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하우스>의 감독 로버트 에거스의 전작 <더 위치>(2015)는 전세계 호러 팬들에게 극찬을 받은 영화다. 고립된 한 가족의 공포를 다루고 있지만 정작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무섭게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이들의 공포는 죽음보다 무서운 것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고, 그 설명할 수 없음이 무서운 공기를 만들어낸다. 이 영화가 무섭다면 어떤 사건이나 존재 때문이 아니라 무서워하는 자들이 내뿜는 공기가 무서운 것이며, 그렇기에 무서워하는 자들은 다시 무서운 자들이 된다. <라이트하우스>도 <더 위치>처럼 고립된 공간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4주간 섬에서 등대지기를 하는 토마스(윌럼 더포)와 그의 조수 에프라임(로버트 패틴슨)이 고립된 생활을 하는 동안 점점 더 광기에 사로잡힌다는 이야기이며, 고립과 광기라는 점에서 <더 위치>와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더 위치>와는 근본적으로 이야기의 결이 다르다. <더 위치>가 죽음보다 무서운 존재를 암시한다면, <라이트하우스> 는 삶보다 욕망하는 것을 암시한다. 그 욕망의 상징물은 등대의 빛이다. 토마스는 에프라임에게 등대의 빛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고 그 빛을 자신만 독점하며, 그 빛에서 희열을 느낀다. 그럴수록 에프라임은 점점 더 빛에 다가가고 싶어 하며 광원에 다가갈수록 파멸과 가까워진다.
이 이야기는 오디세우스와 세이렌 신화와 유사하다. 오디세우스는 아름다운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 싶었다. 듣게 되면 죽을 수도 있는 그 노래에 대한 오디세우스의 집착은 자신도 이유를 모르는 광적인 것이었다. 세이렌의 노래를 들은 오디세우스는 선원들에게 죽어도 좋으니 자신을 풀어달라고 소리친다. 그 순간 오디세우스에게 세이렌의 노래는 삶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었다. 오디세우스와 세이렌 신화에서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귀를 막고 노를 젓는 선원들 때문이었다. 세이렌의 노래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노동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이 신화는 계급적으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어떤 쾌락 혹은 예술을 향유하는 계층이 있으며, 그 계층의 쾌락은 다른 계급의 노동 위에 서 있다는 것이다.
등대의 빛에 취하거나 술에 취하거나
<라이트하우스>의 토마스도 마찬가지다. 토마스가 등대의 불빛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에프라임의 노동이 있어야 한다. 등대를 관리하고 발전장치를 유지하기 위한 에프라임의 끝없는 노동은 영화 내내 등장하며 이 노동은 에프라임의 생명을 위협하기도 한다.
그러나 토마스는 영화 내내 무엇인가에 취해 있으려 한다. 등대의 빛에 취해 있지 않은 시간에는 술을 마신다. 술에 취하지 않은 상태의 그는 냉혹하고 이기적인 인간이지만 술에 취해 있을 때는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채플린의 <시티 라이트>(1931)에도 토마스 같은 인간이 등장한다. 이 영화에서 자본가는 술에 취해 있을 때는 떠돌이를 친구처럼 다정하게 대하지만 술에서 깬 뒤에는 취했을 때의 기억을 잃어버리고 냉정하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돌아온다. 자본가들의 공허한 내면을 풍자적으로 비유한 것이다. 이 자본가처럼 토마스가 중독적으로 탐닉하는 사이 어떤 쾌락도 주어지지 않는 에프라임은 점점 토마스의 욕망을 욕망하게 된다. 술을 마시지 않던 에프라임은 토마스를 따라서 점점 더 과음하게 되고, 처음에는 헛소리라고 생각했던 토마스의 미신들을 믿게 된다. 둘은 점점 서로를 닮아간다.
여기에서 다른 해석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 에프라임의 본명이 토마스라는 것이 밝혀지는데, 두 토마스는 한 인물의 양면과 다르지 않다는 해석이 그것이다. 즉 에프라임은 또 다른 토마스이며, 토마스는 또 다른 에프라임이다. 토마스가 등대의 상부에서 희열을 즐기고 있을 때 하부 어두운 곳의 토마스는 상부의 토마스를 살해하려 한다. 마치 그들은 빛이 있는 자리에 서고 싶어 하는 서로 다른 인격 같다. 이렇게 볼 때 상부에 있는 토마스는 하부에 있는 에프라임을 통제하고 지시하는 이성적 인격이며, 하부의 에프라임은 토마스에 대한 살인을 획책하고 환각에 사로잡히는 어두운 인격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 에프라임과 토마스의 위치는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다. 등대의 상부는 점점 더 어두운 비밀을 간직한 장소가 되고, 토마스는 종종 에프라임보다 더 어두운 위치에 있거나, 둘이 한데 뒤섞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에프라임이 아버지와 같은 토마스를 제거하고 자신이 등대로 상징되는 남근 권력을 차지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영화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열어놓고 있으며, 어떤 해석도 가능하다. 다만 영화의 마지막 이미지는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떠올리게 하는데, 이미지의 의미는 프로메테우스 신화와는 다르다고 생각된다. 에프라임이 토마스를 살해한 것은 통제를 제거한 것이며, 따라서 그는 토마스를 제거한 뒤 귀를 막지 않은 오디세우스의 운명처럼 죽음에 이른다. 프로메테우스가 상징하는 것이 이성이고, 프로메테우스가 받은 벌이 이성에 대한 처벌이었다면, 토마스에게 내려진 벌은 탐닉에 대한 처벌이다. 이 점에서 프로메테우스 신화와는 반대 의미를 가진다.
보고 있지만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그렇다면 등대의 빛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흠뻑 취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무엇도 가능할 것이다. 관객 자신의 삶에서 빛은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도록 열려 있는 것이다. 성욕 혹은 술과 같은 일차적 욕구에서부터 죄책감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 혹은 예술이나 앎과 같은 것들도 가능할 것이다. 다만 하나의 해석을 더하자면, 에프라임이 바라보고 있는 빛은 눈을 멀게 할 만큼 강력한 빛이다. 에프라임은 강렬한 빛을 계속 응시하고 있지만, 그의 눈에는 흰색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즉 그는 보고 있지만 아무것도 보고 있지않은 상태가 된다. 조금 더 확장하면 그는 모순의 상태, 규정되지 않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 빛에 취해 있는 토마스도 마찬가지다. 토마스는 에프라임에게 자신이 다리를 다친 이유에 대해 두 가지의 다른 서술을 한다. 예전에 다리가 부러졌다는 말을 하고 얼마 뒤에는 괴혈병에 걸려 다리를 절룩거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모순 속에 살고 있으며 그 모순을 사랑한다. 자신의 모습을 끝없이 바꾸는 프로메테우스이며, 규정을 거부하는 자다. 이 점에서 빛은 자신을 망각할 수 있는 것, 어둠으로 나아갈 수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된다. 즉 빛과 어둠은 구분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라이트하우스>의 흑백은 영화의 주제와 관련 있어 보인다. 즉 이 영화의 여정은 색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색을 잃기 위한, 즉 흑백을 위한 여정이며, 모든 것들이 분별되지 않는 상태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또한 흑백의 강렬한 대조는 등대의 가장 환한 빛을 바라볼 때 한 인간의 가장 어두운 순간이 드러나는 아이러니를 표현해내기 위해 적합한 기법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