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전주영화제는 남미영화의 변화를 가장 주목할 경향으로 내세웠다. 군부의 몰락과 경제적 불안 속에서도 그들은 동시대 젊은이들의 삶을 관찰하거나 혼자 힘으로 자신만의 영화를 완성시켰다. 쫓기듯 떠난 땅에 다시 돌아와 공감을 끌어내는 데 성공한 이도 있다. 올해 전주를 찾은 남미 감독은 <삼인조 택시강도>의 올란도 루버트와 <자유>의 리산드로 알론소, <끽연구역>의 베로니카 첸 세명. 이중 망명지에서 칠레로 돌아온 루버트와 과거 제3영화를 알지 못하는 26살의 젊은 아르헨티나 감독 알론소를, 전주영화제 서동진 프로그래머가 만났다. 스무살 차이가 나는 두 감독은 과거의 영화에 대해선 반대의 입장을 보이면서도 현재의 영화에 관해서는 서로 깊은 교류를 나눴다.
“이전 세대로부터의 영향 거의 없다”
서동진 이번 전주영화제에서 남미영화가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모두 아시아 지역을 처음 찾았다. 먼저 올란도 루버트 감독에게 자기 소개를 부탁한다.
루버트 75년 아옌데 대통령이 살해당하고 피노체트가 정권을 장악한 직후, 나는 독일로 망명했다. 그때까지는 <대포에 저항하는 주먹> 등 단편작업을 주로 했다. 망명 당시 나는 칠레의 노동운동을 다큐멘터리로 제작중이었는데, 독일로 망명한 뒤에도 작업을 계속해 영화를 완성했다. 그뒤에는 독일 TV방송사를 위해 정치적인 내용에 문화적인 색채를 더한 단편을 만들었고 장편 <행진>과 <식민지>도 만들었다. <삼인조 택시강도>는 내가 처음으로 칠레에서 만든 극영화다.
서동진 당신이 망명했을 무렵, <칠레전투>의 파트리시오 구스만과 라울 루이즈 등 많은 남미 감독들도 망명을 택했다. 당신은 그들과 교류하거나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는가. 그들은 어떤 식으로 해외에서 활동했는가.
루버트 구스만이나 루이즈는 내 바로 앞세대에 속한다. 그들은 칠레에서 작업한 결과가 있었고, 유럽에서도 계속 활동할 수 있었다. 그들은 결국 칠레로 돌아오지 않았다. 루이즈는 이제 크레딧에도 프랑스식 이름을 올리고 있다. 구스만은 여전히 칠레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지만 파리에서 활동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들이 만든 칠레에 관한 다큐멘터리는 외부인의 시선으로 본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는 칠레로 돌아왔다.
서동진 그 세대와 당신 세대 사이에는 단순히 조국에 돌아왔다는 차이 이상의 무엇이 있을 것 같다.
루버트 구체적으로 선을 그을 수는 없겠지만, 칠레를 바라보는 시선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 프랑스에서 칠레에 관한 영화를 만들 땐, 아직도 낭만적이다. 이데올로기를 부각시키는 이 영화들은 칠레가 아직도 정치와 혁명의 격류에 휩싸여 있다고 믿게 한다. 그러나 칠레는 더이상 전투적인 국가가 아니며, 이데올로기도 더이상 우리의 화두가 아니다. 우리는 좀더 일상적이고 사소한 영화를 만드는 데 반해 바깥에서 칠레를 그리는 영화는 70년대에 머물러 있다. 7년 전 구스만을 베를린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언젠가는 칠레에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똑같이 칠레에 관한 영화를 만들더라도, 그의 영화와 우리의 영화는 다르다.
서동진 알론소 감독은 루버트 감독 세대로부터 영화적인 경험을 시작했을 것이다. 당신의 영화는 이전 남미영화와 전혀 다를 뿐 아니라 그 자체로도 독특한데, 어떻게 자신의 영화를 발전시켰는가.
알론소 옥타비오 헥티노나 페르난도 솔라나스 같은 감독은 해외에 많이 알려졌지만, 아르헨티나 내에서는 거의 상영 기회를 얻지 못했다. 아마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아르헨티나 감독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나만 해도 그들의 영화를 보지 못했으니까. 차라리 더 앞선 세대인 레오나르도 파비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대중성이 있었고 페론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루버트 젊은 세대가 이십여년 전의 정치적인 영화로부터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는 건, 좀 무리한 결론이 아닐까.
알론소 내 경우엔 학교에서 수업받기 싫었다는 것이 영화를 택한 가장 큰 동기였다. (웃음) 아르헨티나에선 십여년 전부터 영화학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인력도 크게 늘어났다. 나도 영화학교에 갔지만 졸업은 하지 못했다. 영화사에 다니거나 조감독을 하다가 싫증이 나 아버지 목장에서 일을 거들었는데, 한 벌목공을 만났다. 영화로 만들면 좋을 것 같았다. 친구 네명을 모았고 가족들로부터 3만달러를 빌려 제작비용을 충당했다. 촬영기간은 9일. 하지만 후반작업 비용이 많이 들어 총제작비는 11만달러다. 그래서 아직도 빚이 많다. (웃음)
“<아모레스 페로스>는 미국영화나 마찬가지”
서동진 남미영화는 한동안 침체에 빠져 있었다. 그런 나라에서 갑자기 영화가 붐을 일으킨 특별한 계기라도 있는가.
알론소 그건 아르헨티나만의 현상이 아니다. 영상에 관한 관심은 세계적인 것이고 아르헨티나도 그 흐름을 따를 뿐이다. 현재 아르헨티나의 영화학도는 1만명 정도인데, 관심 분야도 연출과 편집, 촬영 등 무척 다양하다.
루버트 칠레도 아르헨티나와 상황이 비슷하다. 십여년 전부터 영화학교에 진학하려는 젊은이들이 크게 늘었다. 6년 전 칠레에 돌아온 뒤, 나 역시 그런 젊은이들과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학교에서 직접 강의를 하기도 했고. 그들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물론 젊은이들이 영화에 매력을 느끼고 뛰어드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러나 빈부격차가 극심한 칠레에서 이것은 왜곡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선 정신적으로 성숙해야 하고 지적인 능력도 뛰어나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칠레의 거부 중 한명이 영화를 만들고 싶은 아들에게 돈을 준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칠레의 상류층이 흔히 그렇듯 그 아들도 외국 TV프로그램과 뮤직비디오를 접하면서 현란한 영상에만 젖어 있을 거고, 자기가 아는 대로 쉽게 영화를 만들 거다. 나는 그런 미숙하고 경박한 영화들을 좋아할 수 없다.
서동진 멕시코영화 <아모레스 페로스>는 2000년 중남미영화 중 최고의 수작으로 꼽힌다. 이 영화를 본 적이 있는가.
루버트 매우 좋은 영화였다. 특히 다중적인 방식으로 전개되는 플롯이 훌륭했다. 타란티노와 비슷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모레스 페로스>는 그런 영화들과 다르다. 그런 영화에선 아들이 어머니를 살해하고 피가 지나치게 많이 흐른다. 영화보단 사디즘에 가깝다. 아마 로버트 알트먼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 영화를 중남미영화 최고의 수작이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영화는 국적만 중남미일 뿐, 미국영화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서동진 타란티노가 대표하는 현대영화의 한 경향과 거리를 둔다는 점은 알론소 감독도 비슷하다. 당신 세대는 타란티노 영화나 뮤직비디오를 보며 영화를 배웠을 텐데. 당신의 영화 <자유>는 매우 관조적이다.
알론소 젊은이들이 비디오만 좋아한다는 건 언론이 퍼뜨린 편견이다. <아모레스 페로스>의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주류영화에 편입돼 있는 감독이고, 나는 뭐랄까, 돈이 없는 감독이다. 나 역시 <아모레스 페로스>를 좋아하지만 동질감은 느낄 수 없다.
서동진 루버트 감독은 칠레를 떠난 지 오래됐으므로 국내에 기반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삼인조 택시강도>를 어떻게 만들고 배급했는지 궁금하다. 당신이 이십년 만에 돌아와 경험한 칠레 영화산업은 어떤 것이었는가.
루버트 칠레에는 영화산업이라 말할 수 있는 실체가 아예 없다. 영상 분야에 종사하는 인력은 대부분 광고에 몰려 있고, 그들을 기용하면 인건비가 훌쩍 올라간다.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칠레에는 정부가 예술가를 후원하기 위해 만든 폰다르트 재단이라는 것이 있다. 이전에는 미술이나 음악만 지원했는데, 내가 처음 7만달러를 지원받은 뒤로 매년 세편의 영화에 지원비 10만달러를 지급하게 됐다. 배급 역시 힘들었다. 제작자인 친구가 배급을 도왔고, 뜻밖에 흥행결과가 꽤 좋았다. 요즘은 미국이나 호주의 위성방송 채널이 다큐멘터리와 실험영화까지 폭넓게 받아들이고 있어 배급에 도움을 받는 편이다.
서동진 아르헨티나의 상황 역시 매우 어렵다고 들었다. <자유>는 어떻게 상영 기회를 얻었는가.
알론소 지난해에 제작된 아르헨티나영화 30편 중 10편 정도만 국내에서 개봉했다. 그런 기회나마 잡으려면 해외영화제에서 추천을 받는 등 뭔가가 있어야 하므로, 독립영화는 거의 상영할 수 없다고 보는 편이 맞다. 나는 그나마 행운아였다. 칸에서 초청을 받았고, 세 군데뿐이기는 하지만 극장에서 개봉도 했으니까.
“중남미의 삶에서 중남미의 정체성을 발견하라”
서동진 올해 로테르담영화제에서 매우 인상적인 사건이 있었다. 아르헨티나 영화인들이 자국의 경제상황과 이것이 아르헨티나 영화산업에 미치는 영향 등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다. 그들은 아르헨티나는 지금 경제적으로 심각한 처지에 빠져 있는데, 그 부담을 부당하게도 영화산업이 일부 짊어지고 있다고 했다. 알론소 감독도 거기에 서명을 했다. 그 이후 아르헨티나의 상황은 어떻게 변했는가. 지속적인 활동이 있는지.
알론소 그 성명서는 조직적으로 발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발성으로 그치고 말았다. 영화제에 참석한 감독 중 루크레시아 마르텔이 갑자기 제안한 성명이었다. 듣자니, 아르헨티나 정부에서도 웃고 말았다고 했다. 사실, 나는 그때 매우 수치스러웠다. 우리나라의 문제를 내 입으로 폭로해야 했기 때문이다.
서동진 올해 전주영화제는 남미영화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제 남미영화는 현실로 귀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흔히 말하는 피상적 의미의 사실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유>는 한 남자의 일상을 관찰하는 영화고 <삼인조 택시강도>는 하층민의 현실을 폭로하는 영화다. 70년대의 정치적 격랑을 거친 뒤 남미영화는 남미의 혼란을 재현하거나 현실을 은유적으로 담아내는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지금 다른 나라의 젊은 영화는 유희나 개인적 고백에 치중하는 경우가 많은데, 남미 영화인들을 현실적인 영화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동력은 과연 무엇인가.
루버트 미국영화의 장점은 삶과 영화를 조화시킨 뒤 상업적으로 연결시키는 노하우다. 요즘 남미영화는 그런 장점을 수용하려 한다. 물론 그것만이 아니다. 나는 현실이 역사를 만드는 게 아니라 역사가 현실을 만든다고 믿으며, 영화는 사회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 깊은 세계를 관통할 때 의미를 가진다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남미영화에 본질적으로 영향을 행사한 흐름은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이다. 그 건조한 시선은 남미의 현실에 적절하게 들어맞는다. 내 선배들은 거대 서사에 매달렸지만, 우리는 건조한 일상을 통해 역사를 이야기할 수 있다. 나는 계속 잔잔한 일상을 담은 영화를 만들 것이다.
알론소 나 역시 루버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어느 나라의 영화이든,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꺼내야 한다.
루버트: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면서 <백년 동안의 고독>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중남미가 외부의 물결에 휩쓸려왔다면서, 문학이나 영화를 하는 사람들은 중남미의 삶 속에서 중남미의 정체성을 발견해야 한다고 말했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다.
서동진 당신 두 사람은 모두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유>와 <삼인조 택시강도>가 돌아가려 하는 삶의 세계는 극히 이질적이다. <자유>는 멀찌감치 떨어져 보이는 한 벌목공의 삶을, <삼인조 택시강도>는 처참한 지경에 몰린 하층민들의 삶을 담는다. 당신들에게 삶이란, 리얼리티란 무엇인가.
알론소 나는 항상 주변 사람들을 관찰한다. 그 주변 사람들이란 교육받지 못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을 뜻한다. 그들을 볼 때, 나는 한편으로 내 배경을 의식하며 관찰하고, 다른 한편으로 나를 벗어나 오염되지 않은 시선을 유지하려 애쓴다. 그렇게 주관과 객관을 모두 꿰뚫는 영화가 내겐 리얼리즘영화다.
루버트 삶이 다양한 만큼, 리얼리티의 정의 역시 다양하다. 내게 리얼리티란, 감독이 대상 속으로 들어갈 때 나온다. 감독은 소외받은 사람들 틈에서 함께 느껴야 하고, 그 감정을 표현해야만 한다.
서동진 루버트와 알론소 감독은 전주에 남미영화의 새로운 힘을 전해줬다. 두 사람의 의견에 깊은 공감을 느끼면서, 전주영화제를 찾아준 데 감사한다. 전주=대담정리 김현정 parady@hani.co.kr▶ 미국독립영화계의 대모 크리스틴 바숑, 7문7답
▶ 크리스틴 바숑과 킬러필름즈
▶ 서동진 vs 남미영화의 기수들 올란도 루버트와 리산드로 알론소
▶ <삼인조 택시강도>와 <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