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이야기>는 집요할 만큼 ‘대칭적인 하나의 짝’으로 구성된 영화다. 전반적으로 결혼과 이혼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은 물론이고, 니콜(스칼렛 요한슨)과 찰리(애덤 드라이버)라는 주인공들이 그러하며, LA와 뉴욕이라는 배경 또한 대립적으로 비친다. 가족드라마인 동시에 매력적인 법정 영화인 이 영화에서 찰리가 만나는 두명의 남자 변호사 또한 서로 다른 상징성을 지닌 하나의 짝이다. 잘나가는 만큼 냉정하고 몰인정한 변호사 제이(레이 리오타)에게 당황했던 찰리가 인간미 넘치는 변호사 버트(앨런 알다)를 만나고 감동해 그를 선임했다가 법정 싸움에서 불리해지자 버트를 자르고 제이를 선임하는 과정은 관객에게 쓴웃음을 짓게 만든다.
결혼과 이혼 과정에서 찾아온 삶의 균열
영화와 마찬가지로 결혼 또한 서로 다른 두개의 세계가 하나의 짝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하면, 혹은 하나의 세계가 관계의 불균형을 깨닫기 시작하면 그 결혼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니콜과 찰리의 결혼도 마찬가지다. 영화의 초반, 냉전 중인 두 사람을 볼 때만 해도 관객은 그들이 왜 이혼을 하려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후 니콜이 변호사 노라(로라 던) 앞에서 꺼내는 이야기를 들으며 관객은 니콜이 느낀 자기 세계의 균열을 이해하게 된다. 자신의 세계가 사라진다는 것, 사소한 취향부터 시작해서 삶의 목표와 커리어까지, 나 자신이 볼품없어진다는 것, 무엇보다 상대방이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관계의 불균형을 깨달은 니콜은 별거를 선언하고 이혼소송을 건다. 니콜이 결혼에서 삶의 균열을 느낀 후에 이혼을 요구한다면, 찰리는 이혼의 시작과 함께 삶의 균열을 경험한다. 그는 뉴욕에서 극단을 운영하면서 이따금 LA로 날아와 아들 헨리(어지 로버트슨)를 만나 시간을 보내야 하고, 그 와중에 소송에 대비하기 위해 변호사를 찾아다녀야 한다. 그러니까 두 사람의 이혼 과정을 달리기에 비유한다면, 찰리는 이미 한참 전에 출발한 니콜의 뒤를 쫓아가야 하는 상황이다.
이 영화의 영리한 선택은 그 과정에서 오프닝 시퀀스 이후 회상 장면을 넣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이혼 과정에서 과거 장면을 구구절절 집어넣었다면 영화는 누가 더 불쌍하고, 누가 더 피해자인지에 대해 매몰된 과거형의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 대신 영화는, 뒤늦은 출발자인 찰리의 시점 위주로 오늘과 내일의 이혼 과정을 차근차근 좇아간다. 찰리는 뒤늦게 LA로 와야 하고, 뒤늦게 니콜이 아직 만나지 않은 변호사들을 찾아다녀야 한다.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때, 찰리가 만난 두 변호사의 흥미로운 간극의 지점이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찰리는 호전적인 변호사 제이 대신 인간적인 변호사 버트를 선임했다가, 버트가 노라와의 법정 다툼에서 밀리자 그를 자르고 제이를 선임한다. 버트와 달리 제이는 노라 못지않게 상대를 맹렬히 깎아내리고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유리함을 만들어내는 매섭고 유능한 변호사다. 그러나 두 변호사의 팽팽하고 치열한 법정 싸움은 바로 옆에 앉은 니콜과 찰리에게 상처를 남기고, 결과적으로 그들의 치킨게임은 찰리가 뉴욕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을 포기하고 합의하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그 조건은 잘리기 직전 버트가 말했던 합의의 수준과 비슷하다. 버트에게 합의를 권유받았던 찰리는 그런 버트를 자르고, 더 많은 시간과 돈을 들이고 나서야 제이를 통해 합의를 한다. 1년 뒤 핼러윈, 뉴욕에 사는 찰리는 여전히 4800km를 날아와 LA에서 아들을 만나야 한다. 그렇다면 노라의 말처럼, 이건 찰리가 졌다는 뜻일까?
그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에선 ‘시간’을 통해서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버트에게 합의를 권유받았을 때 찰리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찰리는 분노로 끓어오른 상태였고, 그에게 중요한 것은 차분함과 너그러움이 아닌 전투력과 경쟁심이었다. 그렇게 다시 찾아간 제이를 앞세워 찰리는 전과 달리 법정에서 노라와 니콜에게 한방을 먹인다. 물론 그 결과로 찰리가 얻은 것은 최종 승리가 아니다. 도리어 노라측이 찰리의 맥아더상 상금의 절반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빌미를 제공한다. 버트를 선임했을 땐 다뤄지지 않은 영역까지 이제 다툼의 영역이 된다. 그리고 그 지리멸렬하고도 지긋한 시간을 겪고서야 찰리는 니콜과 합의하게 된다.
마지막 포옹의 의미
이처럼 <결혼 이야기>에서 노아 바움백은 ‘시간’이 끼어들어야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을 현실적으로 포착한다. 미국식 이혼소송을 겪은 니콜과 찰리에게 합의를 제외하고 남은 것은 담보대출과 파산에 가까운 재정 악화다. 그 싸움의 결과는 관객에게도 딱히 생산적인 감정을 남기지 않는다. 어디에도 승리의 쾌감이나 패배의 좌절은 없다. 하지만 그 자리를 대신해, 그 ‘시간’을 보내고서야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남는다. 예컨대 니콜이 쓴 찰리의 장점 리스트 장면은 오프닝 시퀀스에서 처음 등장했다가 영화의 마지막에 다시 등장한다. 같은 내용의 글이지만, 전혀 다른 상황에서 읽히는 까닭에 두 장면은 상반된 느낌을 선사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산뜻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던 니콜의 말들이 영화의 끝에선 이혼 과정을 겪은 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 바뀐다. 이를 읽는 찰리의 눈물과 뒤에서 그를 바라보는 니콜의 눈물이 겹칠 때, 두 사람을 바라보는 관객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영화의 초반, 하나의 숏 안에 담기고서도 분열된 듯 느껴지던 니콜과 찰리는 무수한 시간을 지나서야 비슷한 표정으로 연결된 숏 안에 담긴다. 지독하고 잔인한 불투명한 언어의 무용함을 느낀 뒤에야 와닿는 투명한 감정의 순간. 그들을 지켜봐온 관객에게도 그 감정의 순간은 그 어떤 순간보다도 진실되고 애틋하다. 여기서 노아 바움백은 조용히 인물들의 침묵을 지킨다. 니콜은 울고 있는 찰리를 바라보며 눈물 짓지만, 찰리에게 다가가거나 말을 건네지 않는다. 니콜과 찰리가 느끼는 감정은 각자의 숏 안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관계의 개선이나 과거의 미화를 위한 도구적인 발판이 아닌, 어떤 시간을 함께 겪은 이들만이 사후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감화의 순간을 잉여적으로 포착하며, 영화는 인물들과 관객이 그것을 그저 온몸으로 느낄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준다.
<결혼 이야기>의 장점은 관계가 끝나가는 과정의 잔인함에 대해서 머뭇거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는 니콜과 찰리의 서로의 가족에 대한 비난은 물론이고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폭언에 뒤따르는 후회의 순간까지 생생하게 포착한다. 하물며 가정법원 조사관 앞에서 찰리가 자신의 팔을 실수로 그어버리는 순간의 터질 것 같은 긴장이나, 이혼 후 찰리가 부르는 노래의 씁쓸함은 또 어떠한가. 이렇게 하나의 관계가 끝나는 과정에는 저릿한 감정의 찌꺼기들이 남아 있다, 고 노아 바움백은 영화를 통해 말한다. 이혼한 부부가 자녀라는 교집합을 통해 또 다른 형태의 가족으로 남게 된다는 것, 한국과는 다소 사정이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래도 영화의 마지막, 헨리를 가운데 둔 니콜과 찰리의 특별한 포옹이 한국 관객에게도 감동을 준다면, 그건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영화가 섬세하게 쌓아올린 시간의 힘 덕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