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신을 믿으세요?” 영화의 마지막에서 알렉상드르(멜빌 푸포)의 아들이 묻는다. 질문을 받은 알렉상드르는 잠시 미소짓더니 이내 시선을 떨어뜨리며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그의 얼굴 아래로 그의 대답이 묻힌다. 대답은 유예되었으므로 질문만이 남았다. <신의 은총으로>에 끝내 남겨진 건 물음에 대한 답이 아니라 질문의 자취며 표정의 잔상이다. 이제 믿음에 관한 질문과 남겨진 얼굴에 응답할 수 있는 이는 영화 속 알렉상드르가 아니라, 영화 밖의 관객이다. 프랑수아 오종이 아직 재판이 진행 중인 ‘프레나 사건’을 서둘러 영화에 옮긴 데에는, 프레나 사건 공동대응단체인 ‘라 파롤 리베레’(해방된 말)의 활동에 그 또한 카메라로 동참한다는 의미가 얼마간 새겨졌을 것이다.
마지막 질문의 무게
치열한 말들의 투쟁이 진행된 자리에서, 오랫동안 은폐되었던 사건을 목격한 관객에게 영화가 마지막으로 던지고 있는 질문의 중량은 무시하기 어렵다. 신을 믿느냐는 질문 자체가 버겁기도 하거니와 여기에는 ‘아직’이라는 전제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아들은 아버지이자 ‘프레나 사건’의 피해자이면서 최초 고발자인 알렉상드르에게 묻고 있다. 30년이 넘게 70여명의 아동을 성추행한 베르나르 프레나 신부(베르나르 베를리)의 범행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장본인이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내상을 입었을 한 인간을 염려하여 묻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아들은, “교회에 대한 회의와 갈등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간직한 채 주의 사랑으로” 자신을 키운 아버지에게, 교회에 대한 더 깊은 불신과 회의가 쌓인 가운데서도 신을 향한 믿음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느냐고 직설적으로 묻고 있다. 이는, 결단코 교회를 떠나지 않으려는 알렉상드르에겐 불가피한 질문이다. 그러나 영화가 품고 있는 근본적인 질문이기보다는 서사의 종착지에 다시 돌아온 질문이다. 신의 자리에 다른 층위의 대상들, 이를테면 교회, 사제, 가족, 사회, 연대, 인간 등이 대입된 질문들을 거쳐 다시 돌아온 것이다.
<신의 은총으로>에서 이같은 질문들의 연쇄 활동은 몹시 중요하다. 아니, 질문을 포함한 모든 말들의 활동이 영화의 중심을 이룬다. 여기서 말의 의미나 증언의 가치만큼이나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건 말의 활동력이다. 우리는 우선 오래된 침묵을 깨우는 질문 하나를 듣게 된다. 알렉상드르가 아이들 학교의 한 학부모에게서 듣는 “프레나 신부가 자네도 주물러 댔나?”라는 질문. 피해자가 다수임을 명시하는 내용과 프레나 신부가 여전히 아이들과 함께하고 있는 현실이 교차하는 순간, 알렉상드르의 현실감각이 무섭게 깨어나며 말의 활동은 시작된다. 그리고 그렇게 깨어난 말들은 바르바랭 추기경(프랑수아 마르투레)에게 진실규명을 요구하는 메일로 이어지고, 고소장 위로도 진격해나가며, 다른 피해자들의 침묵을 깨워내는 데에 그 힘을 발휘한다.
영화는 이 말들의 저돌적인 활동과 움직임의 경로와 동력을 구축해나가는 과정을 면밀히 재현하고 있다. 더불어 ‘라 파롤리베레’가 범죄 사실을 은폐한 고위 성직자들의 도덕성과 교회 시스템의 문제를 끌어내는 과정을 유려하게 이어가며 해방된 말들의 축제, 그러나 고통 속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말들의 활동을 극도로 신중하게 비추고 있다. 요컨대 <신의 은총으로>는, 알렉상드르가 프랑수아(드니 메노셰)가 준비한 ‘라 파롤 리베레’ 기자회견문을 두고 ”좀더 중립적으로 팩트를 써줘야 해”, “우린 정보만 주자. 분노는 기자들 몫이야”라고 이야기하는 바대로 수정된 기자회견문이 영화화된 것처럼 보인다. 철저히 피해자의 입장에 자리하되 그 안에 경계선 하나를 더 그어 그 위에서 버텨보겠노라고 하는 것 같다. 다만 애초부터 영화엔 중립적인 시선이란 있을 수 없으니 시선을 분배함으로써 중립성을 획득한다. 말하자면 연대하고 있으나 다른 계층과 배경과 상황에 처해 있는 개별 인물들에게 비슷한 비중의 시선을 분배함으로써 그들을 사건의 희생자들만이 아닌 이 세상의 개별자로 바라보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 이 성공이 중요한 이유는, 이 개별자들의 선택들이 “아직 신을 믿으세요?”라는 질문이 나오기까지 거쳐간 무수한 질문들, 현실감각을 자극하는 문제들을 새삼 일깨워내기 때문이다.
말이 만드는 권위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을 깨워내는 이가 ‘라 파롤 리베레’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실은 바르바랭 추기경만큼 이러한 일깨움에 일조하는 이가 없다. 수많은 이를 경악게 한, “신의 은총으로 프레나 신부 사건의 공소시효가 지났다”라는 발언이 결국 올바른 말보다 더 큰 반향을 일으킨 경우는 차치하더라도 그가 알렉상드르와 사무실에서 나누는 대화는 미묘하게 엇나가고 있어 생각의 꼬리를 물게 한다.
우선은 사무실에 걸려 있는 사진에 대해 설명할 때다. 수전 손태그는 <타인의 고통>에서 강제수용소로 끌려가는 바르샤바 빈민가 소년을 찍은 이 사진과 같은 “고통의 사진들은 죽음을 기억하라는 경고문처럼 자신의 현실감각을 심화할 수 있는 관조물로, 만약 될 수 있다면 세속적인 성상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 사진은 성직자의 사무실에 걸려 있으면 더없이 어울리는 사진이 될 것이다. 게다가 프레나 사건 때문에 이루어진 만남이니 알렉상드르에게 자신의 현실감각을 위시할 수 있는 사진이다. 그런데 그는 이 사진이 자신이 들여다놓은게 아니라 드쿠트레 추기경 때부터 걸려 있었음을 굳이 얘기한다. 그는 왜 프레나의 범죄를 알고도 징계를 내리지 않은 드쿠트레 추기경을 언급하는 것일까.
또한 ‘소아성애’란 단어가 불편해 ‘페도필리아’의 어원은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뜻”이라고, “주님은 아이들을 사랑하라고 하셨죠”라고도 말한다. 어원은 그럴지라도 현재의 시점에서 어느 누가 페도필리아를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까. 그렇게 따지면 소아성애자나 영화를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시네필’이나 다른 뿌리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신앙심이 너무 깊어 불편한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온 것이라고 치더라도 이 둔중한 현실감각이 자꾸만 걸린다. 게다가 신앙심이 깊은 성직자가 신의 은총을 그 끔찍한 사건에 가져다 붙였다면 더욱 개탄할 일일 것이다. 그가 한 말을 “다행히”라고 여기든, 억지로 끌어내려 신 덕분에, 라고 여기든 그의 발언이 그의 권위를 실추시키면서 ‘라 파롤 리베레’의 발언들에 권위를 실어준 점을 오종은 신랄하게 보여준다.
<신의 은총으로>에서 프랑수아 오종은 이렇듯 말들의 왕성한 활동과 역학관계와 개별 인물들에 온전히 집중하면서 잠시 잊고 있던 <사랑의 추억으로>(2000)나 <타임 투 리브>(2005)의 저력을 다시 일깨워내고 있다. 과잉된 서사 장치나 형식의 기교를 떠나 인물들에게 힘껏 집중하고 넌지시 상흔을 어루만지며 보는 이의 머리와 가슴을 살며시 흔들어놓는 오종의 영화를 나는 오랜만에 만난 것 같다. 어쩌면, 가끔 뺨 맞은 기분으로 극장을 나오면서도 프랑수아 오종 영화를 보러 극장을 찾는 건 자기 세계 안에서도 여러 계보를 써내려나가는 그의 행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