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를 결산하는 시즌이 돌아왔다. 여러모로 전무후무한 사건들이 많았던 1년인 만큼 어떤 방식으로 2020년을 마무리해야 할지 고민이 깊다. 무엇보다 올해는 관객 개개인이 영화를 관람하는 패턴이 완전히 달라졌다. 영화를 만나는 플랫폼이 그 어느 때보다 다채로워졌으며 영화를 처음 접하는 시기도 개봉 직후부터 수개월 뒤까지 천차만별이었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11월 말부터 집계 중인 <씨네21> 올해의 베스트 영화 설문 방식 또한 변화가 불가피했는데, 필자들로부터 어떤 리스트를 받게 될지 사뭇 궁금하다. 이번호부터 12월 셋쨋주 발행될 송년호까지 이어질 다양한 결산 기사에 주목해주시길 바란다.
연속 결산 기사의 시작을 알리는 이번호 특집의 주제는 ‘배우’다. <씨네21>은 매년 올해를 빛낸 남녀 배우와 신인배우를 선정해 소개하고 있지만 짧은 선정의 변에 배우들의 특별한 순간을 담아내기엔 아쉬움이 크다고 느꼈다. 더불어 코로나19라는 극한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해 동안 치열하게 영화를 관람해온 <씨네21> 기자들 각자의 마음속에 깊은 여운을 남긴 2020년의 얼굴은 누구일지 엿보고 싶다는 개인적인 호기심도 있었다(나는 감히 전세계 영화 매체를 통틀어 <씨네21> 기자들이 올 한해 신작 영화를 가장 열심히 관람했다고 확신한다).
마감을 하며 기사를 읽고 있자니 이 특집을 안 했으면 어쨌을까 싶다. <언컷 젬스>의 애덤 샌들러부터 <맹크>의 아만다 사이프리드, <도망친 여자>의 김민희, <소년시절의 너>의 주동우, <인비저블맨>의 엘리자베스 모스, <트랜짓> <운디네>의 파울라 베어, <라이트하우스> <테넷>의 로버트 패틴슨, <스왈로우> <힐빌리의 노래>의 헤일리 베넷으로 이어지는 기자들의 사심 가득한 에세이는 2020년 시네마의 지형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준 빛나는 순간들과 사람들에 관한 애정 어린 고백으로 가득하다. <퀸스 갬빗>의 애니아 테일러조이, <런> <래치드>의 사라 폴슨,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아델 에넬, <올드 가드>의 샤를리즈 테론, <보건교사 안은영>의 정유미, <콜>의 전종서 등 영화와 시리즈를 통틀어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배우들에 대한 글도 함께다. 한국영화, 해외영화 할 것 없이 신작이 유독 부족했던 한해였다고는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잊지 말아야 할 영화들이 적지 않았다는 걸 이번 특집을 통해 새삼 깨닫기도 했다.
이 지면을 빌려 ‘사심’ 배우를 한명 더 추가하자면 <미나리>의 스티븐 연을 언급하고 싶다. 자신의 뿌리인 한국에서 이창동 감독과 함께 <버닝>을 작업한 뒤 미국으로 돌아가 <미나리>를 통해 타지에 정착하려는 한국인 이민자 가정의 가장을 연기한 스티븐 연은 최근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와의 인터뷰에서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프레임으로 그를 바라보는 이들에게)말과 행동의 의미를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던” 한국에서의 촬영 경험이 배우로서의 자신에게 새로운 장을 열어주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말대로 <미나리>에서 윤여정, 한예리 배우와 함께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이룬 스티븐 연은 한결 유연하고 자유로워 보였다. 황금을 찾아 떠난 서부 시대의 개척자들처럼, 미국 아칸소 시골 마을의 황량한 땅 위에서 수없이 좌절된 꿈을 다시 한번 일으켜 세워보려는 그의 모습은 스크린을 넘어서는 웅장한 존재감으로 다가왔다. 배우의 존재감만으로 영화의 스케일을 확장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 스티븐 연의 활약상에 대한 더욱 자세한 이야기는 2021년 독자 여러분의 즐거움을 위해 아껴두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