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에게>의 세상에는 없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시리아 내전의 한복판. 우유와 기저귀, 채소나 과일처럼 자라는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것들이 없음은 말할 것도 없다. 전쟁터에서 태어난 아기에겐 보통의 사람에게 있는 청각적 반사신경이 없다. 지척에 포탄이 떨어지는 소리에 엄마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는 장면에서 어린 딸 사마는 태연하다. 포탄이 쏟아질 때 터지는 굉음과 진동이 이곳 아이들에겐 그저 환경의 일부다. 포격 소리에 엄마가 놀란 순간 움직임이라곤 없는 사마를 보는 관객은, 저 고유한 움직임에서 그간 보기 어려웠던 전쟁의 한쪽 면을 목격한다.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자리가 촬영될 수 있던 것은 ‘엄마의 카메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감독이 카메라를 들 수 없었던 순간
전쟁은 엄마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사마의 엄마인 와드 알카팁 감독에게 중요한 건 정파 갈등도 아니고 오일머니도 아니다. 전쟁의 스펙터클은 물론, 반전(反戰)의 프로파간다도 아니다. 그녀의 관심은 자신의 딸이 동네 다른 아이처럼 포격에 목숨을 잃지 않는 것,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마련한 보금자리를 지키는 것, 이웃과 나누는 웃음을 유지하는 것 같은 일들이다. 독재를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조그만 시위가 내전으로 비화되기 시작한 2011년부터 약 5년간 500시간(3만분) 분량을 촬영해 96분으로 압축한 이 다큐멘터리의 최전선에선 독재 타도라는 대의가 깃발을 들지 않는다. 대신 피범벅이 돼 병원에 실려온 어린아이들의 절규, 자식을 잃고 정신을 놓은 엄마의 비통함, 끊긴 줄만 알았던 태아의 숨이 끝내 이어지는 기적 같은 일들이 엄마의 시선에 담긴다.
<사마에게>를 보는 관객이 쉽게 기대하지만 없는 화면은 또 있다. 감독은 하루 평균 300명의 사상자가 밀려오는 임시 병원에서 의사 남편과 함께 기거한다. 좁혀들어오는 포위망 속에 죽거나 혹은 나빠지는 상황을 감정이 아닌 관점을 담아 촬영했다. 폭격을 맞고 실려왔지만 결국 숨진 어린이를 비추다 카메라 방향을 돌리면 감독의 딸이 놀고 있는 식이다. 딸의 목숨이 걱정되지 않을 리 없다. 아기를 출산한 순간 사별을 걱정해야 하는 것이 이곳 엄마의 삶이다. 종반부 포위망을 넘어 이동을 시도할 때 딸의 신변안전을 위해 생이별을 택해야 했지만, 그때 딸을 비추는 화면은 없다. 감정의 격랑이 가장 가팔라질 순간을 내레이션으로 대체한 이 대목에서 우리는 감독이 카메라를 들 수 없었던 순간을 상상하게 된다. 이 부재에서 영화 속 애끊는 화면들이 그나마 평온한 상황에서 촬영된 것임을 상기하게 된다. 생략을 통한 강조는, 종종 극 영화의 기법이 되지만 <사마에게>에선 눈앞에 펼쳐지는 듯한 현실의 기억이 된다.
잘 만든 다큐 중에는 예상되는 상황을 치밀한 계획에 따라 취재하거나 충분한 근거를 통해 예측되는 일을 기다리며 제작한 경우도 적지 않다. <사마에게>의 세계에선 단 1초 후도 내다볼 수 없다. 어떤 부모는 아이들과 함께 정부군 주둔 방향으로 투항하듯 탈출하다 아이의 목숨만 내주고 말았다. 폭격 전 CCTV 화면 속에서 걸어가던 병원 동료들은 폭격과 동시에 꺼진 CCTV 속으로 스러졌다. 자신의 선택을 후회할 이들의 심정을 상상하는 관객은 조금씩 알게 된다. 유럽 여러나라의 골머리를 썩인 난민 사태의 뿌리에는 이같은 예측 불가능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 이곳에서의 출생을 선택한 적 없는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감행한 어떤 결정들을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는 점 등을 말이다.
개인의 카메라에 희망을 걸다
이를 거쳐 <사마에게>가 연상시키는 장면은 2018년의 한국이다. “국민이 먼저다.” 예멘 난민 552명이 제주도에 입국하자 반대 시위에 등장한 구호다. 난민 신청 허가 폐지를 촉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 참여 인원은 70만명을 넘었다. 한국 정부는 예멘을 ‘제주 무사증 불허국’으로 지정함으로써 세계 120여개국이 합의한 난민 협약의 취지를 발빠르게 거스른 다음, 단 2명을 난민으로 인정했다.
독일 등 여러 유럽 국가들이 해마다 받아들이는 난민 수는 수십 만명 단위다. 이런 곳의 국민들이 얻는 수많은 것 중 하나는 ‘기본권을 빼앗긴 이들의 처지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킴으로써 나의 기본권 또한 보장될 것’이라는, 사회적 합의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신뢰가 부족한 사회에서 어떤 혐오가 횡행하는지는 “먼저”를 외치는 한국 국민들이 누구보다 잘 안다.
고작 수백명 단위의 이방인들로 한 사회가 갈팡질팡하고 근거 없는 혐오가 쏟아지는 이유는 다른 사회의 현실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유엔의 집계에 따르면 시리아 내전으로 숨진 이는 2018년까지 36만여명에 이른다.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의 골 깊은 갈등, 정부군과 반군, 원리주의 과격 세력과 주변국 무장 조직의 개입, 여기에 미국과 러시아까지 끼어든 와중에 시리아 난민은 1200만명을 헤아리게 됐다. 하지만 이런 얘기는 시리아 내전을 전하는 매스미디어식 기술일 뿐이다.
적잖은 한국인 독자에게 이런 사실들은 관심을 끌지 못한다. ‘가족 다큐’이기도 한 <사마에게>는 전혀 다른 층위로 우리를 데려가 목격자의 자리를 공유하도록 해준다. 난민 관련 악성댓글에 시달리는 유엔 난민기구 친선대사인 배우 정우성은 저서 <내가 본 것을 당신도 볼 수 있다면>에서 이렇게 썼다. “난민은 평범하지 않은 상황에 놓인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가족 다큐’의 렌즈를 통해 전쟁을 보게 해주는 <사마에게>의 역할은 그래서 다른 층위에 놓인다. 전쟁 상황이라는 점을 치워놓고 보면 유머와 장난기 넘치는 평범한 가족이지만 그들의 5년은 지구 저편 평범한 가족의 그것과 이토록 다르다. 이 영화가 칸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한 지난해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 <기생충>의 가족은, 자신들을 불행 속으로 몰아넣는 구조는 알아채지 못한 채 더 아래쪽에 있는 가족과 물고 뜯고 치고받는다. 기우(최우식)는 그래서 계단을 뛰어내려가다 하늘에서 떨어져 아래쪽만 공격하는 빗물을 보며 뭔가를 자각한다. “국민이 먼저”를 외치는 이들은 세상을 제로섬 게임판으로만 인식하게 만든 구조에 저항하지 못한 채 난민에게 돌아가는 파이 한 조각을 아깝게 여긴다. <사마에게>의 의미가 두꺼워지는 이유는 현장의 참상을 전하는 걸 넘어 전 지구적 난민 사태의 국면에서 난민이 난민인 이유를 알게 해준다는 데 있다.
한 도시에 고립된 민간인들의 투쟁을 그린 <사마에게>를 보며 부질없는 상상도 하게 된다. 예컨대 1980년 광주 시민들의 손에 저마다 카메라가 들려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가해자들이 잘못을 시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느 책 제목을 빌려 써보자면 우리가 이 영화를 통해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또한 있다. 언젠가 이 다큐를 포함한 시리아 시민들의 카메라 기록은 정권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의 증거가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는 야만은 매스미디어가 아닌 개인의 카메라에 의해 좀더 면밀히 기록될 것이다. 그 기록은 누군가가 타자를 관찰한 3인칭 시점이 아닌, 내부자 시점의 성실한 보고서일 것이다. 이처럼 가치 있는 기록들 사이에는 1인칭이지만 악의적인 정보들 또한 뒤섞여 바다를 이루고 있으므로, <사마에게>를 관람하는 행위와 같이 모르던 세계를 알고 공유하는 일은 갈수록 뜻이 깊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