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마렌 아데 / 출연 산드라 휠러, 페테르 시모니슈에크 / 제작연도 2016년
나의 부모는 베이비붐세대(1955~63년대 태어난 세대)와 386세대(1960년대 태어나 80년대 대학에 다니며 민주화에 앞장선 세대) 언저리에서 방황했던, 흔히 말하는 낀 세대였고 나 역시 IMF 구제금융 위기 즈로, 꼈다면 꼈다고 할 수 있는데, “우리 세대는 낀 세대인 것 같아~”라고 말하면 아빠는, “다들 그 나이 때는 자기들이 꼈다고 생각해~”라며 자조 섞인 말을 던지곤 했다. 부모님과 대화를 하다보면 가끔 내가 벽이랑 이야기하고 있나, 내 말을 듣고 있기는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격차가 점점 좁혀지고 있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 우리 셋은 가족이 해체된 이후부터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집에 온 딸 이네스(산드라 휠러)는 가족과 시간을 보낼 새도 없이 전화기를 붙들고 일하기 바쁘다. 그런 딸을 뒤로하고 빈프리트(페테르 시모니슈에크)는 이혼한 아내에게, “우리가 뭘 잘못한 걸까?”라는 말을 던진다. 이 한마디로 영화 <토니 에드만>에 매료되기 시작한 나는, 이 부녀의 기묘한 여정에 기꺼이 동참하게 된다.
반려견이 세상을 떠나자, 예고 없이 딸을 찾아간 빈프리트는 삶을 산다기보다는 생존하고 있는 딸에게 “행복하니?”라고 묻고, 딸은 이 “행복”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가 버거운지 온전히 마주하지 못하고 단어가 가지는 의미를 아빠에게 냉소적으로 되물으며 대답을 회피한다. 아빠는 딸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 혹은 어떤 책임감과 부채 의식이 있었던 걸까? 아빠는 ‘토니 에드만’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스스로를 위장하고 딸의 삶을 따라다니기 시작한다. 아빠가 아빠이길 거부하자, 이네스도 결국 체념하듯 딸 코스프레를 집어던지고 둘은 서로에게 타자가 되어 마치 각자 잃어버렸던 ‘나’를 찾는 자아여행이라도 하듯 기이한 동행을 시작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과정에서 서로의 삶의 궤적을 반추하고 이해하고 교감하며 단 몇초간이지만 인간 빈프리트와 인간 이네스는 뜨거운 포옹을 하며 그들을 둘러싼 차가운 시대와 좁혀질 것 같지 않았던 세대를 초월하여 극적으로 서로를 받아들인다. 그 순간, 내 가족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난 눈물을 쏟아냈다.
나와 내 부모는 같은 시대를 살고 있지만 그 시대를 받아들이는 격차는 점점 커져만 간다. 당연히 세대 차이가 나지만, 서로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변치 않는다. 우리 가족은 오히려 이별하고 난 뒤 서로의 삶을 보듬었고 각자의 삶을 존중하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변화에는 항상 과도기가 있기 마련인데 우리에게 가족 생활은 서로의 인생의 과도기였고 힘겹다면 힘겨웠던 그 시간이 없었다면 여전히 정상가족 코스프레를 하며 각자의 삶 안에 서로를 편입시키려는 끝나지 않는 전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와 그녀를, 그리고 그와 그녀가 나에게 거리를 둠으로써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우리는 마주하고 있는 중이다. 이네스와 빈프리트가 그러했던 것처럼.
아직 나의 부모를 온 마음을 다해 끌어안은 적 없지만 서로를 받아들이는 마음의 공간이 점점 커져가는 지금, 우리는 머지않은 미래에 뜨겁게 포옹할 것이다. 우리는 <토니 에드만>의 마지막 장면, 한바탕 태풍이 지나간 후 들판을 바라보는 농부의 표정을 한 이네스의 얼굴처럼, ‘행복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답을 찾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