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은, 카리스마
-장진 감독한테 딴죽 거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시나리오는 좋은데 영화가 영화적이지 못하고 연극적이다, 라는 거거든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좋아하는 한국 감독, 외국 감독을 알려주세요.
=연극적이다, 영화적이다, 이런 말을 저는 별로 고민 안 해요. <기막한 사내들> 내놨을 때 모 기자가 ‘동서고금을 통틀어서’ 뭐라고 썼죠? 남 기자님? ‘비영화적’이라고 했는데, 그리 나쁘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제 영화를 보고 관습화되지 않은 것에 반응을 했거든요. 저는 영화 보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영화 보는 걸 좋아했다면 양식 같은 걸 따라했을 텐데, 다행이다 싶었어요, 본 게 없어서. 영화에서 화자의 숨소리가 느껴진다면 연극적인 거고, 어떤 배우의 다이얼로그에서 다른 서브텍스트, 다른 감성이 연상된다면 그건 또 문학적인 거겠죠. 어떤 영화가 연극적이다, 문학적이다, 하는 것은 객관적인 게 아니에요. 만약 영화가 안 좋다면 ‘쟨 영화를 못 만들었어’ 이렇게 말해야지, 함부로 연극적이네, 문학적이네, 하는 말을 써서는 안 될 거예요. 좋아하는 감독은, <하얀 전쟁> 만들었을 때의 정지영 감독, <기쁜 우리 젊은 날> 만들었을 때의 배창호 감독이구요, 인간적으로는 김기덕, 김지운, 류승완 감독이 재밌죠. 감독들 사이에서는 이민용, 이현승 감독 위아래로 세대를 나누는데, 사람들은 다 좋아요. (웃음) 외국 감독들은… 저는 대가를 좋아해요. 스티븐 스필버그, 마이클 베이, 마틴 스코시즈. 대단한 것 같아요. 그렇게들 하려면 힘들 텐데. (웃음)
-저는 장진 감독님 영화를 하나도 본 게 없는데요. 보고 온 친구들은 재미도 없고 영화가 이상하다고 그러더라구요. (일동 웃음) 코미디를 주로 만드시는 이유가 뭔가요? 그리고 혹시 내가 만들었으면 정말 잘했을 것 같은 그런 영화가 있나요?
=사람은 좋은 친구를 사귀어야 돼요.(웃음) 저는 코미디에 대한 강박관념은 없어요. 저를 코미디 작가라고 생각 안 해요. 저한테 더 어울리는 건 멜로죠. (웃음) 그런데 발명가적인 기질이 있어서, 새로운 것을 끄집어내려다 보니까 코미디쪽으로 갔던 거지, 한번 더 웃겨보자, 해서 코미디적 요소를 넣었던 것은 아니에요. 만약 재미가 없다면 규칙적인 관습에 익숙한 사람이 적응을 못하는 것이거나, 제 실험이 완성도가 없는 것이거나 둘 중 하나일 거예요. 내가 했으면 정말 잘했을 것 같은 영화는 <공포의 외인구단>이에요. 저는 야구를 되게 좋아해요. 언젠가는 야구선수 나오는 영화를 찍을 거예요. 그리고 이건 비하인드 스토리인데, <신장개업>이 사실 제가 준비하던 영화였어요.
-이 행사의 다른 세 감독님들과의 공통점은 뭘까요?
=일단, <씨네21>이 언제나 우호적으로 다룬 감독들이에요. 받은 게 많기 때문에 부르면 오겠지,(웃음) 하셨을 걸요, 아마? 생각해보세요. 저만 해도, 지금 외국에서 온 지 2시간밖에 안 됐는데, 우산도 없이 왔잖아요. 그리고 아직까지 확 망가지지 않은 사람들이라서, 마니아라거나 보러 올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셨을 테고. 또 내가 알기로는 넷 다 되게 한가해요. (웃음) 겉으로는 바쁜 척하지만. 그리고 이 네명은 요즘 젊은 세대들과 능수능란하게 소통할 수 있는 감독들이기도 하죠. 그리고는 공통점이 없는 것 같아요. 셋 다 담배 피우는데 나는 안 피우지. 술도 그렇고 커피도 그렇고. 집도 다 전세인데 박찬욱 감독은 샀고. 둘은 유부남이고 둘은 총각이고. 뭐 그렇네요. (웃음)
-연극영화과 다니는 연기자 지망생입니다. 신인배우 오디션에서 중요한 점이 뭔지, 그리고 배우 지망생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
=저는 오디션을 본 적이 없어요. 사실 말이 안 되잖아요. 1, 2분, 기껏해야 5분 보고 어떻게 한 배우에 대해서 알 수 있어요. 저는, 제가 모르는 배우를 쓰는 비율이 한 작품의 모든 배우 중에서 30% 미만이에요. 신인배우는 무엇보다 경험을 많이 쌓는 게 중요해요. 아, 근데 막연하네요. 신인배우가 어떻게 경험을 많이 하지? (웃음) 음, 절망만 안 하면 되는 것 같아요. ‘난 만날 이렇게’ 하면서 한숨 쉬지 않는다면, 기회는 많이 올 거예요. 아셨죠?
중요한 건 장르가 아니라 ‘내 이야기’
-저는 ‘검증 안 된’, 해외에서 영화공부하고 온 사람인데요. (웃음) 지금은 방송일을 하고 있구요. 제가 알기로, 장진 감독님도 방송 경험이 있으신데, 영화에서만 표현할 수 있는 건 뭐가 있나요? 그리고 시나리오는 어떻게 쓰시나요? 작은 에피소드부터 시작하나요, 아님 전체를 다 구성하고 들어가시나요?
=저는 이야기를 만들어서 보여주는 사람이에요. 필름, 무대, 방송, 장르를 구분하지 않아요. 오히려 영화에 어울릴 것 같은 걸 연극으로 할 때, 아님 그 반대인 것에 더 흥미를 느끼죠. 저는, 하다못해 얘기하고 싶은 게 있으면 전화로 수다 떠는 것도 좋아해요. 그래서 누가 내 얘기를 듣고 좋아하면 어떤 작품 하나 성공한 것보다 희열을 느껴요. (웃음) 시나리오는, 한 5,6년 전에 아직 제가 언플러그드였을 때는, 메모하기를 좋아했어요. 꼭 그걸 어떤 데 쓴다기보다 메모에 묻어 있는 무형의 분위기랄까, 아우라를 보는 거죠. 지금은 쓰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는데, 일단 줄거리는 안 써요. 저는 줄거리 작가가 아니에요. 리서치 작가도 아니죠. 그래서 제 영화캐릭터들엔 과잉된 캐릭터가 많나봐요. 리서치를 하면 어떤 평균지수의 인물이 나오겠죠. 하지만 저는 예를 들면, 말도 못하고 사투리 쓰고 그런 사람한테 변호사 역 시키는 그런 식이에요. 그리고 시놉시스를 안 쓰니까, 저도 이 얘기가 어떻게 끝날지 모르는 채 써요. 쓰면서 흥미를 갖고 쓰는 거죠. 저는 습작량이 아주 많았어요. 제 지금 방식은 권고할 만한 것은 아니구요, 습작하며 생긴 저만의 툴인 것 같아요.
-지난해까지 일본 영화현장에 있다가 한국영화 붐을 보고 무작정 한국에 온 사람입니다. 저는 프로듀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일하는 데 벽이 있는 것 같아요. 외국 스탭이랑 일해본 적 있으신지. 조언을 좀 해주세요.
=외국분이랑은 소통이 힘들어서…. (웃음) 하긴 한국 사람하고도 힘들지만요. 저는 연출부 중에 누가 외국어학원 다닌다고 하면 그래요, ‘내 말귀나 제대로 알아들어라.’ (웃음) 일본 현장은 합리적이죠? 근데 하다보면 다를 거예요. 프로듀서하려면 우리나라가 더 편할 수 있어요. 좋은 시나리오, 좋은 감독만 있으면 배우도 붙고 사람들이 돈 싸들고 오거든요. 그런 굿 프로젝트만 마련되면 프로듀서는 작품이 스크린까지 운반되는 데 안전사고만 책임지면 돼요. 테러가 일어나지 않는 한 그런 작품은 개봉해서 잘되니까요. 다만, 볼이냐, 스트라이크냐, 하는 판단을 하는 선구안은 필요해요. 이건 좀 어려운 건데, 스트라이크라는 건 알아도 내가 안 좋아하는 코스면 안 치고, 뻔히 볼인데도 웬일인지 나한테는 보름달처럼 보이면 치고, 하는 감각도 필요하죠.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 역시 무시할 수 없구요.
-감독 지망생입니다. 감독이 되는 데 주의할 점은 뭐가 있나요?
=지금 갖고 있는 생각이 있다면 주위에서 뭐라 하건 그걸로 하세요. 그건, 세계 유일의 거니까요. 책에도 없고, 다른 누구도 생각 않는 거니까요. 책 많이 보지 마세요. 영화도 많이 좋아하지 마세요. 너무 감동받으면, 할리우드 키드가 되고, 그의 아류가 돼버려요. 지금 자기가 갖고 있는 그건 정말 ‘메이드 인 자기’잖아요. (웃음) 어디서도 못 배우는, 이십 몇년, 혹은 삼십 몇년(웃음) 동안 살면서 본능적으로 생겨온 거잖아요. 그걸 가장 소중히 하고, 극대화하세요. 그게 제일 소중한 거예요.
-오늘 보니까 정말 감각이 있고 재치가 많으시네요. 언젠가 ‘나는 스트라이크인 줄 알고 쳤는데 볼이 돼버리는’, 그런 매너리즘이 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제 팬클럽 사이트 이름도 ‘안티 매너리즘’이에요. 정신없이 왔는데, 내가 지금 어딜 향해 가고 있나, 생각하면서 요즘 삶의 태도가 변했어요. 어떻게 바뀌었냐면, 안 바쁘게 살고 있어요. 언젠가 비 많이 오는 고속도로를 쩔쩔매고 가고 있는데, 어떤 차가 내 옆을 쌩하고 지나가는 거예요. 그걸 보고 했던 메모가 있어요. ‘도착해보니 지옥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너무나 많은 추월을 했다.’ 나중에 40대 되고, 50 넘어서 만약에 일기장에 그 문구가 써 있으면 어쩌나 싶어요. 그래서 저는, 아직까지도 ‘커서 뭐 될래?’ 하고 물어봐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