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마주할 수 있는 공간도, 여유도 사라져만 가는 코로나19 시대. 제22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서로를 보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영화를 만나 다시금 서로를 기억해낼 수 있기를 기원하는 이 문구는 개막작 공모를 통해 먼저 실현되었다. 박광수 집행위원장은 “여성 영화인들을 격려하고 응원하면서 서로가 있음을 확인하는 일, 그리고 코로나19 시대의 경험을 아카이빙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1분 내외의 영상 50편을 모집했다고 밝혔다. 이 프로젝트는 공모 2일 만에 조기 마감되며 영화를 통한 연결에 목마른 이들과 공명했다. 뜨거운 반응을 불러온 공식 트레일러 <탈출: Send me out>을 만든 이옥섭 감독 또한 슬로건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좋아하는 뮤지션(황소윤)과 배우(전소니)를 마주 보게 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이제 관객이 영화와 눈 맞출 차례다. 9월 10일 목요일부터 16일 수요일까지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과 독립영화 전용관 인디스페이스에서 개최되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이번에도 세계 각국의, 다양한 정체성과 고민, 꿈을 가진 여성들의 이야기를 준비했다. 쟁점 포럼에서는 군 위안부 운동의 역사에 주목하고, 페미니스트 콜렉티브 섹션에서는 여성 영화사를 다시 쓴다. 홍콩 뉴웨이브를 이끌며 40년간 카메라를 들었던 허안화 감독의 회고전도 열린다. 올해 영화제는 정부의 방역지침에 따라 안전하게 운영하기 위해 만전을 기하는 한편, 개막작, 경쟁부문인 아시아 단편 섹션 작품 다수를 비롯한 상영작 일부를 온라인 스트리밍 플랫폼 웨이브(wavve)에서도 서비스한다. <씨네21>은 33개국 102편의 상영작 중 8편의 추천작과 2개의 특별전을 엄선했다. 제22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기꺼이 귀 기울이고 싶은 이야기를 찾아보기를.
[여성 영화인 지원 프로젝트: 코로나 시대, 서로를 보다]
Mutual Gaze: Women Filmmakers Support Fund
감독 이재은 외 49인┃한국┃55분┃2020년┃개막작
여성 영화인 50인의 1분짜리 단편을 모아 탄생한 영화제 개막작. 코로나19로 인해 자기만의 방에서 창작자로서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여성 창작자들의 모습을 담았다. 영화 속 여성들은 방 안에서 꿋꿋이 홀로 식사하고(<저녁식사2020> <오늘은 뭐했어?>), 차기작을 위해 시나리오를 쓰고(<저녁 식사>), 화상으로 작업을 위한 회의를 이어간다(<얼굴 좀 보고 얘기해봐> <마주 보는 영화를 만들며 마주 볼 수 없다는 것>). 그들은 동료 여성과 연대하고 응원하며(<편집실에서> <근데 우리 영화 찍을 순 있겠지>), 집 안에 갇혀 답답한 마음에 산책을 하고 뜀박질하고 춤도 춘다(<담벼락> <나와의 춤> <코로나 노예> <약하고 강한>). 비록 몸은 묶였지만 여행을 유쾌하게 계획하고(<사다리타기>), 침대에 누워서 물결을 가르고 헤엄치길 꿈꾸는 여성도 있다(<코로나 시대의 수영하는 법>).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인 순간은 여성 영화인들의 방에서 공통적으로 포착되는 풍경인데, 창작을 위해 앉은 책상 부근에는 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영화 포스터들이 자리하고 있다. 영화에 대한 지치지 않는 그들의 사랑이 드러나는 순간으로, 그들의 방이 내 방이고, 내 방이 곧 그들의 방인 것 같은 기묘함이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영화는 코로나19 장기화로 지쳐 있을 여성 영화인들을 응원하고 실질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50인의 창작자에게 100만원의 지원금을 지급하는 프로젝트에 출품한 영화들로 만들어졌다. 정재은 감독이 슈퍼바이저로 참여해 완성됐으며, 9월 13일 오후 8시 문화비축기지에서 무료로 상영된다.
<가만한>
Well-Tempered
감독 손모아, 안정연┃한국┃85분┃2020년┃발견
준서(박수연)는 가랑가랑 수영장을 채운 물에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손가락을 하나씩 대어본다. 물의 표면장력이 손가락을 빨아 당기듯 손가락을 붙든다. 준서가 귀신처럼 피아노 건반을 두드릴 때 손의 감각도 비슷했을까. 평생을 피아노에 몰두하며 살아온 준서는 대학 졸업 후 연주를 그만두고 연습을 하지 않은 지 벌써 몇해가 됐다. 영화는 준서의 불안을 야기한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지만, 준서가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심리적으로 힘들었던 탓에 피아노 대신 수영을 배우며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는 준서가 삶의 메트로놈을 맞춰나가는 모습을 차분히 보여준다. 준서는 생활을 위해 모교에서 행정 조교로 일하며 건반 대신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려 엑셀 작업을 하는데, 엄마(오민애)는 “넌 자존심도 없냐. 누가 너보고 이런 일 하래!”라고 소리를 지른다. 만나는 스승들마다 준서에게 피아노를 다시 쳐보라고 권하지만, 준서는‘어떤 대책을 세우거나 손을 쓰지 아니하고 그대로 있다’는 뜻의 영화 제목처럼 요지부동이다. 그러나 준서의 삶에 천천히 스며들어 불을 댕기는 이가 등장하는데, 연습실에 남아 누구보다 열심히 연주에 몰두하지만 과거 자신과 비슷하게 큰 불안을 느끼는 편입생 수미(이화원)다. 준서는 수미를 작게 응원하면서 수영장 물에 대고, 허공에 대고 손가락을 움직여 피아노를 연주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가만한>은 단국대학교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 손모아, 안정연 감독의 2020년 졸업 작품이다.
<속삭임>
Murmur
감독 헤더 영┃캐나다┃86분┃2019년┃발견
딸에게 보낸 문자엔 답이 없고, 코르크는 와인 병목에 박혀 나올 생각을 않는다. 망치로 병목을 깨서라도 술을 따르는 도나는 외로움에 파묻혀 밤을 보낸다. 날이 밝자 그가 향한 곳은 동물 보호소. 음주운전으로 기소되어 사회봉사를 수행하기 위함이다. 작고 여린 존재들을 돌보며 쓸쓸함을 달래던 그는 수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안락사가 예정된 개를 집으로 데려오고, 그것을 시작으로 도나의 공간에 동물들이 하나둘 늘어난다. 아픈 개를 껴안고 대답 없는 속삭임을 반복하는 인물의 모습은 애달프지만 공허함에서 비롯된 선의로 인해 방치되는 동물들에게는 죄가 없다. 한 인간이 상처를 치유하고자 또 다른 폭력을 자행하는 과정을 건조하게 응시하는 <속삭임>은 그 인간의 자리에 가족과 건강 문제를 안고 홀로 살아가는 중년 여성을 둠으로써 그가 진정 필요로 했던 것이 무엇인지 되묻는다. 캐나다의 신인감독 헤더 영의 첫 장편 연출작으로, 제44회 토론토국제영화제 디스커버리 부문 국제비평가상을 수상했다.
<언제나, 앰버!>
Always Amber
감독 리아 히에탈라, 한나 레이니카이넨┃스웨덴┃76분┃2020년┃발견
사회적으로 부여한 젠더와 스스로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젠더 디스포리아’를 겪는 10대 여성 앰버에 대한 다큐멘터리. 젠더간 경계 없이 사랑하는 논바이너리로 정체화한 앰버는 소꿉친구였으나 이제는 스스로 남성이라고 여기는 친구 세바스티안을 남자 형제처럼 여기며 사랑한다. 그러나 늘 곁에 있던 세바스티안이 앰버의 여자친구인 찰리와 애정 문제로 멀어져가고, 앰버는 5년 전 병으로 잃은 아버지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며, 홀로 남은 엄마에 대한 걱정도 깊어져간다. 앰버의 탄생의 순간과 유년 시절을 담은 홈비디오 푸티지와 현재를 자유롭게 교차시키며, 사회가 정의하는 젠더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머리 염색, 피어싱뿐만 아니라 유방절제술까지 생각하는 앰버는 화려한 모습과 달리 너무나 어렵고 깊은 문제를 안고 있다. “사회가 변하기 전까지 나는 얼마나 많이 바뀌어야 하나.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으니까 나는 나를 변화시킬 수밖에 없다.” 제70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파노라마 다큐멘터리 섹션 초청작.
<내가 죽기 전까지, 사랑>
I Love You I Miss You I Hope I See You Before I Die
감독 에바 마리에 뢰드브로┃덴마크┃76분┃2019년┃발견
쫑알쫑알 말이 많은 미취학 여아 제이드는 유령 소리가 들린다며 집 안으로 숨어든다. 오동통한 뺨과 손발이 온통 새카만 채로 쓰레기 더미로 가득한 벽장 안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하는데 어떤 어른도 제이드를 신경 쓰지 않는다. <내가 죽기 전까지, 사랑>은 미국 콜로라도 스프링스 교외 빈민촌에 살고 있는, 제이드와 어머니 베티, 할머니까지 삼대에 걸친 모녀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텍사스 출신인 베티네 가족은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을 즐겨들으며, 마약을 끊지 못하고, 아이들 교육에 무관심한 빈민이다. 덴마크 다큐멘터리스트 에바 마리에 뢰드브로는 감각적인 카메라로 베티 가족의 일상을 담으면서, 출구 없는 빈곤이 어떻게 대물림되는지를 포착해냈다. 암스테르담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다.
<세계가 깨어져 열릴 때>
The Body Remembers When the World Broke Open
감독 캐슬린 헵번, 엘르 마이아 태일페더스┃캐나다┃105분┃2019년┃새로운 물결
우리는 때로 처음 만난 사람에게 더 솔직해진다. 낯설기에 대담해질 수 있는 자유가 오래 함께했기에 배어나는 편안함보다 큰 용기를 줄 때가있다.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반나절을 보낸 로지와 아일라도 서로에게 그런 시간을 내어준다. 남자 친구의 폭력으로부터 도망친 로지를 아일라가 발견해 집으로 데려가면서, 이들은 각자의 출신, 경험, 처지에 대해 첨예한 대화를 나눈다. <세계가 깨어져 열릴 때>는 함부로 애틋해지는 대신 과감히 날을 세운다. 계속해서 로지에게 손을 내미는 아일라와 달리 그 손으로부터 미끄러지길 반복하는 로지로 인해 긴장감이 공기를 채운다. 따뜻한 음식과 음악, 젊은 여성으로서의 공감대가 둘 사이를 느슨하게 연결할 뿐이다. 특히 아일라가 통화하는 사이 아일라의 헤드폰으로 조니 미첼의 <Little Green>을 듣는 로지의 옆얼굴에 떠오르는 미묘한 평온을 잊기 힘들다. 로지가 그 표정에 담긴 마음을 비로소 표현해내는 마지막까지, 카메라는 숏을 나누지 않고 롱테이크로 모든 여정을 좇아 관객이 이 관계의 가능성을 실시간으로 탐색할 수 있게 돕는다. 공동 감독이자 각본가인 엘르 마이아 태일페더스가 아일라를 연기했으며, 지난해 캐나다 유수의 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 촬영상 후보로 지명되고 수상했다.
[특별전 페미니스트 콜렉티브: 여성영화/사]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이민경,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 외롭지 않은 페미니즘>) 22회를 맞은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마련한 특별 프로그램인 페미니스트 콜렉티브 섹션은 자연스레 이 문구를 떠올리게 한다. 페미니즘 운동사와 영화사를 탐구한 영화를 소개하는 이 섹션은 이번 영화제에서는 여성의 관점으로 영화사를 쓰고, 여성의 영화 만들기를 역사화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상영작으로는 다큐멘터리 <여성, 영화사>(Women Make Film: A New Road Movie through Cinema)와 한국 초기 페미니스트 독립 단편선이 있다. 마크 커즌스 감독이 촬영 및 편집을 맡고, 배우 틸다 스윈턴, 제인 폰다 등이 내레이션에 참여한 <여성, 영화사>는 총 40개의 섹션에 걸쳐 여성 영화인들의 삶과 영화 이야기를 들려준다. 130여년의 역사를 무려 183명의 여성감독의 렌즈로 톺아볼 수 있다. 러닝타임이 14시간에 달하기 때문에 영화는 5부로 나눠 상영된다. 한국 초기 페미니스트 독립 단편선으로는 김소영 감독의 <겨울환상> <푸른 진혼곡>, 이화여자대학교 영화패 누에의 <영화운동의 함성> <세포분열>을 상영한다. 가려진 혹은 잊힌 이들의 시선을 좇아 영화의 역사를 다시 써보고 싶다면 페미니스트 콜렉티브 섹션을 추천한다. 정확한 상영일자와 장소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홈페이지(http://siwff.or.kr)를 참고하자.
<전장의 여자들>
Senso Daughters
감독 세키구치 노리코┃오스트레일리아, 일본┃55분┃1989년┃쟁점들
1988년 10월 어느 날, 하루 종일 도쿄의 천황 궁 광장을 촬영한 세키구치 노리코 감독은 자신이 “이방인처럼 느껴졌다”고 고백한다. 걷다 멈춰서 궁을 향해 고개를 숙인 이들과 달리 감독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파푸아뉴기니를 침략해 그곳 여성들을 성폭행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독이 만난 당대 일본 참전군인, 간호사, 학자 그리고 파푸아뉴기니 사람들의 증언은 엇갈린다.‘위안부’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는 몇몇의 발언과 달리 파푸아뉴기니 여성들은 4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오래된 기억을 붙든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딸에게 그 경험을 이야기했고, 딸은 엄마 옆에서서 이 땅의 여자들이 무엇을 보고 겪었는지 대신 전한다. ‘증언과 구술의 번역-군 위안부 운동의 역사를 논의하기’라는 주제로 꾸려진 ‘쟁점들’ 섹션에 선정된 이 영화는 맨디 제이콥슨, 카르멘 옐린치츠 감독의 다큐멘터리 <유령을 부르며-전쟁, 강간, 여성에 대한 이야기>(1996)와 함께 상영된다.
<퀴어 지니어스>
Queer Genius
감독 쳇 팬케이크┃미국┃115분┃2019년┃퀴어 레인보우
<퀴어 지니어스>는 퀴어 정체성을 창작의 마중물 삼아 ‘여성성’이라는 광활한 테마 위에서 자유로이 헤엄치는 4인(팀)의 예술가를 조명한 다큐멘터리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영화감독 바버라 해머를 시작으로, 흑인 예술가 집단 ‘블랙 퀀텀 퓨처리즘’ , ‘다이너스티 핸드백’이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오르는 퍼포먼스 아티스트 집스 캐머런, 전방위적 문필 활동을 해온 작가 에일린 마일스가 그 주인공이다. 영화는 이들의 일상과 더불어 영상, 공연, 낭독의 방식으로 구현된 이들의 창작물을 보여준다. 강의실, 전시실, 공연장, 때로는 법정에서 자기 세계를 드러내는 이들의 에너지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비록 한국 관객에게 익숙지 않은 얼굴이 다수지만 쳇 팬케이크 감독이 같은 여성 창작자 입장에서 이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이야기를 이어나가며 관객을 대화의 자리로 초대한다. “절대적이지 않은, 맥락에 따라 유연한 방식으로”(바버라 해머) 몸을 사유하고 표현하는 이들의 무대를 경험해보시길.
[특별전 허안화 회고전: 흐르는 도시 홍콩의 보통 사람들]
제22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홍콩 여성감독 허안화의 40년 영화 인생을 톺아볼 수 있는 회고전이 열린다. 2020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평생공로상인 ‘명예 황금사자상’을 받은 허안화 감독은 홍콩 중하류층의 삶을 조망하는 사회파로 꼽히는 시네아스트다. 특히 이번 회고전에서는 허안화 감독이 홍콩의 공영방송국 <RTHK>와 <TVB>에서 일할 당시 연출한 초기작 <사자산하> 시리즈를 만나볼 수 있다. 홍콩에서 수십년간 방영한 <사자산하> 시리즈에서 몇개의 에피소드를 연출한 허안화 감독은 베트남 난민과 삼합회, 마약 문제 등 다양한 사회문제를 다뤘다. 이외에도 허안화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이자 스릴러영화인 <풍겁>(1979), 노년 여성의 삶에 대해 조망하는 <이모의 포스트모던 라이프>(2006)를 비롯해 총 8작품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