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의 댄서>를 보고나서 좌석에 붙박혀 있던 내 육체를 그물처럼 얽었던 정서는 ‘외로움’이었다. 막판까지 폐부에서 솟아올라오는 우툴두툴한
목소리로 통곡 같은 노래들을 쏟아내는 비욕을 그대로 급전직하의 사형대에 매단 이놈의 감독. 차마 소리내어 울 수가 없어서 그냥 줄줄 흘러내리던
눈물이 극장의 불이 밝혀지자 훤히 본색을 드러내었다.
튀는 비욕, 정교한 뮤지컬의 기하학을 파괴하다
<어둠 속의 댄서>에서 비욕은 혼자 튄다. 그렇게 잦은 클로즈업에다 그렇게 튀는 목소리를 가졌으니 누가 그녀와 감정적으로 동일시하지 않을
수 없겠냐마는. 그녀의 목소리는 체질적으로 백 코러스와 부드럽게 믹스되는 실키한 맛을 지닌 주디 갤런드 유의 여주인공과 애당초 거리가 멀다.
비욕은 줄리 앤드루스가 성대수술로 맛이 간 듯한 목소리를 내면서 주위의 합창에서 따로 떨어져 논다. 주변과 섞이지 못하는 그녀의 춤과 노래는
<어둠 속의 댄서>에서 살아 돌아가는 몸으로 그어대는 유일한 움직임처럼 보이기도 한다. 'I’ve seen it all'을 부를 때, 그녀외의
사람들은 모두 마네킹같이 정형화한 동작으로 그녀를 에워싸는데, 그래서인지 그녀의 자연스러운 몸과 감정은 더욱더 엑스트라들의 군무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사실 <어둠 속의 댄서>를 미국 뮤지컬의 대부 버스비 버클리가 보았다면 관에서 벌떡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둠 속의 댄서>에서 극장
안의 한 장면으로 보여지는 버스비 버클리 뮤지컬의 핵심은 최대한 개인의 개성을 자제하고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을 춤에서 뽑아내는 것이었다.
버클리 뮤지컬의 트레이드 마크인 호수로 차례차례로 빠져드는 수영복 차림의 무희들처럼, 대규모의 규칙적인 군무가 빚어내는 일사불란한 움직임의
볼거리는 당시 관객의 넋을 빼놓았다. 라스 폰 트리에는 이와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움직인다. 철저히 개인의 상황과 정서에만 현미경적인 시선을
갖다대면서, 그는 뮤지컬이 빚어내는 장르적 기하학을 완전히 깨부숴버리는 전복을 시도한다. 설사 밀로스 포먼이나 로버트 앨트먼이 뮤지컬 <헤어>와
<내시빌>에서 미국적 가치와 뮤지컬의 장르적 관성을 실컷 조롱하고 있다고 해도, 그들 역시 뮤지컬이 갖는 기본 전제들- 영화의 무드와 주인공의
정서와 음악적 공연을 네러티브의 맥락 속에서 결합시키는 뮤지컬 자체의 ‘내적 논리’에 파격을 가하지는 못했다.
반면 <어둠 속의 댄서>의 뮤지컬 신들은 뮤지컬 특유의 유동적인 운동 흐름을 완전히 차단시켰는데도, 여전히 기이하게 아름답고 뭉클하다.
그것은 뮤지컬 장르의 핵심인 운동의 연속성과 안무가 주는 시각적 쾌락보다는 100대의 카메라와 수십번의 편집이 주는 순수한 카메라의 최면과도
같은 마법일 것이다. 비욕이 튀고, 카메라가 거대한 가위 역할을 하면서, <어둠 속의 댄서>에서의 뮤지컬은 그 특유의 장르적 컨벤션을 완전히
전복시키고야 만다. 이 영화의 뮤지컬 신은 영화적 스타일과 카메라 미학의 역동성 그 자체이다. 덴마크 출신의 악동 감독은 완벽의 테크니션이라는
품질 평가서의 딱지를 떼어버리고, 스스로의 손으로 왕관을 썼던 나폴레옹처럼, 다가올 시대의 고다르라는 야심찬 즉위식을 혼자 치러낸다.
현실과 환상의 봉합, 또는 이화
노래가 끝나면 뮤지컬이 조렸던 세상은 흔적없이 사라지고 셀마는 다시 프레스 기계가 웅웅거리는 현실에 내동댕이쳐질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보았어요’라고 득도의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보던 셀마를 뒤로 하고, 제프(칼 스토메어)는 ‘당신은 눈이 멀어가죠’라는 냉혹한 현실의 울림을
되풀이한다. <어둠 속의 댄서>의 뮤지컬 신들은 실은 라스 폰 트리에가 얼마든지 마음만 먹었다면, 미국식 낙관주의와 할리우드식 관객 서비스로
관객을 행복한 마음으로 극장문을 나서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득의만만한 과시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scatter Heart'에서
자신이 죽인 시체와 춤을 추는 셀마는 살인을 해도 도주에 성공하는 도망자일 수 있었고, 'new World'에서 법정을 들썩이게 하는 셀마는
유능한 변호사를 만나 기적적인 사면으로 목숨을 건지는 행운아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라스 폰 트리에는 이러한 미국식 해피엔딩의 마취와 사법제도에
대한 신뢰를 매몰차게 저버린다. 아니 종국에 가서는 셀마와 함께 사형대 위의 시체들로 가차없이 폐기처분해버린다.
셀마는 뮤지컬 특유의 판타지에서 빠져나와 다시 가혹한 현실로 밀쳐지는 일을 되풀이하는데, 혼자의 움직임으로 가득 찬 황홀한 뮤지컬의 세상과
대비되어 셀마가 던져진 현실은 낯설고 가혹한 타인의 땅 위에서의 들풀 같은 삶이 되어간다. 미국이라고 주장하는 유럽의 이 초라한 땅을 보라.
짐 자무시의 <천국보다 낯선> 이래 처음으로, 관객은 셀마라는 이민자의 시선으로 미국이라고 ‘주장하는’ 땅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더욱
기이한 점은 셀마의 이국땅에서의 외로움과 소외감이 정통적인 방식의 입체적 캐릭터 구성이나 뛰어난 내레이션의 구축으로 뒷받침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캐릭터의 손과 발을 동여매고도 라스 폰 트리에는 관객과 정서적 게임을 벌이는 도박판에 나선다. 셀마의 고립감은 <어둠 속의 댄서>에서
분명하게 전해지는 단 하나의 진실이다. 뮤지컬 신이 갖는 황홀한 아름다움과 메마른 현실이 이화작용하는 데서 발생되는 화학적인 기류는 <어둠
속의 댄서>를 눈부시게 낯설면서도 아름다운 최초의 뮤지컬로 만든다. 이쯤 되면 누가 뮤지컬을 행복을 파는 장르라고 할 것인가. 멜로드라마라는
슬픔의 정서와 뮤지컬의 장르적 관습이 서로를 배반하는 지점에서, 라스 폰 트리에는 <어둠 속의 댄서>의 정서를 극단으로 몰고 나간다. 현실과
환상을 봉합하는 뮤지컬의 솔기를 뜯어 헤치면서 관객의 감정적인 장력은 ‘all or none’ 수준이 되고, 그것은 정서적 시너지 효과였던가,
정서적 사기술이었던가? 이윽고 <어둠 속의 댄서>는 천국과 지옥을 오가게 될 것이다.
현란한 자기과시도, 영원의 구원도 ‘있다’
그랬다. 라스 폰 트리에는 깔깔대며 미국을 비웃었다. 'my Favorite Song'을 부르는 비욕이 ‘크림색 망아지와 반질거리는 주전자가
좋아요’라고 할 때, 정말 그녀에게 흰색 망아지와 구리 주전자를 가져다주며 구체적 사고밖에 할 줄 모르는 저능아 미국을 비웃었다. ‘미국은
통에 담긴 사탕과 배우 같은 집 주인과 영화 속의 집’이라는 비욕의 대사가 끝나자, 과자통에 담긴 돈은 배우 같은 집 주인에게 강탈되고
셀마는 영화 속의 집 근처에도 못 가보고 사형대로 직행한다. 미국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아메리칸 드림과 사법제도가 뿌리째 조롱을 당하는
지경에 걸맞게, <어둠 속의 댄서>는 <타임> 선정 올해 최악의 영화에 뽑히는 영예(?)를 누렸다.
그렇다고 라스 폰 트리에가 전적으로 유럽의 편을 들어주는 선선한 인간이던가. 아비의 이름을 대라 하자 셀마는 미국 시민이 된 왕년의 뮤지컬
배우인 올드리치 노비의 이름들 들이민다. 이제 유럽은 이름도 성도 모르는 아비 없는 자식의 땅인 것이다. 어찌보면 남편과 행복을 동시에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하는 셀마는 상징적 질서에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는 미국으로 건너간 잔다르크이자, 장르적 질서 속에 스스로 위치짓기를
거부하는 라스 폰 트리에의 수호천사인지도 모른다.
이 속에서 100대의 카메라는 100개의 영화적 가능성이며, 줌인 속에 빠져드는 클로즈업은 단 한번밖에 오지 않는 카메라의 구원의식이다.
라스 폰 트리에가 바랐던 것은 어지러운 디지털의 현란한 자기과시였을까? 칼 데어도르 드레이어가 영화 <잔다크르>에서 이뤄냈던 영혼의 구원이었을까?
분명한 것은 <어둠 속의 댄서>에는 이 둘 모두가 들어가 있고, 말하는 사람을 쫓아가는 욕지기나는 팬숏들은 사건의 표면을 응시함으로써 무의식의
지층을 확보하는 투시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지.
셀마는 죽어가지만 죽음보다 더 무서워했던 것은 아들이 시력을 잃는 것이었다. 그녀는 살아 있는 어머니가 되기보다는 개안한 아들의 죽은 어미가
되기를 원한다. ‘눈이 더 중요해요.’ 라스 폰 트리에는 어미의 이름으로, 살아 돌아다니는 권위로 행세하기보다 가장 사랑하는 이를 위해
죽으라고 말한다. 아비도 없는 자식에게 어미까지 없애라고 말한다. 눈을 뜨기 위해 필요한 것은 왼손잡이가 되는 것이라고, 죽어가는 셀마에게
남겨진 것은 아들의 안경이었다.
나도, 아들의 이름을 왼손으로 써보았다
그래, 사는 게 자칫하면 팔이 잘릴 프레스 기계의 소음 속에서도 춤을 추는 것 아니던가. 소줏집을 나서니 바람이 차가웠다. 혼자 자고 있을
아들이 있는 집으로 터벅터벅 향한다. 빌어먹을. <사운드 오브 뮤직>이 단 사탕이라 이거지? 집에 가서 아들의 이름을 왼손으로 써보았는데
잘 써지지를 않는다. 삐뚤삐뚤한 글씨를 바람이 크레인숏처럼 하늘 꼭대기로 올라가면서 다 날려버렸다. 그날, <어둠 속의 댄서>는 여전히
내 삶 안에서 유효했다. 오르기 위해 떨어지던 눈발은 땅 위를 낮게 맴돌고, 어둠은 보내기 전에는 떠나지 않을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서,
끝나지 않은 노래를 창 저편에서 부르고 있었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