 방식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들의 사고방식, 행동, 언어는 아서왕 이야기와 <젠다성의 포로> 사이에 있는 잡다한 옛 문학에서 가져와 SF 설정에 얼기설기 엮은 것 같다. 한마디로 이 세계의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자기 목소리를 내는 대신 옛날 사람 흉내를 내고 있다. 얼마 전에 SNS에서는 맘스터치에서 치킨버거 주문하는 과정을 성경 말투로 푼 게시물이 인기를 끈 적 있는데 그걸 생각하시면 되겠다. 그 결과물은 재미있지 만 보기만큼 믿을 만하지는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도 힘들다.
원작을 고스란히 옮기면 걸작이 되나?
둘째로, 이 책은 당시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낡아가고 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미국 백인 남자가 오리건에 있는 모래언덕과 (아마도) <아라비아의 로렌스>에 감명받아 만든 가짜 아랍 문화와 가짜 백인 메시아에 대한 멋진 이야기로 당연히 제국주의 뽕에 찬 인종차별적, 성차별적 방향으로 흐른다. 소설이 종교와 철학을 다루는 방식은 20세기를 거쳐 21세기의 험악한 시대에 도달한 우리에겐 무책임하고 나태해 보인다.
셋째, <듄>은 그렇게까지 좋은 시리즈가 아니다. 성공적이었던 1편 뒤에 나온 여러 편의 소설들은 정도 차가 있지만 대부분 1편 뒤에 긴 꼬리처럼 달라붙은 사족이었다. 허버트 사후에도 이 시리즈는 계속 이어지고 있고 그 책들은 아직 안 읽어 봤는데 읽는다고 해서 내 의견이 특별히 바뀔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듄>의 세계는 한권의 긴 책으로 충분히 소화될 수 있는 곳이었다.
<듄>이 제대로 영화화하기가 불가능한 작품이라는 주장의 반박은 심심할 정도로 쉽다. 지금 1부가 나온 드니 빌뇌브의 <듄>은 이 소설의 세 번째 각색물이다. 사람들이 앞의 두편에 만족하지 않을 수는 있는데, 같은 소설이 세편이나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로 만들어졌다면 (심지어 드라마는 속편도 나왔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만큼 각색이 힘든 작품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
<듄>의 각색 불가능성에 대한 신화 절반은 알레한드로 호도로프스키가 만들었다. 1970년대에 호도로프스키는 <듄>을 어마어마한 길이의 대작영화로 만든다는 야심을 품었지만 장엄하게 실패했고 그 영화는 만들어지지 못한 영화 중 가장 걸작이라는 애매한 명성을 얻었으며 심지어 이를 다룬 다큐멘터리영화까지 나왔다.
상상 속 모래행성에서 호도로프스키가 벌인 모험은 좋은 이야깃거리다. 하지만 영화는 타협 속에서 만들어지는 협업 예술인데, 호도로프스키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타협을 안 했다. 다시 말해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애물은 원작 소설이 아니라 호도로프스키 자신이었다. 그 비전에 충실한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쳐도 영화가 훌륭하거나 재미있었을 가능성도 별로 높지 않다. 그리고 보다 현실적인 예술가가 타협의 과정을 통해 <듄> 영화를 만들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첫 번째 <듄> 영화는 1984년에 나왔다. 그해 최악의 흥행 실패작이고 데이비드 린치의 유일한 망작이다. 이 작품 역시 이 소설의 각색 불가능성에 대한 증거로 종종 불려온다. 이 영화의 혼란스러움, 잡다함, 조잡함의 상당 부분은 1980년대 관객에게 원작의 방대하고 복잡한 월드 빌딩의 재료들을 극영화의 러닝타임 안에서 전달하기 위해 무리한 수를 둔 결과였다. 하지만 옹호할 구석이 없는 건 아닌데,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자.
두 번째 <듄> 각색물은 <사이파이 채널>에서 방영된 3부작 미니시리즈다. 이 작품에서부터 각색 불가능성에 대한 미신은 조금씩 시들어간다. 역시 그렇게까지 걸작은 아니고 저예산 때문에 종종 애를 먹지만 프랭크 허버트의 방대한 세계의 정보를 영상 매체로 옮겨 설명하기 어렵다는 미신은 거의 완벽하게 깨진다. 심지어 이 시리즈가 그린 아라키스의 세계는 나중에 나온 빌뇌브의 세계보다 다채롭다. 빌뇌브의 아라키스가 영웅 서사를 위한 배경이라면 미니시리즈 버전 아라키스는 실제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느껴진다.
미니시리즈의 가장 큰 이점은 물론 러닝타임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점도 있었으니 그동안 일반 대중이 <듄>과 같은 이야기를 훨씬 이해하기 쉬운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건 ‘각색 불가능성’에 대한 미신과 상관없이 <듄> 영화가 은근슬쩍 많이 만들어지면서 사람들이 여가에 익숙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스타워즈>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심지어 <비틀쥬스> 같은 영화들은 다 어느 정도 프랭크 허버트의 영향 아래서 만들어진 <듄> 영화였다. 이제 사람들은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SF 세계 사람들이 사막에서 모래충을 타고 질주하거나 칼싸움을 해도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게 되었다.
허버트의 <듄>은 빌뇌브보다 린치의 세계
자, 이제 얼마 전에 개봉된 빌뇌브 버전 이야기를 하자. 아직 2부작 영화의 1부이긴 하지만 이 작품이 지금까지 나온 <듄> 각색물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액션이 많은 2부는 더 재미있을 것이고 빌뇌브가 두 번째 영화를 작정하고 망칠 가능성은 비교적 낮다. 하지만 이 영화가 사람들이 기대했던 ‘결정판’인가? 하면 신기하게도 그런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빌뇌브의 개성이 허버트의 개성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빌뇌브가 아무리 청소년기 때부터 <듄>의 팬이었다고 해도, 빌뇌브가 상상하는 <듄>은 허버트의 <듄>과 많이 다르다. 거의 흑백영화에 가까운 화면은 경건할 정도로 절제되어 있고 당황스러울 정도로 안 웃긴다. 후자는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팬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듄>의 충실한 각색물은 완전히 안 웃길 수가 없는 설정을 받아들여야 한다. 빌뇌브의 영화가 이렇게 작정하고 안 웃긴다는 것은 원작의 중요한 무언가, 즉 바로크적 성격이 청소되었다는 뜻이다. <듄>은 좀 웃기고 괴상하고 어처구니없고 종종 형편없이 못생겨야 정상이다. 허버트가 꿈꾼 세계는 빌뇌브의 세계보다 린치의 세계에 가깝다. 린치 영화의 괴상함과 조악함은 오히려 이 영화가 의외로 허버트의 비전에 충실했다는 증거다. 그리고 허버트는 평론가들이나 관객이 뭐라고 하건 린치 영화를 꽤 좋아했다고 한다.
허버트의 진짜 버전이 무엇이건 빌뇌브가 이를 무조건 따라야 할 이유는 없다.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온 1편만 해도 허버트의 주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기미가 보인다. 21세기에 <듄> 우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만들려면 원작자를 넘어설 각오를 해야 한다. 그 때문에 원작자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베네 게세리트 시리즈인 <시스터후드>의 가능성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