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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향한 사랑과 응원의 데뷔작 '찬실이는 복도 많지'

찬실이는 초희를 격려해

김초희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존경하는 영화감독과 함께 좋아하는 영화를 만드는 데 모든 것을 바쳤던 찬실(강말금)이 감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마주하게 된 현실을 암담하고 비극적으로 보여주기보다는 솔직하고 코믹하게 다룬 영화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영화는 숫자가 아니야! 영화는 별 하나, 별 둘도 아니야! 영화는…”이라는 목소리로 시작한다. 이어서 영화감독과 스탭들이 가위바위보 게임을 하면서 술 마시는 뒤풀이 장면을 보여준다. 갑자기 감독이 쓰러지고 사무실에 홀로 앉아 있는 찬실의 모습에서 제목 타이틀이 뜨면 화면이 옆으로 늘어나면서 4:3의 화면비가 16:9로 바뀐다. 이 오프닝이 흥미롭게 느껴졌던 것은 마치 비디오테이프의 죽음을 예언하는 것처럼 묵직한 클래식 음악과 함께 시작한 영화가 정작 보여주는 장면은 가위바위보 게임을 하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잠시 후 감독이 가슴을 움켜쥐면서 테이블로 쓰러지는 장면이 이어진다. 영화는 비장한 음악, 게임, 감독의 쓰러짐, 찬실의 얼굴을 순차적으로 빠르게 보여주면서 엇박자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먼저 주인공 찬실이 친한 배우 소피(윤승아)의 집을 찾아가는 장면을 살펴보자. 감독은 정지화면으로 빌라촌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이 장면을 딥포커스로 촬영했다. 영화에는 감독이 작정하고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 카메라의 구도를 정하고 촬영하는 장면이 있다. 처음엔 이 장면도 그런 장면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화면에서 뭔가가 일어나지않을까 주의 깊게 바라봤다. 전경에 찬실이 등장해 화면 안쪽으로 걸어가다 후경에서 계단을 올라가다 발을 헛디뎌 엎어질 뻔한 모습이 보인다. 아주 짧은 순간 침묵을 깨는 찬실의 모습(엎어질 뻔한)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감독이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실수(틈)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런 예상치 못한 상황은 한 장면에서뿐만 아니라 장면과 장면을 연결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감독의 기발한 장면 배치

예를 들어 찬실이 소피 집을 방문해 소피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찬실은 감독의 돌연사로 일자리를 잃고 생계가 막막하다고 소피에게 하소연한다. 그 말을 들은 소피가 찬실에게 돈을 빌려주겠다고 하자 찬실은 단호하게 “아니, 일해서 벌어야 해”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듣는 소피의 얼굴에서 경쾌한 배경음악이 흐르면서 이어지는 장면은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 바닥을 닦는 찬실의 모습이다. 영화에서 이런 장면은 여러 차례 등장한다. 찬실이 잠에서 깬 후 방문을 열고 오다 주인집 할머니와 마주치는 장면에서 할머니가 찬실에게 “안 추워? 얼른 들어가!”라고 말하자 찬실이는 곧바로 방문을 닫고 들어간다. 이어 소피가 거실 문을 열면서 베란다에서 쓰레기 분리수거하는 찬실을 보면서 “안 추워?”라고 말하는 장면으로 연결된다. 또 같은 신에서 소피가 추운 날씨에 분리수거하는 찬실이 안쓰러워서 못 보겠다며 “들어가라 들어가, 내가 할게”라고 말하자 장바구니를 들고 걸어오는 찬실의 모습으로 연결된다. 등장인물의 말은 즉각적으로 행동으로 연결되거나 같은 말이 반복되는 상황을 설정함으로써 시간의 생략을 통해 빠른 템포의 리듬을 구축한다.

이번에는 딥포커스 촬영 대신 부감숏과 앙각숏을 사용한 촬영으로 과일을 보여주는 장면을 보자. 찬실은 소피 집으로 가는 길에 모과나무를 발견하고 그곳에 멈춰 모과를 바라보면서 자신을 닮았다고 이야기했었다. 소피 집에서 찬실이 프랑스어 선생님 영(배유람)을 처음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영이 찬실게 “왜 영화를 그만뒀냐?”고 묻자 찬실은 대답을 회피하고 서둘러 자리를 떠난다. 그녀는 모과나무 아래 멈춰 모과를 바라본다. 모과 하나가 클로즈업(앙각)으로 보인다.

이어 감(부감)이 보이고, 같은 크기의 배, 사과가 보인다. 다음 장면에서 돼지머리를 중심으로 과일이 보이면 조금 전에 본 과일이 고사상에 놓인 과일이란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감독의 사망으로 찬실이 끝내 작업하지 못한 영화의 고사 장면을 보게 된다. 서로 다른 촬영 방식으로 보여준 장면 연결(모과에서 과일로)은 고사상에 놓인 과일이란 걸 확인하는 순간 감독의 기발한 장면 배치에 미소 짓게 된다.

다음으로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꿈 장면을 떠올려보자. 물론 처음엔 이 장면이 꿈이란 걸 알아채지 못했다. 찬실의 꿈은 고사 장면 이후 이어지는 뒤풀이 장면에서 감독이 쓰러지고 앰뷸런스 소리가 들린 다음에 등장한다. 남산 성곽길을 찬실이 앞서 걸어가고 영이 뒤따라온다. 찬실이 ‘오늘 밤 우리 집에서 자고 갈 거냐’고 묻는 말을 듣는 순간 ‘언제 두 사람이 이렇게 가까워졌지?’라고 의아하게 생각된다. 찬실은 영에게 호감을 느끼고 사귀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찬실이 영과 포옹하는 장면에서 의심이 증폭되고 잠에서 깨는 모습을 보여줄 때야 비로소 꿈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이 장면은 앞에서 언급한 오프닝 시퀀스처럼 한 장면에서 코믹한 리듬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전혀 부합되지 않는 신과 신이 연결(회상/꿈)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충돌(감독의 돌연사/찬실의 포옹)을 최대한 이용해서 코믹한 리듬(예측 불허)을 만들어낸다.

장국영이 홀로 앉아서 영화를 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엔딩 시퀀스에 대해 살펴보자. 결말에서 찬실은 전구를 사기 위해 찬실 집에 찾아온 소피, 영, 후배 스탭들과 함께 마을로 내려간다. 찬실이 손전등을 비추는 장면에서 영사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면서 경쾌한 음악이 들린다. 어두운 터널의 기찻길을 빠져나가면 영화관의 스크린이 보이고 화면에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기찻길이 보인다. 카메라가 조금 뒤로 물러나면 장국영이 홀로 앉아서 영화를 보고 있다. 끝없이 펼쳐진 눈 덮인 기찻길이 보이고 기립 박수를 치는 장국영이 퇴장하면서 영화는 끝난다. 처음 엔딩 시퀀스를 봤을 때, 이 장면이 사족처럼 느껴지면서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영화를 보면서 오프닝 시퀀스의 ‘영화는 숫자가 아니고, 별도 아니고, 영화는…”에서 멈췄던 그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제야 감독이 왜 이 장면을 추가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감독은 영화에 대한 애정과 영화 프로듀서로서 영화 현장에서 겪었던 경험을 주인공 찬실에게 투영하면서 감독의 페르소나를 탄생시켰다. 엔딩곡 <찬실이는 복도 많지>처럼 40살이 되도록 집도 없고 돈도 없고 연애도 한번 못해본 찬실(감독)은 생계를 위해, 좌절감을 잊기 위해 영화와 전혀 관련이 없는 일(가사 도우미)을 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을 비관한다. 하지만 이런 찬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유령 장국영이 등장한다. 그는 연애에 실패한 찬실에게 “당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라며 절망에 빠진 그녀를 위로하고 희망을 준다. 이 영화는 영화를 사랑하는 감독이 영화에 보내는 오마주이면서 동시에 힘든 시간 영화의 현장을 떠나지 않고 버텨온 감독 자신을 격려하는 진솔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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