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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던 날'이 누아르를 쓰는 방식

[김소희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다른 사람에게서 나를 발견한다는 것, 혹은 타인의 사연에서 나의 내러티브를 읽어낸다는 것. 간단해 보이지만 그리 간단하지 않은 그 행위에 관해 생각했다.

팔 없는 포옹

<내가 죽던 날>

박지완 감독의 <내가 죽던 날>의 중심 서사는 단 한줄로 요약된다. 형사인 현수(김혜수)가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실종자 세진(노정의)에게 감응한다. 세진에 대한 현수의 감정이 서사의 핵심이며, 이것이 설득력 있게 제시될 거라 기대하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현수의 호소력 짙은 말이 감정을 설득하는 주된 요소다. 현수는 세진에게 감응하는 이유를 분명한 어조로 설명한다. 현수는 세진에게서 자신을 본다. 반면 영화에는 현수의 진술을 뒷받침하는 다른 근거가 제시되지 않는다. 관객 쪽에서도 납득할 수 있도록 현수의 시점을 시각적으로 적절히 보충하기 마련이나, 이같은 이미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현수는 CCTV 속 세진의 얼굴에서 자신과 너무도 닮아 있는 표정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진과 현수가 실제로 비슷하게 보이는 장면은 부재한다. 과거 현수가 겪은 일을 통해 세진을 이해하는 상황 역시 미심쩍기는 마찬가지다. 가정과 일에서 동시에 위기를 맞게 된 현수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팔의 마비 증상을 겪는다. 패닉이 된 상태에서 현수는 자신의 팔을 문 사이에 두고 마구 짓이기는 돌발 행동을 한다. 자해행위라 오해를 받은 그 행동이 실은 마비된 팔로 인해 일마저 못하게 되면 죽을 것 같아 살려는 몸부림이었다고 현수는 민정(김선영)에게 뒤늦게 털어놓는다. 현수는 세진이 남긴 흔적에서도 죽으려는 대신 살고자 함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수의 설명을 제외하고는 세진이 남긴 흔적에서 그의 생존을 의심할 만한 결정적인 단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고립의 상황 속에 놓여 있었다. 현수의 말은 어디까지나 세진에 대한 의지적인 해석에 가깝다.

영화에서 제시되는 감정선에 대한 관객의 공감은 오직 현수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이뤄진다. <내가 죽던 날>에 관한 반응에서 세진을 향한 현수의 감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글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영화가 보여주는 위로와 연대에 공감을 표하는 리뷰들이 자주 목격된다. 그것은 캐릭터 현수를 넘어서 배우 김혜수가 관객에게 주는 신뢰감에 기댄 착시 효과에 가깝다. <차이나타운>(2014), <굿바이 싱글>(2016), <국가부도의 날>(2018)까지 김혜수는 최근 영화들에서 후배들과 호흡하며, 다른 세대의 배우를 견인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일면식도 없는 실종자에게 감응하는 경찰을 연기하는 데 있어 배우 김혜수의 존재 자체가 영화의 개연성이라 해도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관객은 파편적으로 드러나는 이들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든 공감하려는 의지를 갖게 된다. 그러니까 영화는 그 자체로 공감의 지표를 내재한 영화이기보다는 바깥에서 공감하고자 하는 의지를 불러오는 영화다. 그 차이는 무엇이며 그것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카메라에 비친 얼굴

현수가 세진에게 감응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CCTV를 통해 세진의 모습을 대면하면서부터다. CCTV 화면 속에서 세진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 카메라를 노려보다가 키를 훌쩍 넘는 위치에 달린 감시 카메라를 향해 뛰어올라 도구를 이용해 카메라의 위치를 점진적으로 조정하기 시작한다. 자신을 관찰하는 누군가에 대한 울분에 찬 표정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세진의 얼굴에서 현수는 무엇을 본 것일까. 그 속에 생생했던 삶이 있었음을 자각한 것일까. 아니면 그 슬프고도 당찬 얼굴에 매혹된 것일까. 소리가 들리지 않는 CCTV 세상 속 세진의 얼굴이 자신에게 어떤 말을 걸어온다고 여긴 것일까. 녹화된 영상 속 세진의 얼굴은 거기에 매혹된 현수로 인해 자신을 발견할 미래의 누군가를 위해 마련해둔 수수께끼의 유언처럼 보인다.

CCTV 속 누군가에게 사로잡힌 현수의 모습에서 다르덴 형제 감독의 <언노운 걸>(2016) 속 제니(아델 에넬)의 모습을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다. 개인 병원 의사 제니는 늦은 시각 병원 현관 밖에 설치된 CCTV에 찍힌 한 소녀의 얼굴을 본 뒤 그 소녀에게 사로잡힌다. 당시 제니는 감정적으로 나약한 인턴을 강하게 교육할 요량으로 진료 시간이 끝난 뒤 울리는 초인종 소리를 외면한다. 얄궂게도 그 시간 벨을 울린 것은 위험에 처한 소녀였고, 소녀는 결국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이후 제니는 마치 탐정처럼 소녀가 누구인지를 증명할 만한 사람들을 찾아다닌다. 제니의 행위는 신원 미상의 소녀를 누군가와 관계를 맺었던 한 사람으로 바꾸기 위한 안간힘이었다. 현수의 행위 역시 누군가의 비극적인 죽음을 삶의 에너지로 전환하려는 노력으로 읽힌다. 제니와 현수의 행동 궤적은 비슷하나 그 동기는 차이가 있다. 제니가 소녀에게 관심을 두는 이유는 죄책감이며, 여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반면 현수가 세진의 삶에 특별히 죄책감을 느낄 이유는 없다. 그저 자신이 잠시 휴직하던 동안 일어난 사건이며, 딱히 애착을 가질 이유가 없음에도 현수는 그 얼굴에 매달린다.

물론 현수가 세진의 상황을 자기화했기에 거기에 애착을 갖게 된 거라 설명하면 그만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남편의 외도로 인한 이혼 위기, 원치 않는 사내 불륜 폭로, 출동 중 일어난 접촉 사고와 팔의 마비 증상으로 점철된 현수의 상황과 아버지의 회사 부도와 비리로 한순간 몰락한 채 홀로 남겨진 소녀의 상황 사이의 간극은 논리적으로 메울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앞서 나는 이 영화가 현수의 진술 외에 감정적인 공감의 지대를 마련하고 있지 않다고 언급했었다. 감정의 차원 대신 영화는 다소 추상적이고도 본원적인 차원에서 현수와 세진의 시간을 암시적으로 연결한다. 이를테면 두 사람의 팔에 난 상처와 같은 것을 통해서다. 현수의 상처가 실은 살아보려는 안간힘이었다면, 세진의 상처는 순천댁(이정은)과 깊은 관계를 만들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된다.

그보다 근본적인 관계를 그리는 것은 물의 이미지를 통해서다. 초반 세진의 실종과 죽음을 암시하는 세찬 바다의 이미지는 교통사고 직후 패닉이 된 현수의 상황으로 점프하듯 연결된다. 인물이 누구인지,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설명되기 전에 제시된 현수의 눈물은 앞서 누군가가 뛰어든 물 이미지의 연장으로 풀이되며, 누군가의 죽음이 현수의 얼굴에서 흐르는 눈물로 이어지는 것 같다. 이때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들리는 ‘왜 이렇게 됐을까’라는 현수의 공허한 읊조림은 현수 자신의 것이 아니라, 방금 유서를 써놓고 바다로 뛰어든 누군가의 내면에 더 적절한 독백처럼 들린다. 현수가 내면으로 침잠함을 보여주는 자기 과잉의 표식이 실은 세상에 일어난 다른 누군가의 고통에 대한 반응으로 여겨지는 장면의 연결이다. 유리창을 통해 들여다보이는 현수의 눈물 맺힌 얼굴은 마치 물속에 있는 것처럼 번져 보이며, 배우 김혜수에게 여전히 발견되어야 할 다른 얼굴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물은 현수와 세진의 연결성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이미지다.

영화는 현수와 세진의 연결성을 드러내는 것을 넘어 관객을 사건의 개입자로 은밀히 초대한다. 오프닝 시퀀스는 인물을 보여주지 않은 채 유서를 쓰는 손과 바닷속으로 뛰어드는 행위를 1인칭 시점으로 체험하게 한다. 이같은 시점숏은 결론적으로 말해 서사상 성립하지 않는, 허구적인 움직임이다. 그것은 오직 관객을 위해서 마련된 숏으로, 1인칭 시점을 통해 자기화를 실행해볼 것을 제안한다. 지금 누군가의 고통을 보라는 외침 대신, 누군가가 되어보라는 집행이다. 추락의 체험은 ‘어쩌면 추락하는 순간 시간을 되돌리고 싶지는 않았을까’ 라는 헛된 상상을 불러온다. 그런 의미에서 강물에 빠진 주인공의 마지막을 의지의 시퀀스로 전환했던 이수진 감독의 <한공주>(2013)가 연상된다. 관객은 환영처럼 들리는 한공주를 응원하는 목소리의 자리에서 한공주의 분투를 묵묵히 바라보는 위치에 놓인다. 반면 <내가 죽던 날>에서 관객의 자리는 차가운 물속이다. 응원이나 안타까움과 같은 감정적 행위가 애초에 불가능한 자리다.

시차적 대면

관객의 자리가 그렇듯, 현수의 수사 역시 기본적으로 무력하다. 수사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이뤄지며, 이미 일어난 사건의 결론을 뒤바꿀 수 없다. 게다가 현수에게 맡겨진 일은 ‘재수사’가 아니라 종결 처리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액션으로서의 수사를 인식하는 대신, 동작이 결여된 일종의 마비 상태로 수사를 보여준다. 수사의 맥락에서 영화의 가장 강렬한 순간은 현수가 수사를 위해 행동을 취하는 순간이 아니라, 아무런 액션을 취하지 않을 때다.

상사로부터 사건 종료 압박을 받은 현수는 늦은 밤 컴퓨터 모니터 속 결과보고서를 바라보며 부동자세로 앉아 있다. 현수는 처리 결과 기입란에 ‘실종’이라고 쓰고는 그 옆에 사망 추정이라는 단어를 썼다 지우며 망설인다. 사건의 결론을 맺는 것을 두려워하는 현수의 모습은 마치 그가 한 사람의 생살여탈권을 쥐기라도 한 것 같다. 그 순간 그는 사건을 담당한 형사가 아니라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처럼 보인다. 작가는 기본적으로 인물을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다. 작가의 손에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사라지며 누군가는 살아남는다. 현수는 영화 속 인물의 운명을 두고 고민하는 작가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일까.

행위의 측면에서는 무력하나, 무언가를 보는 데 있어 현수는 비상한 능력을 발휘한다. 현수는 시간을 되돌려 세진을 만날 수는 없지만, 자신이 없었던 시간에 마치 자신이라도 꼭 그랬을 방식으로 세진을 돌본 순천댁의 비밀에 다가서게 된다. 현수는 철저히 카메라에 찍히거나 드러난 흔적을 통해서만 세진과 만날 수 있었다면, 순천댁은 보이는 것 바깥에서 세진과 소통해왔다. CCTV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던 세진은 카메라 속에 들어올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적절히 구분한다. 그 중 순천댁과의 관계는 그가 철저히 카메라 밖에 위치시켰으며 그 때문에 흔적을 매개로 한 수사의 그물망에 걸리지 않는다. 불의의 사고로 목소리를 잃은 순천댁은 입술의 움직임이나 고갯짓 등으로 타인과 소통해왔다. 순천댁의 표현과 상대방의 해석 사이에서 약간의 시차가 발생함은 물론이다. 수사 과정에서 만난 현수와 순천댁의 소통 역시 그렇다. 순천댁은 현수의 질문에 미리 준비된 노트에 글씨를 적어 대답하고, 현수는 이것을 읽고 여기에 반응한다.

말 대신 활자를 통한 소통과 그사이에서 생성되는 짧은 휴지기는 영화 속에 일종의 무드를 만든다. 어떤 일에 호들갑스럽게 즉각 반응하기보다는 덤덤하고도 의연한 순천댁의 대처법은 고립된 섬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영화가 고립된 지역의 토착 주민들을 재현해왔던 방식을 뒤집는다. 순천댁은 지역어를 사용하는 순박하거나 의뭉스러운 집단으로 환원되지 않는 개인이다. 순천댁의 과묵함은 충분히 비밀스러우면서도 미스터리를 가장하는 기색이 없고, 생활감이 묻어나면서도 어딘가 다른 지점을 가리킨다.

순천댁은 세진과의 관계에서 전개된 불가능해 보이는 사건이 가능했음을 믿게 하는 중요한 인물이다. 현수와 순천댁은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서로 비슷한 것을 느끼고, 느낀 바를 실행한 하나의 쌍이자, 최고의 팀이다. 현수가 사건 바깥에서 세진이 알을 깰 수 있도록 도운 해석의 힘이라면, 순천댁은 내부에서 세진이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을 도운 실제의 힘이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이 서로 마주 섰을 때, 그 장면은 이상한 공명을 불러온다. 순천댁은 존재 자체로 말 없는 소통이라는 영화적 상태를 가리킨다.

마을에 다시 나타난 현수를 보고 사태를 직감한 순천댁은 체념한 듯 담담한 모습을 보이지만, 현수는 그런 순천댁의 감정을 모른 척한다. 영화에서 진실은 수사 맥락 바깥에 있다. 윤종빈 감독의 <공작>(2017)에서 정치적인 맥락을 넘어 박석영(황정민)과 리명운(이성민)이 우정의 신호를 주고받던 순간처럼 현수와 순천댁은 두 사람만 아는 어떤 말 없는 신호를 주고받는다. 부둥켜안거나 손을 잡거나 하는 등의 어떠한 접촉도 없었지만, 그 순간 둘은 누구보다 진한 스킨십을 하는 것 같다. 그것은 팔이 없는 상태에서 서로 마주 보며 눈으로 하는 포옹이다. 두 사람은 섬마을의 작은 포구를 누아르의 공간으로 이행시키며, 다른 공간에 존재하던 불가능한 시간대가 지금 여기에 기적적으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음을 예감케 한다.

사건에서 풍경으로

영화의 클로징 시퀀스는 앞선 장면과의 연장선에서 불가능한 시공간을 펼쳐 보인다. <사냥의 시간>(2020)과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2019) 등 최근 한국영화에서 마지막 장소를 바다 너머의 어딘가로 설정해, 새로운 시작을 위한 배경으로 이국적인 풍광을 제시하며 마무리되곤 했다. 어쩌면 <내가 죽던 날>의 마지막 역시 어느 정도는 그렇게 보인다. 세진은 타국에서 바다에 인접한 야외 테라스가 있는 식당의 종업원으로 일하며 새로운 삶을 꾸려간다. 과감하게 복귀를 포기하고 여행을 선택한 현수는 세진이 일하는 식당에 손님으로 찾아간다. 세진은 현수를 야외 테라스로 안내하고 둘은 짧은 순간이나마 한국 사람이라는 공감대를 나눈다. 지금 막 일을 마친 세진에게 현수는 합석을 제안한다. 이들은 잠시 서로 마주 앉아 풍광을 바라본다. 실제인지 누군가의 환상인지 분간되지 않는 이 장면은 익숙한 클리셰처럼 보인다. 그러나 단지 클리셰의 일종이기보다는 처음부터 예정된 어떤 자리처럼 보인다. 두 사람이 앉은 자리는 사건이 일어났던 섬의 절벽을 얼마간 연상시킨다. 이들이 마주한 풍경은 세진이 남긴 유서 속 한 문장을 떠올리게 한다. ‘해 지는 풍경 말고는 아무것도 아쉽지 않다’는 문장은 어쩌면 죽을 준비가 됐다는 말이 아니라, 반대로 해 지는 풍경을 위해서 살 수 있다는 말도 되지 않을까.

다시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를 복기해보자. 영화의 오프닝이 보여주는 이미지들은 하나의 사건을 구성했다. 태풍이 접근 중이라는 뉴스 음성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방 안에서 누군가가 유서를 쓰고는 인근 해안 절벽에서 투신한다. 사건의 배경이 되는 물은 누군가의 삶을 삼켜 그 안에 존재하던 모든 감정과 시간을 비밀로 만들어버리는 세차고도 가혹한 물이었다. 이 물은 다시 현수의 눈에 고인 눈물로 이행하며 삶에 지친 자의 우울을 상징하는 물질이 되었다.

영화의 결말은 하나의 사건과 고통으로 환원된 물의 이미지를 변화하려는 욕망을 보여준다. 물은 이제 죽음과 우울의 지표가 아니라 완전한 감상의 대상이자 풍경 이미지가 된다. 사건 이미지로서의 바다를 비추며 시작한 영화는 이제 사건의 맥락으로부터 놓여난, 되찾은 풍경을 보여준다. 바다의 위치에서 두 사람을 마주 보던 카메라는 무한히 계속될 것처럼 후진하며 두 사람에게서 멀어진다. 관객은 이들과 함께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바라보는 풍경 속에 있다. 이제 관객은 이입할 누군가를 탐색하는 행위로부터 놓여난다. 두 사람을 만나게 하는 것으로서 본래의 소임을 다한 물-이미지로서의 카메라는 두 사람을 짐짓 모른 체라도 하듯, 그곳을 유유히 빠져나오는 최후의 공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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