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꿉친구 광필(이룡)과 애란(도금봉)은 범죄에 휘말려간다.
<그대와 영원히> 제작 삼성영화사 / 감독 유현목 / 상영시간 109분 / 제작연도 1958년
한국영화가 본격적인 스튜디오 시대를 맞이한 것은 1950년대 후반의 일이다. 1950년대 중반 30편대에 머물던 한국영화는 1958년 74편, 1959년 111편으로 제작 편수가 크게 증가했는데, 이러한 성장세의 결정적인 기술 기반이 되어준 것이 바로 영화 스튜디오다. 스튜디오 시대의 첫 주자는 1957년 1월 한국영화문화협회가 설립한 정릉스튜디오였다. 미국의 민간원조단체인 아시아재단이 기증한 최신 장비들이 120평의 촬영소와 100평 규모의 현상소에 채워졌다. 1957년 7월에는 <자유부인>(감독 한형모, 1956)으로 흥행에 성공한 삼성영화사가 군자동에 삼성스튜디오를 설립했다. 2개의 스튜디오 공간이 각각 180,100평 규모로 지어졌다. 이 촬영소는 1회작으로 <오해마세요>(감독 권영순, 1957)를 만들었고, 2회작으로 신예 유현목의 <그대와 영원히>를 선택했다. 이듬해 6월에는 3만평이 넘는 부지에 9개 스튜디오의 건평만 2천평에 달하는 안양촬영소가 건립되었다. 이승만 정권의 특혜를 받은 수도영화사와 평화신문사의 사장 홍찬이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을 본떠 만든, 말 그대로 ‘영화공장’이었다.
영화 청년 유현목, 할리우드식 장르영화를 실현하다
현대적인 영화제작 시스템을 상징하는 영화 스튜디오는 전후 한국영화계의 최우선 과제였다. 제작 편수는 속속 늘어났지만 안정적인 제작 환경이 갖춰지지 않은 채로 진행되어 기술 수준은 제자리걸음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전에도 스튜디오라고 불리는 공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창고를 개조한 수준이었고, 그러다보니 주먹구구식의 수공업적 제작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감독들도 어쩔 수 없이 로케이션 촬영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1950년대 후반 본격적인 영화 스튜디오가 등장하면서 한국영화의 만듦새가 달라진 것은 분명하다. 야심찬 젊은 감독들은 통제된 공간에서 정교한 데쿠파주(영화적 시공간을 숏으로 분류하는 감독의 작업)를 시도하며 자신만의 미학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 영화 <그대와 영원히>는 새롭게 시작된 한국식 스튜디오 시스템과 젊은 감독 유현목의 열정이 결합한 인상적인 작품이다.
1950년대 초중반에 데뷔해 한국영화사의 거장이 된 감독으로 신상옥, 김기영 그리고 유현목을 꼽을 수 있다. 유현목(1925~2009) 역시 상업영화로 먼저 데뷔한 두 감독에 결코 뒤지지 않는 영화 청년이었다. 그는 동국대 국문학과 재학 시절 영화예술연구회를 조직해 <해풍>(1948)을 연출했다. 16mm로 만든 45분 길이의 학생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인천 등 지방 도시에서 개봉됐다. 안종화 등 여러 감독 밑에서 10년 가까이 조감독 생활을 한 그는 범죄 액션 장르인 <최후의 유혹>(감독 정창화, 1953)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영화계 입문 초기 그가 할리우드 장르영화에 경도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영화 성장의 기폭제가 됐다고 할 정도로 흥행에 성공한 <춘향전>(감독 이규환, 1955)의 조감독을 거쳐 <교차로>(1956)로 감독 데뷔한 유현목은, 같은 해 <유전의 애수>(1956)까지 연출했다. 두 작품 다 멜로드라마이지만 실존의 고뇌와 구원에 관한 그의 오랜 테마가 여기서 시작됐다. 영화감독 유현목의 이름을 각인시킨 것은 세 번째 작품 <잃어버린 청춘>(1957)에서다. 제1회 영화평론가협회 연출상 등 여러 영화상에서 인정받았다. 당시 언론은 <잃어버린 청춘>에 대해 이전의 한국영화가 개척하지 못한 “영화다운 영화”라고 찬사를 보냈고, 그의 “영화적인 연출”이 할리우드영화에 대한 “모방에서 독창으로” 성공적으로 전환되었음을 주목한다. 1950년대 중후반 유현목의 절대적인 관심은 할리우드 장르의 토착화 그리고 그 영화문법의 창조적 수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그의 초기 세 작품이 남아 있지 않아 아쉽지만 네 번째 작품 <그대와 영원히>를 통해 이 시기 유현목의 치열한 고민과 영화적 야심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잃어버린 청춘>처럼 이 영화 역시 전후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범죄에 휘말리는 청춘들을 그린 멜로드라마다.
정교하고 양식적인 미장센
영화는 교도소의 높은 담벼락 앞에 앉아 소꿉놀이를 하는 어린이 3명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아이들이 놀고 있는 장면을 상당히 길게 보여주는데, 사실 이는 화면 위에 덧대어 인화하는 오프닝 크레딧 필름이 유실된 탓에 그 배경 화면만 남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흙장난 소꿉놀이는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3인 가족으로 보이는데, 이는 앞으로 영화가 펼칠 이야기를 함축해 보여주는 것이다. 소꿉친구에서 10대 후반 연인으로 발전한 주인공들은 과연 가정을 이룰 수 있을까. 영화는 초반부에 광필(이룡)과 애란(도금봉)이 강가의 모래사장에서 소꿉놀이를 하다 소나기에 모래집이 무너진 장면을 보여주는데, 이 역시 둘의 관계가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영화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정교하게 2층으로 설계된 교도소 내부 공간에서 시작된다. 10년간의 징역을 마치고 내일 출소하는 광필이 돼지(김승호)에게 감옥에 들어오게 된 사정을 들려주는 장면이다. 2층 방의 돼지를 전경에 배치하고 후경에는 1층 방에 있는 광필까지 포착해내는 ‘깊이 연출’(deep staging)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유현목은 영화 전체를 통해 세트 공간과 결합한 깊이 있는 구도를 구현하고 있다. 동시에 트랙 위의 카메라는 인물의 감정이나 결정적인 대사를 조금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긴장감 있게 반응한다. 물론 딥포커스(deep focus)를 이상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여러 레이어의 숏을 합성했던 <시민 케인>(감독 오슨 웰스, 1941)처럼 전경부터 후경까지 모두 초점이 맞지는 않지만 유현목은 영화 내내 강박적으로 프레임의 전경-중경-후경을 빠짐없이 사용한다. 대규모 세트의 공간 활용은 2층 높이의 홀로 설계된 영화 속 카바레 ‘스와로우’에서 빛을 발한다. 춘희가 광필이 카바레에 왔다고 애란과 통화하는 장면에서, 전경에 전화를 하는 춘희를, 후경에 마담 리라와 술을 먹는 광필을 잡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애란의 병실과 범죄 집단의 보스인 달수(최봉)의 사무실에서 볼 수 있듯, 각 공간의 세트는 인물 구도와도 정교하게 결합한다. 광필이 애란의 병실을 찾아온 장면에서 전경의 중앙에는 애란을, 왼쪽에는 딸 은주에게 말하는 광필을, 오른쪽에는 달수를 배치하여 은주가 애란과 광필 사이의 딸임을 말해준다. 밀수를 모의하는 달수의 사무실 공간도 천장의 부감숏과 앙각숏을 오가며 갱스터 장르의 분위기를 축조해낸다. 영화의 마지막 5분이 진행되는 공간은 병원 지하실이다. 달수는 애란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달려온 광필을 시체실로 데려가 격투를 벌인다. 광필은 만신창이가 되어 병실에 도착하지만 애란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결국 광필과 딸 은주, 신부 상문(최명수)만 남겨진다.
유현목의 현존하는 가장 초기작인 <그대와 영원히>는 신진감독이었던 그가 고전 할리우드영화 스타일을 자기 식으로 소화하기 위해 어떻게 고민하고 실천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불과 몇년 후 그는 한국영화사의 대표작 <오발탄>(1961)을 내놓는다. 이 영화는 전후 한국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리얼리즘 걸작으로 평가되지만, 그 기저에는 할리우드 장르영화의 수용에서 출발한 그의 미학이 뒷받침되어 있음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