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세월은 망각과의 싸움이자 기억과의 싸움이다. 잊고싶을수록 오래 남는 나쁜 기억은 정신을 야위게 만들고, 간직하고 싶은 순간은 덧없이 망각에 잠겨 버린다. 안진우(33) 감독의 데뷔작 <오버 더 레인보우>는 기억과 망각을 씨실과 날실 삼아 짜들어간 미스터리 멜로 드라마다. 방송국 기상 캐스터인 진수(이정재)는 비 뿌리는 저녁 누군가에게 선사할 프리지아 한 다발을 사들고 차를 몰고 가다 트럭에 받히는 교통사고를 당한다. 상처는 크지 않았지만 퇴원 뒤 진수는 몇 가지 이상 징후를 느낀다. 본 게 틀림없다는 영화의 결말이 떠오르지 않고, 장례식까지 갔다는 친구 애인의 죽음도 까맣게 기억에 없다. 사고로 인해 부분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햇살 가득 쏟아지는 창가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역광의 강렬한 기억만은 사라지지 않는다. “중요한 기억이 손상됐을 때 꿈이나 환영을 통해 복구시키려는 무의식의 작용”이라는 게 의사의 설명이다. 진수의 단짝친구이기도 한 상인(정철)과 헤어진 상처가 아직 지워지지 않은 연희(장진영)는 지하철 분실물 보관소에서 일한다. 진수와 함께 대학시절 사진 동아리 회원이던 연희는 진수의 기억에서 지워진 옛사랑이 누군지 함께 더듬어간다. 옛 동아리 친구들도 진수가 마음속 깊이 감춘 채 좋아했던 여자친구가 있었다는 것만 알 뿐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진수의 기억 어딘가에서 먼지 뒤집어쓰고 있을 옛사랑은 주인이 찾아오지 않는 분실물처럼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삶에 관한 한 아마추어이게 마련인 청년시절의 감정 노출은 서투른 사진 현상 작업과 같다. 너무 오래 현상액에 담궈 검게 태워버리거나, 아니면 너무 노출시켜 바래지도록 만들기 일쑤다. 진수가 기억하는 얼굴은 너무도 눈부신 순간이어서 하얗게 인화된 기억이다. 깊이깊이 숨기기만 해온 그의 감정은 너무 오래 현상액에 잠긴 인화지처럼 검게 타버려 판독할 수 없다. 영화는 미묘한 미스터리의 긴장을 놓치지 않으면서 작은 동아리 안에서 전개되는 다양한 감정의 화살을 비교적 섬세하게 인화해 갔다. 유독 비 오는 장면이 많은 영화지만 젖은 스크린은 우울함 대신 우산 안으로 들어갔을 때의 포근함을 전해준다. 다양하게 변주돼 흘러나오는 <오버 더 레인보우>가 빗속에서 느끼는 뜻밖의 포근함을 부추긴다. <반칙왕>의 씩씩함과 <소름>의 어두운 그림자를 잊게 만드는 장진영의 맑은 표정과, 터프가이의 이미지가 가신 이정재의 부드러운 연기가 잘 어울렸다. 결말을 관객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에둘러가는 장치들이 조금 많다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젊고 서툰 감정의 실을 잘 따라간 조금 색다르고 따뜻한 멜로다. 이상수 기자lees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