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의 주인공 그랜드 올 아프리 삼숙 사장과 강유가람 감독(왼쪽부터).
다큐멘터리 <이태원>의 주인공은 1970년대부터 이태원에서 산 삼숙, 나키, 영화 세 여성이다. <시국페미>(2017), <우리는 매일매일>(2019) 등 여성주의 시각으로 공간과 사람을 이야기해온 강유가람 감독은 2014년부터 <이태원>의 촬영을 시작했다. 세 주인공과 자주 만나기 위해 아예 작업실을 이태원으로 옮긴 감독은 긴 시간 세 여성의 일상을 공유했다. 인물과 친밀한 사이를 유지했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구체적이고 꾸밈없는 언어는 <이태원>을 특별하게 만든다. 강유가람 감독과 함께 세 여성을 만나려 했으나 매체에 자신을 노출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분도 있어 이들을 한자리에 모시지 못했다. 대신 영화의 주요 배경인 이태원의 클럽 그랜드 올 아프리에서 삼숙과 강유가람 감독을 만났다. 제8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제42회 서울독립영화제 등에서 공개돼 호평받은 <이태원>은 12월 5일 극장 개봉했다.
당신에게 이태원은 어떤 공간인가? 다양한 언어와 문화가 뒤섞인 이국적 지대, 분위기 좋은 브런치 카페가 있는 서울의 힙플레이스, 지구촌축제가 열리는 페스티벌의 공간. 혹은 ‘이태원 살인사건’이 발생한 정치적 현장, 트랜스젠더 바와 미군 대상 클럽이 모여 있는 밤문화의 동네. 한편 이태원을 표기하는 한자 중엔 ‘異胎院’이 있다. 다를 이(異), 아이 밸 태(胎)를 쓴 이 말은 임진왜란 당시 왜병들이 이태원에 있던 절의 여승들을 겁탈해 다른 씨앗이 잉태되었다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태원>(2017)의 강유가람 감독은 “이태원이란 지역에 대한 낙인의 시선은 한국 사회에서 오래전부터 존재했으며 미군 주둔 이후 더 심해졌다”고 말했다. 이태원의 성장은 용산에 들어선 미군기지와 무관하지 않다. 1970년대부터 미군 대상의 유흥업소가 대규모로 생겨나 ‘후커힐’이라는 거리가 형성되었고, 미군기지 이전 및 뉴타운 지정과 재개발 이슈는 이태원의 땅값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이 모든 설명은 이태원이라는 공간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역동성을 이해하려면 현상 너머의 역사를 살펴야 한다. 공간의 역사와 함께한 사람들의 삶까지도 말이다.
공간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하다
<이태원>은 이태원에서 살아온 세 여성인 삼숙, 나키, 영화의 삶을 통해 이태원이라는 공간을 들여다보는 다큐멘터리다. 이들은 모두 미군을 대상으로 한 유흥산업에 종사한 여성들이다. “이태원의 대장부” 삼숙은 1975년부터 미군 전용 컨트리클럽 그랜드 올 아프리(Grand Ole Opry)를 운영하고 있다. 10대 때부터 생선 장사를 하며 가족을 부양했고 미군과 결혼했으며 지금은 혼자가 되었다. 봉긋한 앞머리에 아이라인과 입술선을 강조한 메이크업 등 자신만의 스타일이 분명한 나키는 1970년대 말 이태원에 와 미군을 상대하는 클럽에서 웨이트리스로 일을 시작했다. 현재는 식당 설거지 일 등을 하며 생활하고 있다. 영화는 클럽에서 일하다 미군과 결혼했고, 미국에 갔다가 1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다. 미군과 결혼해 미국으로 간 여동생과는 연락이 끊겼고, 지금은 초등학생 조카를 돌보며 남동생이 보내주는 부정기적인 생활비로 살아간다.
강유가람 감독이 <이태원>을 찍게 된 건 인물이 아닌 공간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됐다. “용산참사 이후 용산을 둘러싼 여러 문제를 여성주의적으로 해석하는 워크숍에 참석했다. 그러면서 용산에서 이태원의 후커힐까지 걷기도 했는데 그땐 후커힐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몰랐다. 그러다 지인을 통해 나키님과 영화님을 소개받았다. 성매매 여성 지원•상담 단체인 막달레나의 집에 몸담고 있던 지인을 통해 나키님을 제일 먼저 만났다.” 처음엔 나키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구상했고, 그래서 지은 최초의 프로젝트 제목은 <러키 나키>였다. 강유가람 감독은 “전에 없이 힙해진 이태원이라는 공간에서 나이 들어가는 기지촌 여성이 이 공간의 변화를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이는지를 영화에 담으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애초의 의도는 다른 두 여성의 삶과 합쳐지면서 확장된다.
나키는 강유가람 감독에게 “이태원의 대장부 같은 사람이 있다”며 그랜드 올 아프리의 삼숙 사장을 소개시켜줬다. 자신의 클럽을 소유하기까지 ‘대장부’처럼 살지 않으면 안되었던 삼숙의 삶에서도 길어올릴 이야기는 많았다. 영화는 강유가람 감독의 편견을 깨는 인물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기지촌 여성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를 내면화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인물이 바로 영화다.” 나키, 삼숙, 영화가 차례로 카메라에 들어오면서 <이태원>의 이야기는 미군을 상대로 일한 여성들의 애환을 듣는 것에서 ‘이태원의 역사에서 조망되지 못한 삶’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삼숙은 자신의 클럽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공간에서 오래 살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은 미군기지의 이전으로 후커힐 상권이 쇠퇴하자 사라지거나 주변화되었다. 오랜 세월 이 공간을 일궈온 사람들인데, 이들의 역사가 편의주의적으로 삭제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같은 시기 같은 공간에서 일을 했지만 이들의 삶의 궤적은 저마다 다른 문양을 그린다. 공통된 것은 낙인과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삶에 대한 스스로의 자긍심과는 무관하다. 외부에서 날아드는 날카로운 말과 시선에 찔리지 않으려면 스스로 단단한 갑옷을 둘러야 한다. “한놈만 팬다”는 전술로 여러 명의 남자들과 싸워 이긴 나키나, “화류계 생활을 했으니 단 하루를 살더라도 미국에 갔다온다”는 신조로 미국에 다녀왔으니 후회는 없다고 쿨하게 말하는 영화나, 미국인 남편과 함께 길을 걸을 때 “늙은 여자도 양갈보”라는 소리를 듣고서도 흥분한 남편을 먼저 진정시키는 삼숙처럼. 이들은 스스로 선택한 삶에 책임지며 강인하게 살아왔다. 이 강인한 생활력과 생존력은 이들의 눈빛과 말투와 태도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 영화의 오프닝은 세 여성의 강인한 생활력을 보여주는 동시에 강인함 이면의 모습까지 보여주는 컷으로 콜라주되었다. 평소 기운 넘치게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던 삼숙은 남편이 세상을 뜨고 혼자 남은 뒤 유서처럼 남긴 셀프 비디오테이프에서 삶의 헛헛함을 고백하고, 절대 자신을 동정하지 않을 것 같은 영화의 뒷모습과 시선에선 고단함과 쓸쓸함이 느껴진다. 나키는 메르스 소독차가 지나가 자욱한 연기로 뒤덮인 거리에 불쑥 등장하는데, 가리려 해도 가려지지 않는 존재의 증명이 강렬하다.
갑옷을 두른 채 들려주는 과거의 회상보다 오래 잔상을 남기는 건 이들의 현재다. 그것은 ‘지금’의 이태원이 이들을 밀어내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태원>은 이태원의 과거와 현재, 공간과 사람의 역사를 병렬해 보여준다. 이를테면 <이태원>에는 나키의 과거와 현재가 있고, 이태원의 과거와 현재가 있다. 한때는 클럽에서 일하며 돈을 좀 만졌을 테고, 세상 무서울 것 없이 대차게 살았을 나키도 ‘젊은이들이 땅이 꺼지도록 모이는’ 이태원에선 예전처럼 살 수가 없다. 의료기기 체험실에서 허리 치료와 웃음 치료를 받거나 불교방송을 틀어놓고 마음 수련을 하는 나키는 매일매일 가파른 이태원의 계단을 오르내려야 한다. 그러면서 “철이 든” 자신을 대견해한다. 한편 일하던 식당의 사장이 근무시간을 갑자기 줄이는 바람에 수익이 줄어들자 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고민하면서 성형 얘기를 하고 거울 앞에선 인조 속눈썹을 붙인다. 나키가 보여주는 노년 여성의 불안정한 노동과 삶은 젊은이들이 웃으며 활보하는 이태원의 풍경과 유독 대비된다. 더불어 능력이 아닌 몸을 소비해야 했던 여성들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골목골목의 삶
이방인들에게 이태원은 유흥의 공간이다. 이태원에 터 잡고 살아온 이들에겐 이태원이 변한다 한들 여전히 소중한 정주의 공간이다. 이러한 대비는 세대간의 단절과 자본으로 인한 분리와 소외를 보여준다. 시간은 끊이지 않고 흐른다. 이태원의 시간도 계속해서 흐른다. 공간도 나이 들고 사람도 나이를 먹는다. 하지만 자본의 논리로 공간의 주인은 끊임없이 변한다. 단적인 예로 그랜드 올 아프리 맞은편 건물이 50억원에 팔린다. 이 소식은 동네의 주민들에게 빠르게 퍼진다. 이태원에 정착해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연속성은 자본에 의해 균열이 생긴다. 그럼에도 삼숙과 나키와 영화가 이태원에서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것은 네트워크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이곳엔 김치라도 나눠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주변의 네트워크가 이들을 여기 살게 하는 맥락이 된다. 이태원이 이들에겐 여전히 소중한 정주의 공간이라는 느낌을 주는 게 중요했다. 주민 정체성을 보여주고 싶어 현재의 삶과 노동을 보여주는 장면을 더 배치했다.”
<이태원>에는 이태원의 역사를 함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그 사람들은 역사에서 쉽게 배제되어온 성산업에 종사한 여성들이다. 동시에 <이태원>에는 자본이 사람을 밀어냄으로써 공간의 역사가 새로 쓰이는 일이 과연 타당한가에 대한 질문이 있다. 여기엔 자본주의사회의 취약계층인 노년 여성의 문제가 얽혀 있다. 강유가람 감독은 페미니즘을 경유해 이태원이라는 공간의 역사를 조망하며 서울 한복판, 다양한 언어와 문화가 뒤섞인 이국적이고 힙한 공간의 이면을 보여준다. SNS 감성이 아닌 역사와 삶이 있는 이태원 우사단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태원의 골목골목에 깃든 이야기가 ‘사람’의 이야기임은 말할 것도 없다.
●강유가람 감독은?
강유가람 감독은 “공간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켜 일련의 다큐멘터리 작업을 이어왔다. 초기의 중•단편 다큐멘터리 <모래>(2011)와 <진주머리방>(2015) 역시 공간에서 출발한 작품이었다. “주거의 문제에 늘 관심이 많았다. 어려서부터 이사를 자주 다녔고, 한 공간에 길게 머물러 산 적이 없어서 ‘나만의 공간’에 대한 생각을 자주 했다.” 공간에 대한 관심은 공간을 채우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시국페미>와 <이태원> 역시 특정 공간에서 배제되는 여성들의 이야기란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공간과 주거의 문제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중요하게 동원되는 시선은 역시 페미니즘이다.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한국경쟁부문 작품상을 수상한 <우리는 매일매일>은 과거의 페미니스트와 현재의 페미니스트까지, 다른 세대의 여성들과 접속을 시도하는 작품이다. 영화를 통한 페미니즘 운동의 지속은 강유가람 감독의 바람 중 하나다.
●<이태원>에 출연한 삼숙, “이 영화도 남자가 하자고 했으면 안 했어”
1940년생의 삼숙은 1975년부터 현재까지 이태원에서 외국인 상대 컨트리클럽 ‘그랜드 올 아프리’를 운영하고 있다. 클럽을 찾는 외국인들은 그녀를 마마킴이라 부른다. 소신 있고 배짱 있게 평생을 살아온 그녀는 하루도 빠짐없이 가게 문을 연다.
-영화 <이태원>, 어떻게 보셨나요.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영화를 봤는데, 내가 나올 때는 사람들이 깔깔대고 웃다가 중간에 다른 인물들이 나오면 시시하잖아. 그러니까 조용해. 감독은 따로 있는데 내가 막 감독을 했다고.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왜냐하면 클럽에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오잖아. 그거 보고 내가 배우는 게 많다고. 감독보다는 내가 여러모로 선배지. 45년을 여기서 일했으니까.
-그랜드 올 아프리 클럽은 언제 시작하셨어요.
=1975년 3월 24일. 날짜까지 그대로 기억해. 이 집을 2200만원에 샀는데 그 때 문산에서 돈 벌어서 600만원 들고 왔어. 은행에서 800만원 빌리고, 달러 장사를 하는 아줌마한테 800만원 빌리고. 처음엔 돈이 없어서 쩔쩔맸어. 몇년을 죽어라 일해서 빚 다 갚았지. 23살엔 죽으려고 절에도 올라갔어. 큰 스님이 날 보더니 “보아하니 죽으려고 온 것 같은데 네 이름이 뭐냐”고 하셨지. 그러더니 “오늘부터 김삼숙은 죽었다. 죽을힘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 내려가서 네가 하고 싶은 걸 다 하거라” 그러셨어. 정말이야. 죽을힘을 다하면 못할 게 없어. 그렇게 살았어. 여태 남한테 나쁜 짓 안 하고, 도둑질 안하고. 11살에 6•25를 겪었다고. 그 배고팠던 시절을 지나왔어. 나라를 위하려면 내가 먼저 잘해야 돼. 그걸 젊은 친구들한테 알려주고 싶어. 내 다큐멘터리를 찍는다 하니까, 감독한테도 마음에 있는 말을 다 해버린 거야. 영화를 통해서 젊은 친구들이 깨달았으면 좋겠어.
-45년간 클럽을 운영하며 흥망성쇠를 모두 겪으셨겠어요.
=88올림픽 때까지는 아주 잘됐지. 가게가 안되기 시작한 건 9•11 테러 때부터였어. 통금시간이 밤 10시니까 미군들이 어떻게 클럽에 오겠어. 그때 1년쯤 고생을 했지. 가게 처음 인수했을 때 깡패들이 가게에서 스트립쇼를 하라고 시키기도 했는데, 그까짓 깡패들은 아무것도 아냐. 나는 그런 건 못한다 했더니 이것들이 재떨이를 집어던지는 거야. 그거 맞고 우리 여동생이 이마를 꿰맸잖아. 열받아서 장도리 들고 쫓아내려갔지. 무섭긴 뭐가 무서워. 그런 깡패들이 무서우면 장사 못해. 생선 장수 할 때 인천의 깡패 오야지와도 싸운 사람이야. 거기에 비하면 얘네들은 깡패도 아냐.
-클럽 맞은편 건물이 50억원에 팔렸는데, 이 건물을 50억원 줄 테니 팔라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안 팔아. 100억원을 줘도 안 팔아. 돈이 문제가 아냐. 어차피 죽으면 빈손인데. 아직도 클럽에 나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있어. 손님들이 와서 “마마, 딴거 신경 쓰지 말고 건강하세요” 그런다고. 그러니 죽을 때까진 아무도 안 줘. 그런 낙으로 사는데, 이걸 팔아서 뭐 할 거야.
-10대 때부터 가족을 부양했는데요. 공부하고 싶진 않으셨나요.
=6•25 피난 갔다와서 13살 때부터 인천에서 벽돌을 팔았어. 그렇게 우리 동생 키운 거야. 나는 국민학교 4학년 책 받고 학교를 그만뒀거든. 배가 고파 죽겠는데 공부하는 게 문제였겠어. 그런데 공부를 못해서 영어로 편지가 오면 읽지를 못해. 그게 지금은 한이야.
-외국인과 결혼하고 이태원에서 미군을 상대로 클럽을 한다는 것 때문에 편견의 시선을 받거나 힘들진 않았나요.
=그런 말 신경 안 써. 내가 남자같이 생겨서 사람들이 무서워하거든. 다들 나를 아주 무서운 여자로 생각했어. 그리고 난 결혼도 처음 했고, 남자도 남편 하나뿐이야. 남자를 싫어해서 여자들 하고만 일했지. 남자는 질색이었어. 이 영화도 남자가 하자고 했으면 안 했어. 나는 속이는 건 질색이야. 나쁜 짓 해서 돈 번 것도 아니잖아. 우린 깨끗해. 그러니까 서슴없이 얘기할 수 있다고.
-꿈이 있으시다면요.
=소원은, 우리나라 국민들이 나같이 살아줬으면 좋겠어. 열심히 일을 하고,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세금도 꼬박꼬박 잘 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