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원 감독의 영화는 세다. 그의 다섯 번째 장편영화 <젊은이의 양지>는 채권추심 콜센터에서 실습생으로 일하던 19살 준(윤찬영)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벌어지는 비극을 담고 있다. <젊은이의 양지>는 신수원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어둡기로 유명한 <명왕성> <마돈나>의 자장 아래 놓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명문사립고 스터디 안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다룬 <명왕성>과 교통사고로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만삭 임신부에게서 장기를 빼돌리려는 재벌 2세의 이야기인 <마돈나>만큼 어둡고 폭력적이며 무겁다.
무엇보다 ‘신수원 감독스럽다’. <젊은이의 양지>로 일본 아이치국제여성영화제, 체코 프라하국제영화제, 홍콩국제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등을 돌고, 이제 관객을 만날 채비를 마친 신수원 감독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구의역 김군 사건을 보고 <젊은이의 양지>를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 수리 작업을 하던 김군이 사망한 사건이 큰 충격이었다. 김군의 나이가 19살이란 사실이 오랫동안 내 안에 남았다. 19살은 문턱만 넘으면 스무살인 성년으로 가는 나이다. 미성년의 끝자락이다. 즐겁고 행복을 맛봐야 하는 나이인데, 김군은 그런 나이에 일하다 죽은 것이다. 그 사실에 계속 마음이 아팠다. 그러던 중 콜센터 여직원 자살 사건을 취재한 다큐멘터리를 봤다. 그의 나이도 19살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반복되는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지만, 아이의 시점으로 영화를 만드는 건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세연을 떠올렸다. 세연이란 중간 관리자는 이와 비슷한 일이 터졌을 때 어떻게 받아들일까 생각했다.
-그럼에도 영화 초반에는 마이스터고 출신 실습생인 준에게 감정이입해서 영화를 따라가게된다.
=전작인 <명왕성>을 사실 마이스터고에서 촬영했다. <명왕성>의 준이가 만약 마이스터고에 진학해서 전공과 관련 없는 곳에 실습을 나갔다면 어떤 모습일까 유추하면서 캐릭터에 접근했다. 실제로 마이스터고에 가면 영상이나 멀티미디어반이 많기 때문에 관련 전공을 택한 아이로 설정했다. 마이스터고 선생님들을 직접 만나본 결과, 아이들이 전공과 관련 없는 단순노동 현장으로 실습 나갈 경우 좌절을 느껴 그만두려고 하고, 그만두면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
-영화 중반부터는 준이 처한 어려움이 폭력적인 상황으로까지 치닫는다. 일상적인 단계를 넘어서 너무나 많은 일이 동시에 벌어진다. 끔찍한 상황을 재현하는 데에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시나리오 단계에서 비슷한 사례를 취재하면서 알게 된 두 사건을 준의 상황으로 만들었다. 하나는 20대 초반의 여성이 추심을 하러 갔다가 돈을 주겠다고 부른 남성이 하의를 벗고 나와서 도망친 사건이다. 지금은 추심으로 가정을 방문하는 게 불법이라 과거에 벌어진 일인데, 듣고 나서 큰 충격을 받았던 사건이다. 또 하나는 카드 대금 연체자가 가족들에게 알리겠다는 카드 추심 회사의 전화를 받고 다음날 자살한 사건이다. 시나리오를 준비하면서 두 사건을 알게 됐고 실제로 누군가에게는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준이 자살까지 생각한다면 그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죽을까. 내 존재를 잃고, 스스로가 부끄러워서 죽겠다는 느낌이 들 정도는 어떤 것일까 상상하면서 시나리오를 썼다. 물론 촬영을 다 하고 나서도 관객에게 보여줄 것인가 말 것인가로 고민이 많았다.
-결국 보여주기로 결정한 이유는 뭔가.
=준이 여성 체불자에게 돈을 받으러 갔다가 성희롱을 당하는 장면을 철거촌에서 찍었다. 쓰레기가 쌓인 빈집을 치우고 촬영을 완료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준이가 골목을 도망치는 신을 추가 촬영하기 위해 다시 그곳을 찾았는데 경찰이 근처에 폴리스 라인을 쳐놨더라. 한 남성이 신변을 비관해 연탄을 피우고 자살했다고 하더라. 무서웠다. 이상하고 묘한 느낌을 받았다. 하루 사이에 이렇게 사람이 죽어나가는 게 현실이구나 싶었다. 현실을 감출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했지만 결국 관객에게 그대로 보여주기로 했다. 촬영 현장에서 벌어졌던 연탄 자살 사건이 없었다면 편집 과정에서 들어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데뷔작 <레인보우>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 주부를 주인공으로 삼아, 막막한 현실에서도 밝은 분위기를 발산하는 영화였다. 하지만 이후 만든 <명왕성> <마돈나>, 그리고 <젊은이의 양지>에는 모두 죽음의 기운이 강하게 드리워져 있다. 신수원 감독의 영화에서 죽음의 이미지가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확실히 죽음이란 소재를 계속 다루고 있긴 하다. 내 영화에 죽음이 많이 등장하는 데에는 20대 때 죽음의 직전까지 갔다가 깨어난 사건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20대 초반 시위 중에 백골단에 맞고 기절한 적이 있다. 특별히 운동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시위에 나갔다가 쓰려졌다. 사람들이 내 위로 차곡차곡 쌓이면서 계속 맞았다. 그래도 도망간 사람은 도망가는데, 나는 끝까지 맞았다. 눈쪽을 맞아서 당시 의사가 실명할 수 있다고 얘기했을 정도로 중상을 입었고, 쇄골도 부러졌다. 다행히 눈이 회복됐지만 지금도 시력이 나쁘다. 2개월 정도 지나고 몸은 다 나았지만, 그 트라우마가 10년 가까이 가더라. 이젠 어둠의 세계에서 벗어나 밝은 세계, 양지로 가고 싶다. (웃음)
=김호정 배우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얼굴을 지녔다. (웃음) <마돈나> 때 포주 역할을 하겠냐고 제안해서 만났는데 잠깐 나오는 역할인데도 불구하고 열정적이었다. 세연이란 인물을 생각했을 때 카리스마가 있었으면 좋겠어서 그를 떠올렸다.
-세연이 준에게 전화로 추심을 명령하는 장면에서 배우 김호정이 좋은 어른의 모습을 벗어던지고 강하게 명령한다.
=가라앉는 냉정한 목소리로 할까, 큰 소리를 낼까 고민이 많았다. 세연은 일터에서는 콜센터장이긴 하지만 집에 오면 엄마고, 시장에 가면 아줌마다. 준과 통화 직전에 딸과 싸웠기 때문에 칼칼한 아줌마스러운 톤으로 갔다. 그게 정직한 거라고 생각했다.
-영화 중반 이후 등장하는 명호(최준영)는 독특한 캐릭터다. 모든 미스터리를 만들고 세연을 끌어들인다.
=세대론적으로 보자면, 명호는 20대와 40대 사이에 낀 30대다. 20대를 통과하고 오히려 제일 자유로운 인물이다. 준이 추심을 위해서 전화를 걸었을 때 명호가 예상치 못하게 “애쓰지 마요”라고 말하는 대사를 쓰게 됐다. 쓰고 나니 명호 캐릭터가 멋있어 보였고 그래서 콜센터로 엮인 준과 세연의 상황에서 벗어난 객관적인 인물로 설정했다. 명호가 덫을 놓아 세연을 불러들이는 건 단순히 갈취나 협박이 아니라 “너는 왜 그래?” “왜 너는 사과를 안 해?”와 같은 오히려 단순한 질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좋은 사람이 되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친다. 명호만이라도 그런 걸 바라볼 수 있는 사람으로 설정하고 싶었다.
-번외 질문이다. <명왕성>에 이어 <젊은이의 양지>의 주인공 이름을 준이라고 지었다. 제작사 이름 역시 준필름인데.
=준이란 이름이 너무 좋다. (웃음) 준자 붙은 명칭은 이상하게 다 좋다. <레인보우> 개봉을 준비하면서 영화사 이름이 필요해서 급하게 준이라 지었는데, 그 이후로도 계속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