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당(당직 세번)을 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되기까지 겨울이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겠나.” 친한 친구 이야기를 하듯 배우 신현빈은 장겨울의 속내를 헤아렸다. 일반외과 교수 13명, 레지던트는 장겨울 한명. 그런 겨울을 두고 율제병원 동료들은 ‘진정한 갑’이라 부른다. 겉보기와 달리 한명뿐인 레지던트의 삶이 얼마나 고된지, 버티는 과정에서 장겨울이 어떻게 무뎌져왔는지, 신현빈은 프레임 밖의 시간들까지 모두 엮어 장겨울이라는 그림을 완성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의 미란과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겨울. 판이하게 다른 두 인물이 남긴 강력한 인상은, 맡은 인물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 모든 것을 체화하려는 배우 신현빈의 노력이 만든 결과물이다. 올해 상반기에만 세 작품을 선보일 정도로 쉼 없이 달려온 그는 지금 이 순간을 “중요한 변곡점”이라 정의한다. 잠시 숨고르기 중인 배우 신현빈을 만나 그가 걸어온 10년의 시간에 관해 물었다.
-장겨울의 짝사랑은 유난히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응원을 받았다.
=맞다. 주변에서 정원(유연석)과 겨울이는 대체 어떻게 되는 거냐고 많이들 물어봤는데 그때마다 본방 사수하라고 답했다. (웃음) 처음엔 29살의 나이에 이렇게 순수하게 사람을 좋아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싶었다. 자칫 잘못하면 말도 안되는 감정이라고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 같아 고민이 되더라. 겨울이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고 싶어서 그가 느낀 감정들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고민했고, 짝사랑을 하며 변해가는 겨울이의 모습들을 최대한 살리려 노력했다. 이야기한 대로 겨울이의 변화도 눈에 띄었다. 처음엔 “심폐소생술을 했으면 살았을 텐데”라고 무심하게 말하는 전공의였지만, 마지막엔 그림까지 그려가며 환자에게 상세히 설명해준다. 원래부터 그렇게 무심한 사람은 아니었을 거다. 말이 좋아 ‘13명의 아버지를 둔 외동딸’이지. (웃음) 보스가 13명인데 얼마나 지쳤겠나. 심폐소생술 언급은 자신이 느낀 안타까움을 나름대로 표현한 거다. 다만 오해를 살 만한 방식이었던 게 문제지. 그래도 지적하면 인정하고 고치고, 마지막엔 눈치라는 걸 갖게 됐다. (웃음) 그런 겨울이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고 싶어서 겨울이의 과거와 배경에 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처음과 끝의 대비가 큰 인물이라서 그런 변화를 어떻게 하면 잘 보여줄 수 있을지도 고민했고.
-인물의 상황을 상상하고 깊게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 같다.
=맞다. 대본에 나와 있지 않은 부분까지 상상하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연기할 인물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고 평소엔 뭘 하며 시간을 보낼지,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선택을 할지 자주 생각한다. 내가 잘 알아야 잘 보여줄 수 있는 거니까. 그게 배우로 서의 내 역할이고.
-영화 <어떤살인>의 지은을 연기하면서 프리다 칼로의 <상처 입은 사슴>을 떠올렸다고. 혹시 겨울이에게서도 떠오른 이미지가 있나.
=텍스트를 이미지화하는 건 내게 익숙한 방법이다. 다만 드라마는 영화처럼 완성된 시나리오를 받지 못해서 그런 특정한 이미지를 설정하진 않았다. 하지만 표정에 큰 변화가 없고 아이처럼 어리숙하게 감정 표현을 하는 겨울이를 보면서 문득문득 나라 요시토모의 그림들이 떠올랐다. 슬프지만 화난 것 같고 순진한 아이 같으면서도 아닌 작품 속 얼굴들이. 겨울이가 <인사이드 아웃>의 슬픔이를 닮았다는 분들도 간혹 계시더라. 시무룩한 표정과 무기력한 모습 때문일까. 장겨울의 안경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극중 스타일이 화제였다. 옷만 봐도 계절이 파악될 정도로 단벌 신사 차림이었는데.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스타일리스트가 장겨울의 스타일에 관해 패션지 영상을 찍었다더라. 듣자마자 “겨울이로? 겨울이가 무슨 스타일이 있어?” 하며 웃었다. (웃음) 단조로운 겨울이의 패션은 작가님, 감독님이 제시해주셨고 그 안에서 디테일을 고심했다. 겨울이 성격상 옷은 몸을 가리는 용도로만 여겼을 것 같았다. 더우면 시원하게, 추우면 따뜻하게 입는 정도. 의사 가운과 어울릴 만한 옷들로 고르되 겨울이라면 라인이 잡히거나 핏이 딱 떨어지는 옷을 입진 않을 것 같아서 청남방과 티셔츠 모두 남성용 옷을 입었다. 특히 안경을 고르는 데 신경을 많이 썼다. 캐릭터에 어울리는 룩을 고민하며 다양한 안경을 테스트하는 과정을 거쳤다.
-‘전문직 전문 배우’라 불릴 정도로 변호사, 의사를 연달아 연기했다.
=그렇다. 그 와중에도 대체로 비밀이 있거나 사연이 많은 인물들을 연기했다. 전작인 드라마 <미스트리스>에서도 의사 은수를 연기했는데 당시 인물의 감정이나 복잡한 상황들 때문에 굉장히 힘들었다. 겨울이도 의사이긴 하지만 은수와는 전혀 다른 성격과 상황의 인물이라 신선했다. 또 겨울이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에게 요구하는 면들이 굉장히 많이 덜어진 캐릭터다. 이를테면 서사나 성격, 하다못해 패션 스타일까지 남자로 설정해도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을 연기해본 적이 없어서 가보지 않은 곳에 발을 내딛는 재미가 상당했다. 주변에서 “겨울이는 그냥 너야” 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겨울이만큼 순수하고 맑고 성실한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가진 무던한 성격, 외부요인에 영향받지 않고 자기답게 살고 싶어 하는 면들은 내게도 존재하는 것들이다.
-“여성 캐릭터가 중요하게 등장하는 영화가 많지 않아 아쉽다”는 말을 한 적 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에서 미란은 사건의 방아쇠를 당기는 중요한 인물인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여성들이 주도권을 쥔 영화라 생각한다. 남성들이 뭔가를 실수하고 실패하는 순간, 여성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플롯이지 않나. 처음 시나리오를 봤을 때 마음이 둥둥, 하고 울렸다. 찍으면 괴로워질 것 같아 망설였는데 내가 아니면 누가 어떻게 연기할지 궁금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미란은 해선 안되는 일을 반복하는 인물이다. 사실 나는 인물의 상황에 빠져들고 파고드는 게 빠른 편이라 미란의 입장에 쉽게 공감했지만 관객 역시 그럴 수 있길 바랐다. 미란의 행동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도록 많은 고민을 했고, 가정폭력이 일어나는 신들도 남편 역의 김준한 배우와 여러 합의를 거쳐 촬영했다.
-스릴러 장르 위주의 작품들을 해왔다. 배우로서 다른 장르를 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을 것 같은데.
=좋은 작품이라면 장르를 불문하고 하겠지만 확실히 안 해본 장르, 역할에 대한 욕심은 있다. 그런데 어떤 역할을 한번 하면 그다음엔 비슷한 작품들이 많이 들어오더라. 그러다보니 한때는 전문직도 계속 맡았고 미란처럼 살인을 저지르는 인물도 연이어 했다. 내가 뭘 바란다고 되진 않더라. 그래도 전과 조금씩 다른 작품을 하고자 하는 선택들이 현재까지 이어졌다. 비슷한 직군의 역할을 맡게 되더라도 어떻게 하면 다르게 보일 수 있을지 연구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미술이론을 전공했다. 인스타그램을 보면 전시회에 다녀온 사진이 많고, 데뷔 이후로도 안규철 작가의 인터뷰어로 활약한 적이 있다.
=인터뷰의 경우 내가 안규철 선생님의 팬이라는 게 알려지며 제안받았다. 팬심을 적극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내가 작품들의 팔로업도 다 되어 있던 상황이라 선생님이 엄청 즐거워하셨고 나도 즐거웠다. 당시 듣기로는 일간지 문화면보다 오래 인터뷰했다고. (웃음) 감각의 자극을 받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하지만 배우 일을 한 지 오래됐으니 미술보다는 내가 있는 이 자리에 더 전문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도 내가 워낙 그림을 좋아하니까, 미술관에 같이 가면 작품과 관련된 재밌는 이야기 정도는 해줄 수 있다.
-데뷔한 지 올해로 10년이 지났다. 그동안 무엇이 변했고, 변하지 않았나.
=벌써 10년이라니. 어린 후배들을 보면 오래한 것 같은데 선배들과 비교해보면 아직도 먼 것 같고. 10년차에 접어들며 변한 건 일단 낯가리지 않는 척을 잘하게 됐다는 거다. (웃음) 어렸을 땐 훨씬 조심스럽고 예민했는데 현재는 더 솔직하게, 나답게 할 수 있는 지점들이 생겼다. 예전에는 불편한 상황이나 연기 외적인 일은 무조건 피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왜 그걸 해야 하는지 명확히 안다. 때문에 피하기보단 상황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잘해낼 수 있을지 생각한다. 변함없다고 느끼는 건 여전히 매 작품이 쉽지 않다는 거다. 10년을 해도 어렵고 괴롭지만 그만큼 나를 끝없이 자극하고 기쁘게 하는 일도 없다. 그렇기에 앞으로도 계속해서 배우의 길을 걸어나가고 싶다.
영화 2020 <클로젯> 2020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2018 <힘을 내요, 미스터 리> 2018 <PMC: 더 벙커> 2018 <7년의 밤> 2017 <변산> 2016 <공조> 2015 <어떤살인> 2014 <멀리서 내가> 2012 <강철대오: 구국의 철가방> 2010 <방가? 방가!>
TV 2020 <슬기로운 의사생활> 2019 <자백> 2018 <미스트리스> 2017 <아르곤> 2017 <추리의 여왕> 2014 <미미> 2012 <가족사진> 2011 <발효가족> 2011 <무사 백동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