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영화는 ‘떠나간 옛사랑’ 같아”
관객 | 감독님은 몸가는 대로, 마음가는 대로 사는 분인 것 같아요.
김지운 | 예? 몸가는 대로 살지는 않는데요.
관객 |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가족의 반대와 걱정도 많으셨을 텐데 어떻게 이겨내셨는지가 궁금하다구요. 사실 저는 감독님을 잘 모르거든요. 그런데 오늘 여기서 뵈니까 멋진 분인 것 같아요. 혈액형과 별자리와 좋아하는 이성스타일과 동성스타일을 말씀해주시겠어요?
김지운 | 저… 딱히 동성을 좋아하진 않구요. (관객웃음) 집안에서 걱정을 많이 하긴 했지만 저는 걱정이고 뭐고 그냥 밀고 나가는 편이에요. 물론 부모님 하시는 말씀은 틀린 게 하나 없는데 늘 말보다는 그 말들의 관계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거잖아요. 저는 그냥 쿨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물론 서른이 넘었는데 다 큰 아들이 집에만 있으니 어머님이 “공무원 시험이나 봐라, 동회 같은 데서 일하면 얼마나 좋은 줄 아냐”, 그러시면 “아… 예” 하고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러다가 시나리오 당선돼서 “엄마, 나 시나리오 당선됐어” 하니까 “이놈이 이제 거짓말까지 하네” 그러시더라구요. (웃음) 심지어 <조용한 가족> 찍을 때까지도 당신 아들이 감독이 된 것도 모르셨어요. 촬영중에 삐삐가 와서 전화를 하니까 “너 요즘 뭐하고 사는데 집에도 안 들어오는 거냐” 하시더라구요. (웃음)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어른들 말 새겨듣는 건 좋지만 결국엔 자기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잘못 들어선 길이 지도를 만드는 법이니까요. 그리고 뭐 물어보셨죠? 아! 혈액형? 혈액형은 O형이구요. 별자리는 게자리고 생일은 칠월칠석 전날인 7월6일이라, 직녀 같은 여자가 제 이상형이에요. 저는 색깔이 있으면 모든 색이 다 예뻐 보이거든요. 여자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모든 여자들이 다 저마다의 아름다움이 있죠.
관객 | <조용한 가족>을 보았을 때 히치콕이 연상되면서 아, 우리나라에도 저런 작품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독님은 한 영화를 끝내고 나면 자신의 작품에 대해 스스로 평가를 하는 편이십니까? 아니면 끝내면 다음 것 하느라 그전 것에는 관심이 없으신가요.
김지운 | 저에게 지나간 영화는 ‘떠나간 옛사랑’ 같은 느낌이에요. 원망이나 감정은 있겠죠. 왜 내가 좀더 잘해주지 못했을까, 왜 내가 그런 짓을 했을까. 그런 미련들이지 평가를 하진 않아요. 예를 들어 지난해에 헤어진 얘는 7점 정도, 지지난해에 헤어진 얘는 한 8점 정도 그러진 않잖아요.(웃음) 저 역시 <조용한 가족>은 한 8점 정도니까 열심히 해서 9점 넘겨야지 그러진 않는 거죠. 그때의 감성과 그때의 최선의 태도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고 혹시 그 의도와 생각이 다가가지 못한 느낌이 있더라도 그것 역시 그때의 나라는 생각으로 받아들여요. 그저 서서히 좋아질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음 것을 할 수 있는 거죠. <조용한 가족>을 끝내고 드라마가 부족하다는 말을 들었고 드라마를 생각하며 <반칙왕>을 찍었고, 그 작품을 끝내고 여성캐릭터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해서 <커밍아웃>을 찍었고, 좀 진지했으면 좋겠다는 말에 <메모리즈>를 찍었죠. 아까 떠나간 연인 같다고 했는데 지난 사랑에게 못해줬던 아쉬움을 다음 연인에게 잘해줘야지, 하는 생각과 같은 거죠.
관객 |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수업 들을 때부터 하고 싶었던 질문인데요. 감독님은 브레송이나 파졸리니, 타르코프스키를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그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감독님의 삶의 철학이나 종교적 관점이 그들의 영화가 닮아 있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미학적인 측면인가요. 또한 코미디를 만드는 비결 같은 게 있으신가요.
김지운 | 음, 먼저 종교적 관점은 아니구요. 그들의 영화마다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는데, 그 장면들은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슬픔들을 담고 있어요. 저는 영화를 보며 슬픈 느낌 받는 걸 좋아하는데, 그들의 영화를 보면서 내가 슬퍼지는 이유가 뭘까. 하는 질문을 하게 되죠. 예를 들면 브레송의 <부드러운 여인>이나 아녜스 바르다의 <행복> 같은 작품들을 보며 내가 왜 슬퍼졌을까, 두 영화가 슬픔의 감정을 드러내는 부분은 하나도 없는데 말이죠. 반대의 이미지들을 조합해 그 반대의 것들을 도출해내는 마력이랄까. <행복>의 행복한 결말을 보면서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데 이렇게 잔인해질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슬퍼했고 <부드러운 여인>은 극히 평범한 개인의 영혼이 한 고결한 영혼을 어떻게 망가트려 비극적인 결론으로 이끌고 가는가에 슬픔을 느꼈어요. 아마도 그런것들을 저는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사실 제가 지금까지 만든 영화들이 모두 코미디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저는 코미디영화를 안 보고 별로 좋아하지도 않거든요. 코언 형제, 짐 자무시, 우디 앨런, 아키 카우리스마키, 팀 버튼, 코미디가 강한 감독 중엔 멜 브룩스 정도? 사실 <조용한 가족>도 코미디라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코믹과 호러를 변주한 영화였는데 상업영화의 틀을 가져오는 과정에서 잔혹한 장면이 많이 빠지고 코미디만 불거져 나온 거죠. 코미디를 고집하진 않아요. 오히려 ‘모든 것이 다 웃길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죠. 난 코미디를 만들 때도 늘 슬프다는 생각을 해요. 최민식씨가 <조용한 가족> 첫 시사후에 “강호야, 세상살기가 이렇게 힘든 거야”라고 하는데, 너무 쉽게 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정말로 듣고 싶은 이야기였어요. 이 영화는 원하는 방식으로만 삶이 흘러가지 않는다는 슬픈 현실을 장르 위에 얹어놓은 영화였거든요.
“문법이 없었기 때문에 자유로웠죠”
관객 | <씨네21>에 연재하신 숏컷 칼럼을 보며 팬이 된 사람입니다. 숏컷을 보고 비디오로 뒤늦게 <조용한 가족>을 보았는데 어떻게 그때 이런 영화를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감탄했거든요. 사실 1, 2년 전에 ‘엽기’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그때 <조용한 가족>이 나왔으면 더 흥행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감독님은 지금은 아무도 몰라주지만 3, 4년 뒤에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한 작품을 만들고 싶으신지, 아니면 딱 반 발짝만 앞서가서 흥행과 비평,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감독이 되고 싶으신지 궁금하거든요. 그리고 칼럼을 다시 쓰실 생각은 없는지….
김지운 | <씨네21>에서 대답하셔야….
사회자 | 게재할 계획이 없습니다. (웃음) 농담입니다. 사실은 1년도 못 채우고 9개월인가 지나서 못 쓰겠다고 하시는 걸 온갖 감언이설과 협박과 회유를 해서 1년 채우고 끝냈는데, 사실 김 감독님이 1년 동안 규칙적으로 그렇게 일정한 일을 한 건 태어나서 처음이라고 하시더라구요. 본인 스스로를 장하게 생각하신다고. 언제든 다시 쓰시기를 기다리고 있지요.
김지운 | 숏컷을 썼던 한해는 내 자신이 가장 자랑스러운 한해였어요. 다시 쓰는 건 좋지만 <씨네21>이 워낙 원고료가 박해서….
사회자 | 원고료 올렸습니다. (웃음)
관객 | 영화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해줄 말씀이 있는지….
김지운 | 홍상수 감독이 ‘맨눈으로 봐라’라는 말을 하셨는데 그 말이 저에겐 선명하게 남았어요. 요즘엔 영화에 관한 정보량이 넘쳐나서 마치 자신이 보지 않은 것을, 느끼지 않은 것을 본 것처럼, 느낀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있죠. 저두 그럴때가 있구요. 그런 건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는 거거든요. 정말 자기가 보고 느낀것을 자기 방식대로 이야기하는 게 중요해요. 그런 말은 귀에 쑥쑥 들어오거든요. 임상수 감독의 말투나 어법은, 그러니까 양아치 어법이란게 있는데(웃음)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자기 속에서 체화되어 나오는 말이기 때문에 알아듣기가 편하고 재미있어요. 홍상수 감독 역시 심오하고 어려울 수 있는 이야기를 아주 귀에 쏙쏙 들어오게 얘기해줘요. 그것은 그들의 고통이 실재하기 때문이란 거죠. 아, 그러고보니 모두 ‘상수’네요. 역시 저는 ‘하수’인 걸 느껴요. (웃음)
관객 | 시나리오를 공부하는 사람인데요. 공부하던 문법이 막상 시나리오를 쓰려고 하면 방해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감독님에게는 감독님만의 문법이나 스타일이 있는지, 그리고 모든 매체가 그렇겠지만 이성적인 면과 감성적인 면 중 어떤 쪽에 비중을 두고 그런 면들을 어떻게 배분해서 작업하는지 궁금합니다.
김지운 | 저는 이성, 감성이 어떻게 분리되는 것 같지도 않고 배분해야지 생각해본 적도 없어요. 사실 저는 영화공부를 하나도 안 했고 그래서 문법이란 걸 염두에 둔 적도 없어요. 영화만큼은 충분히 독학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해요. 그저 살면서, 행동하면서 어떤 인상을 받으면 매순간의 ‘이게 뭘까’ 하는 느낌들을 잊지 않고 생각해요. 처음 시나리오를 쓰겠다고 생각했을 때도 음 이런 문법을 이렇게 적용해야지가 아니라, ‘그냥 내가 생각하는 영화를 글로 옮기는 과정’이었어요. 문법이 갖춰진 게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로웠던 것 같아요. 교육은 체제와 지배이데올로기에 귀속되어 있다면 예술은 그것을 뛰어넘을수 있다고 생각해요. 좋은 시나리오 교본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는 것 같은데요. 좋은 이야기는 다 생활에 있다고 생각해요. 오늘 이 자리에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시는 분들이 많이 오신것 같은데요. 모두들 ‘생활의 발견’을 하시길 바랍니다.
사회자 | 맺음말 겸해서 한마디 드리자면, 김지운 감독은 범인들이 보기에 얄밉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살다가 시나리오 썼는데 당선돼, 감독하라니까 감독해, 만들자마자 히트해, 두 번째 영화 찍어, 서울 200만 터졌지, 처음 칼럼이란 걸 썼는데 뛰어난 필자로 인정받아, 그것만이 아닙니다. 김지운 감독의 영화는 장사만 잘된 것이 아니라 두편 다 한국의 장르영화에서 앞서나가 있는 아주 혁신적인 장르영화라서 비평적으로 굉장히 높은 평가까지 받았잖아요. 진짜 얄밉죠. (웃음) 누구는 단 한 가지만 하려고 발버둥을 쳐도 너무 힘든데….
김지운 | 내참, 이제 비밀을 말씀드려야 할 때가 온 것 같은데요. 사실 10년 가까이 백수 생활을 하면서 모진 핍박과 압박을 받으며 살아왔어요. (웃음) 어머니가 서른이 넘은 아들에게 모멸감을 주는 말을 왜 안 하셨겠어요. 그럴 때마다 매번 슬기롭게 헤쳐나갔던 거죠. 나 또한 공무원 시험봐서 나쁜 길로 갈 수도 있었는데,(웃음) 견뎌냈거든요. 그런 걸 이겨내는 건 딴 분들이 습작하는 것과 똑같은 에너지가 소비되는 거거든요. 어… 중간중간 어디 나와서 일해보지 않을래, 하는 유혹도 많았지만 어, 눈앞에 있는 작은 이익들에 연연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어, 꿋꿋히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워온 거거든요. 전 10년 동안 백수하면서 안 힘들었는 줄…(아아… 수습 안 된다) ……… 그만할게요. (웃음…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