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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엽 편집장] 봄을 기다리며
장영엽 2020-03-13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음에도 울적한 마음이 쉽게 해소되지 않는 요즘이다. 텅 빈 거리와 마스크에 가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군중으로 가득한 퇴근길 풍경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가라앉을 수 있다는 걸 최근 들어서야 알았다. 착 가라앉은 기분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건 ‘사회적 거리두기’인 것 같다. 기다렸던 영화의 개봉이 미뤄지고, 인터뷰가 취소되며, 즐겨 찾던 극장이 연달아 휴관을 선언하는 나날들이 이어지다 보니 평소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일상을 공유했는지를 새삼 깨닫는다. 하루빨리 지금의 국면이 해소되기를, 그때까지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건강하기를 바란다.

울적한 나날을 보내던 중 김초희 감독의 데뷔작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보았고 오랜만에 많이 웃었다. 일도, 사랑도 잘 풀리지 않는 한 영화 프로듀서의 일상을 조명한 이 작품은 살면서 경험할 법한 수많은 비극의 틈새로 반짝이는 웃음을 주입한 영화다. 한겨울에 러닝셔츠 바람으로 찬실의 주변을 맴도는 왕년의 홍콩영화 스타(현 귀신) 장국영, 관심 있는 남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감독 오즈 야스지로의 특별함을 알아보지 못하자 잘 보여야겠다는 마음도 잊고 일격을 가하는 주인공 찬실의 솔직함을 사랑하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평생 영화만 찍고 살 줄 알았던 영화 프로듀서 찬실이 함께 작업하던 감독의 죽음으로 위기에 처한 모습으로부터 시작한다. 황량한 현실 속에서도 사랑은 찾아오는데, 마음에 둔 남자와의 관계도 잘 풀리지 않는다. 그러나 인생의 방향을 잃은 찬실을 구원하는 건 그가 오랫동안 마음에 두고 사랑했던 존재들이다. 장국영을 비롯해 찬실에게 처음으로 영화를 꿈꾸게 했던 에미르 쿠스투리차의 <집시의 시간>, 다정한 목소리로 영화를 논했던 라디오 프로그램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그리고 어딘가 좀 허술하지만 필요한 순간 나타나 찬실의 삶에 응원을 보내는 지인들. 결국 가장 암담한 시간을 버텨내게 하는 건 찬실이 좋아하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가 소중히 다루는, 별것 아닌 듯 보이는 일상의 소소하지만 보석 같은 순간과 그 순간을 공유하는 존재들이라는 점을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일깨운다. 박스오피스 10위권 안에 진입한 영화들의 일일 관객수가 작품당 1만명이 채 안되고, 그마저도 할리우드영화 또는 재개봉작, 규모 있는 한국영화가 전부인 엄혹한 상황 속에서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2020년 개봉한 독립영화 중 처음으로 1만 관객(1주차)을 돌파했다. 독립, 다양성영화를 상영하는 극장들의 연이은 휴관 속에서도 차분히 관객을 모으고 있는 이 영화의 생명력이, 나뭇가지에 조그맣게 돋아난 새순처럼 오지 않을 것만 같던 봄을 알리고 있다고 느꼈다. 암흑 속에서 손전등을 들고 길을 걷던 찬실이 문득 멈춰 되뇌었던 말처럼 어쩌면 믿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는 태도가 우리를 구원할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으로 시작해보는 3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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