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화면 안에 두 소녀가 밤길을 달리고 있다. 조그만 아이의 손을 꼭 붙든 조금 더 큰 소녀의 몸짓은 불안하며, <세자매>를 열고 있는 이 밤은 불길하다. 겉옷 하나 걸치지 않은 내의 차림의 아이들이 차가운 겨울밤을 달려야 하는 상황적 배경이 밝을 리는 없다. 하지만 더 암담한 사실은 두 소녀가 언젠가 이 밤을 다시 대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장면을 설명하는 장면이 바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게다가 플래시백의 한 부분이라면, 이 밤 속으로 영화의 감정들이 고여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세자매>의 서사를 복기한 결과가 아니다.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는 전개다. 영화의 시작부에 등장하는 플래시백 장면이 인물들의 현재와 동떨어져 기능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현 상태의 징후로서 기능하든 기원으로서 작동하든, 그것은 대개 현재와 과거 사이의 인력을 형성한다.
인물들의 온갖 기행을 나열하며 세상의 보편적인 감정에 기어코 다다르려 하는 이승원 감독 역시 인물들의 전사에 공을 들이는 창작자다. 그는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인물들의 고통을 과격한 방식으로 체현해내거나 (<소통과 거짓말>(2015)), 더 과격한 방식으로 인물들의 고통을 재현하는 데 실패했다(<해피뻐스데이>(2016)). 어쩌면 <해피뻐스데이>의 실패는 의도된 실패일지도 모른다. 인물들의 내적 고통보다, 어떤 이유로건 도덕성이 조금씩 결여된 가족 구성원들의 이상한 행각을 지켜보는 관객의 고통을 더 염두에 둔 것 같은 이 영화는, 은근히 관객의 윤리성을 시험한다.
하지만 그 방식이 교묘하지 않아 사악하게 느껴지지 않는데, 집안이라는 명백한 무대에서 불쾌감을 유발하려 노력을 다한 영화를 대면하며 동요되지는 않는 것이다. 가령 장애를 가진 이를 괴물처럼 여기고, 물리적 언어적 폭력이 난무하는 가족공동체를 지켜보는 관객에게, 당신의 시선은 어떤 편견 없이 온당하냐고 직접적으로 묻는 영화가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세자매>의 쾌감은 어디서 비롯될까
그럼에도 이승원 감독의 영화는 불편하다. 인물의 내적 고통을 신체적 가학/피학의 형태로 발현시키는 형식이 불편해서는 아니다. <소통과 거짓말>에서 아이를 끔찍한 범죄로 잃은 여자(장선)의 자책감 어린 심리적 고통이 피학적인 행위로 드러난다고 해서 이 영화가 고통의 스펙터클을 전시한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는다. 다만 신체로 내적 고통을 끝없이 증명해내는 이 영화의 강고한 태도에 질식감을 느끼면서도, 화면 한가득 참기 힘든 질식감을 부여하는 배우들의 힘, 그리고 이 영화의 원초적인 에너지에 휘둘리는 상황이 불편한 것이다. 이 영화엔 감정을 분출해낼 수 있는 어떤 출구도 없다. 피투성이 인물들의 지독하게 쓸쓸한 소통을 응시하며 쉽게 공감의 정서를 얘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세자매>에는 우리의 감정을 분출시킬 수 있는 출구가 있을까. <해피뻐스데이>의 가족공동체의 지독한 운명과 <소통과 거짓말>의 끈질긴 고통을 공유하되, 조금 더 유연한 이 영화에 대한 반응은 전작들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인다. <세자매>의 감상평 중 흥미를 끌었던 대목이 있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희숙(김선영), 미연(문소리), 미옥(장윤주) 세 자매와 막내 진섭(김성민)이 아버지의 생일에 울분을 토해내는 장면에서 통쾌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 쾌감은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아버지의 위선이 목사 앞에서 낱낱이 노출되는 지점, 또는 아버지에게 학대당한 네 남매의 절규, 아니면 어른이 사과도 못하냐는 희숙의 딸 보미(김가희)의 질타에서 오는 것일까.
이 가족의 불운은 우리 사회에 도저한 병폐와도 밀접해 있다. 학대에 시달린 네 남매의 트라우마,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아버지와 미연을 통해 드러내는 위선과 기만, 가족공동체의 운명과 경제적 상황으로 인해 껄끄러운 사이가 되는 가족들의 작은 분열은 모종의 친밀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노골적인 묘사와 사회적 연대의식이 이 가족의 불운에 대한 공감을 자극한다고 해서, 이 영화의 표현 수위에 대해서도 공감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세자매>를 쉽게 거부하는 방법은 과잉된 폭력과 고통에 대해 묻는 것이다. 이를테면 아버지, 남편, 딸에게로 이어지며 희숙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암에 걸리는 가혹한 상황, 미연의 자책감과 분열, 상식 밖으로 내쳐지는 미옥의 행실과 이 가족의 심연처럼 존재하는 진섭의 현재를 나열해 영화를 고통의 포화상태로 이끌고 폭발시킨 후, 가족공동체를 회복하려는 단선적인 시도를 외면해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이런 외면은 너무 쉽다.
언어 대신 반응하는 신체
아버지의 생일 잔칫날은 그야말로 고통의 난장이다. 어린 미연과 미옥이 겨울밤을 달려야 했던 이유가 희숙과 진섭의 처참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을 진섭은 현재에서 아버지에게 오줌을 갈겨대며 울분을 토해낸다. 이들 가족은 그들이 공유한 트라우마와 현재 상처를 헤집어 피투성이가 된 후에야 제대로 된 말 한마디를 뱉어낸다.
아버지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일이다. 절대적으로 옳은 요청이지만 응답이 없다. 감독의 전작에서도 그렇듯 <세자매>에서 언어는 종종 불능 상태가 된다.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사는 희숙은 실은 미안해야 할 일이 없기에 의미가 무색해지고, 정작 사죄해야 할 아버지는 그 말의 가치를 모르거나 외면하기에 의미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대신 희숙이 내적 고통을 신체적인 고통으로 치환하듯, 그의 신체가 반응한다. 아버지는 유리창에 머리를 찧어대며 피를 흘리는데 이 행위는 죄책감의 표현이고 회개의 방식일까. 기저에 그런 의도가 깔려 있다고 할지라도 이 또한 고통이 살아가는 양식으로 보인다.
이승원 감독처럼 고통의 외형화에 집착하는 감독도 드물 것이다. 심리적 통각은 신체적 통각으로 대체되고, 내적 고통은 피와 배설물과 토사물로 신체를 비집고 나오며, 속울음과 고성, 욕설과 폭력 없이는 제대로 된 말 한마디 터져나오지 못하는 세계가 <세자매>를 지탱하고 있다. 그리고 배우들의 무시무시한 연기력이 질식 상태 속에서도 이 세계를 생동하게 만들어 이 영화를 도저히 거부할 수 없게 만든다. 이승원 감독의 영화를 보며 느끼는 난처함은 언제나 배우들의 힘에서 파생되는데, 주어진 캐릭터의 밀도보다 배우의 표정과 제스처의 밀도가 훨씬 강하기 때문이다.
<세자매>의 전체 구조는 평이하고 서사는 단선적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긴장감이 생기는 이유는 영화의 세부를 빈틈 없이 채우며 때로는 그 상황을 살아버리는 배우들의 연기, 강인한 힘이라고 불러 마땅한 연기력에서 기인한다. 문소리 배우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섬뜩한 표정으로 가련한 인물을 구현할 때, 김선영 배우가 매 숏 안에서 희숙으로 살아버릴 때, 동화되기 힘든 캐릭터를 우리에게 밀착시키는 외압을 밀어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제스처의 밀도가 숏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도 상기하며 감독이 캐릭터의 신체에 집착하는 것만큼이나 배우들의 육체에 몰두한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세자매>는 과격하고 소란스러운 방식으로 고통의 난장을 관통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