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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네', 신화를 경유해 베를린을 바라보는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시선

[안시환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운디네는 도시 모형을 설명하며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이야기한다. 맞는 말이다. <운디네>를 보며 잘 보이지 않았다. 아직 멀었나보다.

부서진 세계

어쩌면 이렇게 시치미 뚝 떼고 역사와 신화, 현실과 가상, 정치와 예술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을까? 아니, 그 경계를 넘나드는 정도가 아니라, 이 둘이 한몸이 되어 그 성격을 단선적으로 규정하기 힘든 ‘유령의 영화’가 있다면, 그것은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영화일 것이다. <트랜짓>에서도 그랬지만, 크리스티안 페촐트는 이 신비한 세계를 펼쳐 보이면서도 그 신비한 매력을 의도적으로 과시하거나 하지 않는다. 천연덕스러울 정도다. 어쩌면 페촐트는 영화란 애초에 유령의 예술(또는 매체)이라고 믿는지도 모르겠다. 굳이 <트랜짓>과 비교하지 않는다면, <운디네>는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다. 그리고 절실하다.

배신당한 베를린의 꿈

물의 정령인 신화 속 운디네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영혼을 가진 인간이 될 수 있지만, 상대방이 자신을 배신하면 그를 죽이고 다시 물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을 갖는다. 운디네 신화는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인어공주’의 원형이기도 하다. <운디네>의 기본 줄거리는 이 신화만큼이나 단순하다. 운디네(파울라 베어)는 영원한 사랑일 줄 알았던 요하네스(야코프 마첸츠)에게 이별을 통보받는다. 운디네는 연인이 떠났음을 확인하는 그 자리에서 새로운 사랑인 산업 잠수사 크리스토프(프란츠 로고브슈키)를 만난다. 두 사람의 사랑이 깊어질 무렵, 그들 곁으로 요하네스가 스쳐 지나가고 이때 운디네의 심장이 잠시 멈춘 것을 알아챈 크리스토프는 그녀에게 이별을 알린다. 운디네는 크리스토프에게 자신의 유일한 사랑은 당신이라는 메시지를 남기지만, 사고로 뇌사 상태에 빠진 그는 그녀의 메시지를 전달받지 못한다. 절망에 빠진 운디네는 요하네스를 죽이고 다시 물속으로 돌아가 크리스토프에게 삶을 되돌려준다. 그리고 2년이 흘러 두 사람은 물속에서 재회한다.

사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운디네>는 꽤 단순한 사랑 이야기다. 하지만 페촐트는 이 스토리에 운디네 신화를 현대적으로 비틀고,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게다가 너무나 멋들어지게 현실과 가상, 신화와 역사가 서로를 지탱하게 함으로써 두터운 의미의 지층을 만든다. 배신으로 얼룩진 운디네의 비극은 베를린의 역사에 투영되고, 통일 독일이 바랐던 이상은 운디네와 함께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뇌사 상태에 빠진 크리스토프가 한밤중에 운디네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물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운디네의 결단이 크리스토프를 되살려내듯이, 신화와 현실이 원인과 결과로 뒤섞이며 두 세계는 한몸이 된다. 하지만 페촐트는 그의 영화적 자의식을 돌출시키거나 스타일이 영화를 압도하는 그러한 방식을 지향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운디네>를 더 신비롭게 한다.

신화에서는 질투의 주체가 운디네지만, 페촐트는 그 자리에 남성을 앉힌다. 크리스토프가 운디네에게 이별을 알린 이유는 요하네스에 대한 질투 때문이었을 것이다. 운디네와 크리스토프가 처음 물속에 함께 들어간 장면에서, 크리스토프는 건축물에 새겨진 ‘UNDINE’라는 글자를 보여주려 하다가 그녀의 손을 놓는다. 사라진 운디네를 ‘군터’라 불리는 거대한 메기가 어디론가 끌고 간다. 크리스토프는 그런 운디네를 물밖으로 끌어내 인공호흡으로 그녀의 멈춘 심장을 다시 뛰게 한다. 크리스토프의 사랑은 그녀를 ‘다시 숨 쉬게’ 한다. 어쩌면 이는 페촐트가 내리는 사랑에 대한 정의일 수도 있고, 통일 이후 베를린이 꿈꿨던 미래일 수도 있다. 하지만 크리스토프는 자신이 운디네의 심장을 두번이나 다시 뛰게 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다. 그것이 크리스토프가 운디네에게 이별을 통보한 이유다. 멜로드라마의 지각(知覺)은 언제나 지각(遲刻)하는 법이다. 그렇게 <운디네>에서 멜로드라마는 역사적 회한과 맞닿는다. 하지만 페촐트가 신화에서 시작해 그 운명의 세계에서 이탈하듯이, 멜로드라마 특유의 체념적 정서에 머물 생각은 없어 보인다. 그것이 운디네가 이별을 통보한 크리스토프를 되살리는 이유다.

운디네를 사이에 둔 크리스토프와 요하네스의 관계는 통일 독일의 이상을 사이에 둔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동베를린의 흔적을 지우려 했던 일련의 과정을 연상시킨다. 운디네가 두 사람 모두에게 버림받았듯이, 페촐트는 지금의 베를린이 점점 그 이상에서 멀어지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여기서 누가 각각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을 표상하는지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 해도) <운디네>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도식화할 위험이 있다.

그보다 내게 더 관심을 끄는 것은 페촐트가 이 잃어버린 꿈을 이야기하기 위해, 그리고 그것을 지금의 베를린에 다시 이어붙이기 위한 영화적 시도들이다. 이러한 면에서 운디네가 도시 개발 관련 역사가로서 박물관에서 베를린의 역사를 관객에게 들려주는 도슨트로 설정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운디네>는 영화의 상당량을 할애해 ‘습지’ 위에 세워진 베를린의 도시 개발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거대한 조감도 앞에서 그 역사를 설명하는 장면이 길게 삽입되어 있기도 하지만, 훔볼트 포럼으로 재건되는 베를린 궁전에 대한 강의를 준비하는 과정과 이를 크리스토프에게 설명해주는 장면 등 영화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도시 개발의 역사를 들려준다(특히 그녀가 가장 많이 반복하는 대상이 동베를린에 위치했던 베를린 궁(훔볼트 포럼)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사라지고 있는지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다.

영화 속 운디네가 베를린에서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지 못한 존재처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도슨트로서 그녀는 말을 통해서 이 건물과 저 건물, 또는 이 지역과 저 지역을 끊임없이 떠돈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이 사라져가는 도시 개발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그녀가 사는 집(단기 임대아파트)과 기차를 타고 여기저기를 오가는 잦은 동선의 이동, 그리고 그녀의 집 안에서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기차 소리 등은 제자리를 찾지 못한 그녀의 처지를 표상한다. 운디네가 사라진 뒤, 그녀를 찾아다니는 크리스토프의 동선 역시 마찬가지다. 운디네가 살던 집은 낯선 이들이 점령했고, 그녀와 함께 일하던 동료 역시 그녀의 행방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그렇게 운디네는 베를린에서 지워진다. 크리스토프가 확인하는 것은 운디네의 부재다.

비극적 신화를 닮은 베를린의 역사

<운디네>에서는 무언가 계속 부서지고 또 부서진다. 물의 세계가 투명한 표면을 깨트려야만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운디네와 크리스토프의 첫 만남에서는 수족관이 부서지고, 산업 잠수사의 조각상이 떨어져 부서지며, 와인잔이 깨져 벽에 얼룩을 남긴다. 부서지는 것은 사물만이 아니다. 운디네와 크리스토프 역시 부서지는 것은 마찬가지다(베를린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운디네>가 이처럼 부서지는 이미지를 끌어들이는 것이 결국은 부서지고 말 연약한 세계의 운명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비극의 운명으로 이끌어가려는 불길한 징조 앞에서 어떻게 그 부서지는 것들을 지켜내야 하는가(또는 그 운명을 어떻게 끊어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쪽에 가깝다고 느꼈다. 운디네와 크리스토프가 카페의 수족관 앞에서 처음 만나는 장면을 보라. 그녀가 카페로 들어설 때, 카메라는 큰 수족관 건너편에서 그녀의 모습을 담는다. 그러니까 물속으로 되돌아갈 운명의 운디네. 요하네스가 자신을 기다리지 않고 떠난 것을 알게 된 운디네는 어디선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뭔가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사운드가 화면을 장악한다. 이 장면은 배신한 남자를 죽이고 다시 물의 세계로 돌아오라는 명령일 수도 있고, 비극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크리스토프와 운디네의 만남을 예고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 이 장면은 그 이상이다. 불길한 운명의 분위기가 운디네를 휘감을 때 출현한 크리스토프는 이 불길한 징조와 대결하는 듯한, 또는 그 분위기를 몰아내기 위해 출현한 듯한 느낌을 준다. 수족관이 부서지고 두 사람이 바닥으로 넘어지며 물을 뒤집어쓴 장면은 물에서 표류하던 두 사람이 육지에 도착해서 정신을 차리는 것처럼 연출하려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크리스토프는 그녀의 몸에 박힌 유리를 빼준다. 운디네의 살을 파고든 파편, 그리고 그것을 꺼내주는 크리스토프의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간파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운디네>는 운명론적인 신화의 길을 따라가면서도 그것에 순응하기보다는 이를 최대한 뒤집으려 한다. 그것이 운디네가 자신의 죽음으로 크리스토프를 깨우는 이유다. 그렇게 페촐트는 베를린에 드리워진 불길한 운명과 싸우려 한다. 신화의 멜로드라마적 비극은 베를린의 역사 속에 그렇게 붙어 있다.

유령의 세계, 신체 없는 시선

<운디네>의 엔딩은 ‘신체 없는 시선’의 시점숏이다. 페촐트는 몸을 잃고 오로지 시선만이 남은 운디네의 ‘시점’에 우리가 자신의 시선을 맞추기를, 그렇게 이 영화를 기억하기를 원한다. 그러고 보면, <운디네>는 영화의 시작에서부터 반복적으로 운디네의 시점숏을 보여준다. 요하네스로부터 이별을 통보받은 운디네는 그에게 기다리라 말하며 박물관으로 향한다. 빠르게 걷던 운디네가 시선을 돌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요하네스를 흘깃 바라볼 때, 페촐트는 이 시선을 그녀의 시점숏으로 담는다. 그리고 강의를 마친 운디네가 카페로 되돌아올 때 (첫 번째 시점숏과)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며 빈 테이블을 바라보는 시점숏이 다시 사용된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요하네스는 운디네와 우연히 마주친 뒤 그녀를 찾아온다. 운디네가 그런 요하네스를 만나기 위해 걸어가는 장면에서 세번째 시점숏이 다시 한번 사용된다. 흥미로운 것은 그다음이다. 다시 만나자는 요하네스에게 운디네는 아무 말 없이 미소로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박물관으로 향한다. 그런데 이때 시점숏의 주체는 운디네가 아니라 그녀를 바라보는 요하네스다. 더이상 운디네는 요하네스를 흘깃거리지 않는다. 그녀의 발걸음은 단호하다.

<운디네>에서 바라본다는 것, 또는 시점숏은 사랑의 징표다. 또는 그 감정이 남긴 잔여물의 증거일 수도 있다. 반대로 말하자면,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은 절연의 징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운디네가 물로 돌아가고 2년의 시간이 흐른 뒤 그녀의 시점숏이 출현하는 방식이다. 건강을 회복한 크리스토프는 다시 물속으로 들어간다. 터빈 수리를 하던 크리스토프의 손에 운디네가 자신의 손을 얹는다. 물 바깥으로 나온 크리스토프는 녹화된 영상 속에서 운디네의 모습을 확인하지만, 그 자리는 텅 비어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크리스토프의 환상이었을까? 페촐트는 다시 한번 유령성을 자신의 영화에 끌어들인다. 그는 자신의 영화에서 현실과 환상, 신화와 역사, 실재와 가상을 굳이 구분하려 하지 않는다. 그에게 그것은 개념적 대립일 뿐이다. 이들이 한데 뒤섞여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는 그의 영화적 세계는 메기 ‘군터’처럼 개념적 규정을 비켜서고, 그럴수록 그의 영화는 유령에 가까워진다.

<운디네>에서 이러한 유령성이 빛을 발하는 몇몇 장면이 있다. 대표적인 장면이 운디네가 자신의 운명에 역행함으로써 크리스토프를 살려내는 장면이다. 운디네가 요하네스를 죽일 때 우리는 신화적 운명의 승리를 직감한다. 하지만 <운디네>의 유령성이 빛을 발하는 것은 그다음이다. 운디네가 천천히 물속으로 되돌아갈 때 그녀의 몸이 화면 바깥으로 사라지고 나면 물거품이 ‘아래로 솟구친다’. 그렇게 그녀는 물거품과 함께 자신의 신체를 잃는다. 아름다우면서도 슬프다. 그런데 그녀가 세상에서 자신을 지웠을 때, 뇌사 상태의 크리스토프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깨어난다.

그렇게 운디네는 신화를 뒤집는다. 그래서 ‘신체 없는 시선’으로 구현된 영화의 엔딩, 여전히 그녀가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음을 증명하는 영화의 엔딩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밤중에 일어나 물속으로 들어간 크리스토프는 운디네를 외친다. 볼을 타고 눈물이 흐른다. 지금까지 상처받고 눈물을 흘린 것은 운디네였다. 이 땅에 머물지 못한 채 버림받고 지워져야 했던 운디네를 향한 눈물. 눈물로 눈물에 화답하기. 이때 그에게 누군가의 시선이 다가온다. 시선의 주체를 보여주지 않는, 그렇기에 오로지 바라보는 시선만이 존재하는 ‘신체 없는 시선’. 물로 회귀한 이후, 물 바깥의 운디네는 신체를 잃고 오로지 시선만이 남았다. 물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본다. 물 바깥에서는 신체 없는 시선에 불과했던 그녀의 얼굴이 보인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물 바깥으로 돌려보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한손에 잠수사 조각상을 든 크리스토프가 모니카와 떠나는 모습이다. 페촐트는 이를 운디네의 시점숏으로 담아낸다. 그녀는 여전히 이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어쩌면 페촐트는 이 시선과 우리를 일치시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습지로 시작했지만, 베를린은 그 흔적을 지워버렸다. 그래서 물의 세계는 잃어버리고 지워진 것들로 가득하다. 크리스토프가 물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들 헤집고 들어가, 한때는 역사의 일부였으나 시간 속에 사라지고 감춰져야 했던 것들을 발견하는 산업 잠수사로 설정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페촐트가 원하는 것은 지금의 베를린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지워지고 사라져야 했던 것의 시선을 통해 이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잃어버린 꿈을 다시 품고 이 세계를 바라보는 것, 베를린의 가능성은 바로 그 시선에 있다. 그것이 이 세계에서 몸을 잃고 사라진 운디네의 시선으로 영화를 끝맺는 이유다. “천사는 머물고 싶어 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일으키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 다시 결합하고 싶어 한다. (중략) 반면 그의 앞에 쌓이는 잔해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발터 베냐민의 말이다. 페촐트는 멋들어지게 새롭게 세워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잔해 더미에 불과한 지금의 베를린을 운디네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불안과 마지막 희망을 모두 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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