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멋쟁이 아니랄까봐 단정한 정장 차림에 노란색 나비넥타이와 알록달록한 운동화가 눈에 들어오는 믹스매치다. 코로나19도 김조광수 집행위원장이 이끄는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의 열정을 막을 수 없다. 11월 5일부터 11일까지 일주일 동안 CGV명동역 씨네라이브러리에서 열리는 올해 영화제는 개막작인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썸머 85>를 포함해 42개국 105편의 퀴어영화를 상영한다. 코로나19 상황인데도 지난해보다 상영작 숫자가 늘었다.
마침 첫 장편영화 <두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이하 <두결한장>) 이후 8년 만에 연출한 신작 <메이드 인 루프탑>이 폐막작으로 공개된다. 영화제 집행위원장이자 감독이자 제작사 청년필름 대표이자 한때 여의도에 잠깐 발을 들였던 그와 오랜만에 긴 대화를 나눴다.
-<메이드 인 루프탑> 후반작업은 얼마나 진행됐나.
=후시녹음을 끝냈고, CG, 음악, 사운드를 확인했으며, 11월 2일에 파이널 믹싱한다. 개막식 전에 다 끝내려고.
-촬영 현장엔 왜 안 불렀나.
=그러잖아도 연락하려고 했는데 제작이 순식간에 진행돼 여유가 없었다. 염문경 작가가 시나리오를 빨리 썼고, 캐스팅도 빨리 성사됐으며, 김승환 대표가 제작비를 빨리 마련했다. 운이 좋았다.
-첫 장편 <두결한장> 이후 8년 만의 연출작이다.
=전작을 어렵게 만든 뒤 다음은 상업영화에 도전하고 싶었다. 두번 시도했는데 모두 잘되지 않았다. 하나는 브로맨스가 강한 작품이었는데 투자가 잘되지 않았고, 또 하나는 이성애를 그린 멜로드라마였는데 캐스팅이 되지 않았다. 이제는 영화를 못 찍나 하던 차에 김승환 대표가 “퀴어영화라도 다시 해보면 어떤가”라고 제안하면서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이야기를 어떻게 구상하게 됐나.
=게이 커뮤니티에서 만난 20대들이 자신의 연애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다. 다음 영화에는 자신의 사연도 넣어달라면서. 그렇게 들었던 얘기 중에서 몇 가지를 추린 게 이별을 하는 남자(하늘)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 남자(봉식)를 교차로 보여주는 현재의 이야기였다.
-그들이 함께 사는 곳이 한국적인 공간인 옥탑방인데.
=<기생충>이 반지하를 보여주었다면 우리는 한국의 가난한 청년들이 옥탑방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보여주려고 했다. 제작한 영화 <악질경찰>에서 단역을 맡았던 염문경 작가에게 머릿속에 있던 이미지를 얘기해주면서 써달라고 부탁했다. EBS <자이언트 펭TV 펭수>의 메인 작가이기도 한 그가 쓴다면 재미있을 것 같았고, 염 작가가 한달 만에 시나리오를 내놓으면서 빨리 진행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봤나.
-귀여우면서도 인물을 따스하게 바라보는 게 인상적이었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기성 세대로서 20대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또 그들이 안쓰럽기도 했다. 하고 싶었던 일을 다 했던 나의 20대와 달리 지금 젊은 세대들은 학교도, 술집도, 클럽도 못 가는 등 할게 없지 않나. 이들을 응원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물론 50대인 내가 20대를 응원하는 영화를 만드는 게 타당한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도 했다. 꼰대의 시선으로 20대를 그려내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염문경 작가가 잘 써주었다. 현장에서는 20대 배우들에게 ‘나는 바라보는 느낌으로 너희들을 담을 테니 너희는 자유롭게 뛰어놀았으면 좋겠다’고 얘기하면서 찍었다.
-퀴어영화이기에 캐스팅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땠나.
=다행히 배우들에게 한번도 거절당하지 않았다. 캐스팅 때문에 상처받지 않는 요령도 생겼고. 정휘씨는 유명한 뮤지컬 배우인데 예능 프로그램 <팬텀싱어>에 출연해 <알라딘> O.S.T인 < Proud of Your Boy>를 부른 걸 보고 ‘언젠가 같이 작업해야지’ 마음먹었었다. (이)홍래씨는 서태지 헌정 앨범에서 방탄소년단이 부른 <Come Back Home>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한 모습이 강렬했다. 그간 예쁜 남자들과 작업하다가 홍래씨 같은 인상이 강렬한 배우와 함께하고 싶었다. (곽)민규씨는 오랜만에 만나니 코로나19 때문에 운동을 하지 못해 살이 확 찐 상태더라. 게이 친구들이 늘 내 영화에는 날씬한 꽃미남만 나온다고 불만을 제기했었는데 곰 같은 캐릭터도 나오면 좋겠다 싶었다. 옥탑방 건물에 사는 아줌마를 연기한 이정은씨는 한양대 후배로 출연을 부탁했다.
-오랜만에 촬영 현장에 나가니 어떻던가.
=제작자로서 현장을 너무 자주 찾으면 감독에게 눈치주는 것 같고, 반대로 너무 안 나가면 신경을 안쓰는 것 같다.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면 감시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고, 배우들과 대화를 나누면 놀러왔다고 눈치받기 일쑤다. 여전히 제작자로서 현장을 찾는 건 마음이 편치 않은데 감독으로서 중심이 되어 현장을 끌고 가보니 몸은 고되지만 정말 재미있었다.
-자신이 연출한 영화를 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한 이유는 뭔가.
=김승환 프로그래머가 선정했는데 그도 자신이 제작한 영화를 폐막작으로 선정한 셈이다. (웃음) 전 세계적으로 감독이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는 영화제가 더러 있는데, 그런 영화제에 가면 집행위원장이 직접 연출한 영화를 폐막작으로 공개하곤 한다. 보통 영화감독들은 자신의 영화를 보다 큰 영화제에 가서 프리미어로 상영하고 싶어 하지 않나. 하지만 집행위원장으로서 내가 운영하는 영화제를 두고 다른 데에 가기보다 내 영화제에 힘을 실어주고 싶은 거다. 김승환 프로그래머가 빨리 찍어서 괜찮으면 폐막작으로 틀면 좋겠다고 얘기 했었는데 폐막작으로 선정한 걸 보면 다행히 나쁘진 않았나보다.
-올해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는 42개국 105편의 퀴어영화를 상영한다. 지난해보다 상영작이 늘었다.
=10주년을 기념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호주와 뉴질랜드를 포함한 아시아·태평양 지역 퀴어영화제들의 연합체가 있는데 그 총회를 영화제 기간 동안 서울에서 열 계획이었다. 마스터클래스도 준비했었고. 하지만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모두 실행할 수 없었다. 코로나19 시대에 영화제를 운영하는 게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퀴어영화제인 만큼 영화제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영화들을 더 많이 보여주고 싶었다. CGV아트하우스의 협조 덕분에 명동역 씨네라이브러리 5개관 모두 사용할 수 있다. 방역 때문에 평일 하루 3회차, 주말 4회차씩 상영한다. 상영관이 늘면서 상영작도 덩달아 늘었다.
-상영작 중에서 추천하고 싶은 작품을 꼽는다면.
=한국영화 <정말 먼 곳>.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이기도 한데, 강원도 양 목장에서 딸을 키우며 사는 게이 청년의 이야기다. ‘한국판 <브로크백 마운틴>’이라 부르고 싶을 만큼 촬영이 시원하다. 그간 한국 퀴어영화들을 보면서 답답한 마음이 들곤 했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 속이 뻥 뚫린 느낌을 받았다. 개막작인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신작 <썸머 85>도 너무 좋다. 1985년 프랑스 남부 해안 도시를 배경으로 한 청소년들의 이야기다. 오종이 나이가 들면서 청소년을 바라보는 시선이 성숙됐고, 촬영 또한 좋다. 1985년 팝 음악으로 구성된 O.S.T도 귀를 즐겁게 한다.
-지난 10월 25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가 아시아에서 가장 큰 성소수자 영화제로 발전하고, 궁극적으로 성소수자들이 프라이드를 가질 수 있는 영화제가 되고자 한다”고 포부를 밝혔는데.
=전작 <두결한장>을 만든 뒤 아시아의 많은 퀴어영화제를 찾았는데 그곳에서 젊은 퀴어영화 감독들을 많이 만났다. 이들은 서울이라는 도시에 로망을 가지고 있었고, 서울에서의 LGBT의 삶에 대해 무척 궁금해했다. 아시아의 재능 있는 영화인들이 자신이 만든 영화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하고 싶은 것처럼 우리도 영화제를 잘 키워서 아시아 지역의 퀴어 영화인들이 찾고 싶게 만들어야겠다 싶었다. 다른 나라에 비해 경제적 여유를 갖춘 만큼 영화진흥위원회의 아세안 사업과 연계해 아시아 퀴어 영화인들에게 제작 지원을 해준다거나 시나리오 멘토링을 해주는 등 여러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아시아 퀴어영화의 허브가 되는 게 목표다.
-지난 10년 동안 영화제를 운영하면서 고민했던 것들을 하나씩 실행에 옮기는 셈이다.
=집행위원장으로 얼굴마담에 불과한 반면, 실질적인 일들은 김승환 프로그래머가 다 하고 있다. 그는 일 욕심이 많고, 정말 성실하다. 덕분에 성과를 조금씩 내는 것 같다.
-지난 총선은 왜 출마하지 않았나.
=총선에 출마할까 싶어서 올해 초 정의당에 입당했는데 막상 여의도에 가보니 나는 정치할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한달도 채 지나지 않아 느꼈다. 한달이 뭐야, 한 일주일 지나니까 정치하면 안되겠다 싶었다.
-어째서인가.
=영화인들도 주목받고 싶은 마음이 큰데 정치쪽은 그 마음이 영화계보다 10, 20배 더 크더라. 나쁜 의미로 하는 얘기가 아니고, 권력에 대한 욕망이 어마어마했다.
-그게 부담스러웠나보다.
=그들은 별거 아닌 일일 수 있지만, 나는 계속 상처를 받더라. 상처받는 일의 연속이었다. 정치하고 싶은 욕망이 커서 이곳에 온 게 아니다보니 잘못하다간 큰 상처를 받고 끝나겠다 싶었다. 차라리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열심히 하면 했지 정치는 나와 안 맞는구나 싶었다. 잘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한동안 영화인과 정치인 사이에서 고민이 많았다고 들었다.
=그래서 주변에 조언을 많이 구했다.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가서 버텨라. 안되면 4년 뒤에 돌아오면 되지 않나’라고 했고, 또 다른 분들은 ‘거기 가서 이상해지지 말고 영화를 해라’고 말씀해주시기도 했다. 후자가 좀더 많았다.
-아직 정의당 당원인가.
=그렇다. 출마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리니 자연스럽게 그쪽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노회찬재단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던데.
=신작 촬영과 후반작업 때문에 열심히 활동하지 못해 면목이 없다. 생전 노회찬 의원님이 성소수자 인권을 향상시키는 의정 활동을 많이 하셨다. 내 결혼식에도 참석해주셨고. 나를 이사직에 임명한건 재단이 노 의원님이 성소수자 인권과 관련된 활동을 많이 하셨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기억하게 해주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청년필름 대표로 <와니와 준하> <분홍신>을 함께 작업한 김용균 감독의 신작을 준비하고 있다고.
=김용균 감독과 임범 작가와 함께 준비하는 프로젝트가 있는데 그건 1949년 서울이 배경이라 제작비 규모가 커서 잠깐 뒤로 미뤘다. 그래서 김용균 감독과 공포영화 한편을 준비하고 있는데 현재 캐스팅 중이다.
-젊은 감독들과는 작업 안 하나.
=신인 배경헌 감독과 <도원랜드>를 준비하고 있다. 50대, 40대, 20대 여성 셋이 은행을 터는 영화다. 하드보일드하면서도 유쾌한 분위기로, 현재 캐스팅을 하고 있다.
-촬영을 끝낸 뒤 개봉을 앞두고 있는 <출장수사>(감독 박철환, 출연 배성우·정가람·이솜)는 모니터 시사점수가 높게 나왔다고.
=그래서 원래는 배급사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가 11월 개봉을 할까 했는데 코로나19 때 개봉하기 아까워 좀더 지켜보기로 했다. 충청도 형사들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서울로 출장가는 이야기다.
-<조선명탐정> 시리즈 같은 흥행작을 만들어 돈을 벌어야 할 것 아닌가. 더군다나 산업이 급변하고 있지 않나.
=<출장수사>에 흥행을 기대하고 있다. 보다 많은 관객을 타깃으로 한 기획들을 하면서 청년필름의 취향이 고스란히 담긴 영화들을 만드는 거다. 최근 많은 영화들이 OTT 문을 노크하는 걸 지켜보면서 <조선명탐정>의 다음 시리즈를 OTT용 드라마로 제작할 계획이다.
-결혼 생활은 잘하고 있나.
=배우자와 성격도, 취향도 다른데 살면서 같은 곳을 바라보는 느낌이 들어 잘 맞는 것 같다. 그가 옆에 있어 많은 도움을 받는 것 같다. 점점 좋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고.
-배우자로서 10점 만점에 몇점이라고 생각하나.
=나는 그에게 5, 6점? 그보다 인생의 선배이기도 하고, 영화인 선배이기도 해서 그런지 집에서 나는 꼰대 같은 느낌이 있을 거다. 그러지 말아야지, 먼저 배려해야지 하는데도 마음처럼 잘 안된다. 김승환씨는 내게 9점이다.
-승환씨는 김조광수 감독이 자신에게 8점이라고 하더라.
=정말? 거봐, 정말 훌륭한 사람이라니까.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