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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현실이 삼킨 존재를 비추는 허구의 빛

김지영이 있는 풍경

<82년생 김지영>은 ‘영화’비평이 불가능하도록 찢긴 영화다. 영화의 운명은 영화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영화는 영화를 수용하는 사람에 의해 재창조되기 마련이다. 영화의 텍스트성이라 할 이것이 대개는 새로운 담론을 탄생시키는 긍정적인 행위라고 나는 여겨왔다. 그러나 영화를 둘러싼 이해할 수 없는 반응들은 때로는 수용자가 영화를 ‘창조적’으로 해석하는 행위가 내포한 부정적인 측면을 씁쓸하게 깨닫게 한다. 영화에 관한 생각은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영화를 보는 다른 시각을 던져주는 차원이 아니라 반대의 목소리마저 자신의 논리로 환원시키거나 영화를 왜곡한다면 그것은 묵과할 수 없는 문제가 된다.

영화를 둘러싼 오해와 논란들은 대부분 원작 소설 <82년생 김지영>으로부터 연속되었으므로, 논란에 관해 말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원작 소설을 언급해야 한다. 그중 서사를 둘러싼 대조적인 비판의 동시성에 관해 말해보려고 한다. 하나는 ‘어떻게 그 모든 일이 한 인물에게 일어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는 <82년생 김지영>의 서사가 픽션임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기에 주목된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취재와 통계에 기반하고 있음을 스스로 투명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논픽션에 가까운 소설이지 르포가 아니다. 이러한 비판은 서사 그 자체를 향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소비를 통한 여성들의 공감에 대한 자의적 해석에 가깝다. 또 다른 비판은 영화와 소설에 존재하는 인물 김지영이 모든 어려움 중에 자신이 겪은 어려움이 가장 힘든 것처럼 엄살을 부린다는 것이다. 영화와 소설 속 인물이 그렇게 발언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이를 비판하려는 의도로 간접적으로 언급한 것 외에 김지영의 서사를 빌려 자기의 경험이 가장 힘들다는 취지의 주장을 한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설사 그러한 발언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영화를 본 개인의 평가나 판단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 평가나 판단에 대해 비판하면 될 일이다. 그것을 소설과 영화가 그러한 주장을 하고 있다고 단정하는 것, 나아가 소설과 영화를 소비하는 행위 자체에 이런 틀을 씌우는 것은 우습다 말하기조차 힘든 일이다.

그것과 별개로 우울함과 억울함은 경중을 따질 수 없는 감정이다. 누군가의 마음에 티끌조차 남지 않을 일로 다른 누군가는 죽는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타인의 우울과 억울을 감히 자신의 경험 혹은 상상 속 타인의 것과 비교 대상에 올릴 수 없다. 사르트르는 <반유대주의와 유대인>에서 만일 단 한 사람의 유대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을 창조해내거나 만들어낼 것이라고 말했다. <82년생 김지영>을 둘러싼 사태에 관해서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단 한 사람의 페미니스트가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반페미니즘은 페미니스트를 창조해내거나 만들어낼 것이다. 영화에서 지영의 어머니 미숙(김미경)은 지영(정유미)에게 “나대, 막 나대”라고 말한다. 그러나 영화를 둘러싼 반응을 보면 ‘나대라’라는 말을 아무런 고민 없이 어떤 여성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은 아직도 요원함을 절감하게 된다. ‘나댐’이라는 이름의 투쟁이 변화를 만들리라는 믿음과는 무관하게 말이다.

보편성을 둘러싼 오해

통계는 통계일 뿐이라고 해도 소설 <82년생 김지영>에 쏟아진 지지와 공감은 서사의 보편성을 증명한다. 그러나 따지고 들면 이때 보편성은 어느 정도의 착각이나 각색의 기반 위에 가능해진다. 소설이 그 자체로 ‘평범하다’고 이야기되는 보통의 여성이 경험한 그대로를 반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소설은 각자의 경험이 떠오를 수 있는 일상의 무대를 제공한다. 어린 시절의 집, 바바리맨이 출몰하던 학교, 학원을 마친 뒤 집으로 향하던 어둑한 길, 첫 직장 출근길의 긴장과 설렘, 명절의 풍경, 집에 있는 시간, 커피숍, 공원과 같은 무대 말이다. 여성들은 김지영이 겪은 개별적인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이 일어날 수 있었던 ‘세팅’의 보편성에 공감한다(이 무대에 초대받지 못했다고 생각할 누군가는 그 속에 자신이 아는 누군가를 대입해보거나 최악의 경우 가장 혐오하는 대상으로의 여성을 집어넣기도 한다).

<82년생 김지영>의 보편성이 어느 정도는 만들어진 것이듯, 서사에 관한 공감 역시 경험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일화를 다룬 부분에서 가장 공감했다. 소설과 영화에서 공감한 장면은 각각 달랐는데, 소설에서는 지영이 거리에서 유모차를 밀고 커피 한잔을 든 채 산책하다가 직장인 무리에게 ‘맘충’이라는 비하 발언을 들었던 순간이 깊이 각인되었다. ‘누군가를 편의적으로 분류된 인물군에 맞추어 해석하고 그를 향해 혐오적인 발언을 내뱉는 행위는 얼마나 무례한가!’ 그 순간 그것이 얼마나 불합리한 판단에서 나온 혐오인가를 고스란히 체감했다. 반면 영화에서는 이를 다른 방식으로 보여준다. 초반 벤치에 앉아 있던 지영이 쑥덕거리는 직장인들을 피해버리는 것으로 짧게 처리한 뒤, 후반부에 소설에는 없던 카페에서의 극적인 상황과 이에 대한 대처를 삽입한다. 자신을 향해 ‘맘충’이라고 말하는 어떤 남자를 향한 지영의 일갈은 이상적이고 온건해 현실성이 떨어지는 교본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장면은 지영이 상담 도중 털어놓는 일화의 재현으로 등장한다는 점도 그렇다. 한편 이 장면은 “누가 현실에서 대놓고 ‘맘충’이라고 하냐”라는 흔한 통념에 대한 응답처럼 보인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실제로는 개념만큼 명징하게 분리된 채 존재할 수 없다. 온라인의 비아냥은 오프라인에서 누군가의 행위를 제약하거나 위축할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실제이기 때문이다. 지영의 차분한 대응은 ‘막말남’에 대한 지영의 무기가 오직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의) ‘말’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이는 동료의 ‘악플성 발언’에 일부러 커피를 쏟는 것으로 대응한 남편 대현(공유)의 직접적인 행위와는 대조된다. 이 시퀀스를 장악하는 건 꼿꼿하게 의견을 밝히는 김지영의 얼굴이다. 그러나 지영을 ‘맘충’이라 욕하던 일행이 사라지자, 그 공간에 아이를 안은 채 이들을 둘러싸고 있던 다른 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를 통해 누군가의 말을 호위한 것은 누군가의 말 없는 공감임을 보여준다.

영화에서는 지영에게 병증이 최초로 발현되는 순간에 울컥할 정도로 동요되었다. 그것이 끔찍한 병이어서가 아니다. 그 말이 나온 타이밍이 너무도 적절해서였다. 어느 명절, 남편의 여자 형제가 자신의 부모 집에 막 도착한다. 지영은 여전히 주방에서 일하는 중이다. 시어머니가 지영에게 먹을 것 좀 내오라고 시켰을 때, 갑자기 그녀는 어머니 미숙에 의해 빙의된 것처럼 시어머니를 사부인이라고 지칭하며 말한다. “딸이 왔으면, 제 딸도 보내주셔야죠. 저도 제 딸 귀해요.” 이것은 병증이기 이전에 일종의 판타지다. 자신의 딸이 소중하다는 이해가 누군가의 딸도 소중하다는 이해로 전환되지 않는 순간, 지영의 병증은 분리된 어머니를 통해 각자의 자리에서만 울리던 이야기를 한데 모아낸다. 그 판타지는 너무나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는 상황을 중지시키고 충격을 주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이 지영의 병증이 아니라 특별한 능력처럼 보였다. 이러한 환상의 순간은 지영이 외할머니에 의해 빙의된 채, 엄마 미숙을 위로할 때 정점을 찍는다. 그래서 지영이 자신만 피해자처럼 군다는 세간의 평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병증과 우울증을 곡해하거나 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영화에서, 소설에서 표출되는 방식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다. 비극적이게도 우리의 환상은 누군가의 병증을 경유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병증을 경유한 환상

지영의 병증은 극적 반전이 아니라, 기존의 상황 속에 공기처럼 스며든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지영의 캐릭터가 그려진 방식 때문이다. 지영에 관해 여성 캐릭터를 능동적으로 그려낸 최근의 여성 서사와 비교해 수동적으로 그려졌다는 요지의 비판을 보았다. 캐릭터에 관한 최종 판단에 동의하진 않지만, 이해 못할 반응은 아니다. 김지영을 연기한 배우 정유미는 자신의 캐릭터 연기 방식에 관해 ‘단순한 상태가 되어 최대한 나를 비우고 연기’했다고 전했다(<씨네21> 1228호, 커버스타 ‘<82년생 김지영> 정유미- 이야기를 만든 사람의 마음을 전한다’). 이것은 김지영의 캐릭터를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말처럼 들린다. 배우 정유미만큼이나 캐릭터 김지영 역시 일종의 비어 있는 공간이다. 그래서 김지영이라는 존재 속에 어머니도, 할머니도, 죽은 지인도 다녀간다. 나아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관객 역시 포용한다. 플래시백으로 삽입된 그녀의 과거의 편린들마저 동일한 인물의 다른 시점이 아니라 하나의 상황에 따른 개별 개체들의 반짝임처럼 느껴진다. 김도영 감독은 전작 <자유연기>(2018)에서 강말금 배우가 연기한 지연이 그러했듯 흔히 현실에 찌든 캐릭터가 있어왔고, 그럴 것이 예상되는 자리에 낯설도록 투명한 캐릭터를 가져다 놓는다. 영화가 보여준 지영이라는 캐릭터는 고착된 인물 재현을 중단하는, 그 자체로 하나의 발언이다.

영화가 김지영이라는 인물의 존재감을 영화에 새기는 방식은 그녀가 숨쉬는 순간을 통해서다. 영화는 그간 극적으로 표현되어온 ‘빙의’라는 현상을 잠깐의 휴지기와 호흡의 변화만으로 설득해낸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지영이 홀로 베란다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장면은 집 안 청소를 하는 다소 상투적인 단면들의 나열 이후에 등장한다. 지영의 휴식은 연속된 노동의 하나로 존재하는 대신 영화 전반의 공기를 일순간 뒤바꾼다. 그런 의미에서 베란다라는 공간은 지영이 호흡하는 공간이자 가장 영화적인 공간이다. 그곳은 집에 갇힌 지영이 바깥을 내다보는 현실의 공간이 아니라 바깥에서 안으로 지영에게 빛이 스미는 공간이다. 이때 빛은 현실의 햇살이 아니라 세공된 미술의 흔적이 엿보이는 어딘가 인공적인 빛이다. 피로와 우울이 깃든 지영의 얼굴을 비추는 빛은 그녀가 선 장소가 일종의 무대임을 일러준다. 무대로서의 투명한 베란다는 전체의 연극 속에서 무대 위에 오르기 직전에 잠시 숨을 고르고 들어가는 출입구 같은 공간이다. 이곳에서 나의 존재를 다독이고, 현실의 역할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한다. 영화가 도식성을 무릅쓰고 빛을 마주한 지영의 얼굴을 보여주며 막을 여닫은 이유 역시 현실의 장소에서 무대를 발견하고 그 무대 위의 배우에게 온전한 시간을 선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막이 내린 이후 다른 결말이 첨가된다. 기고가의 삶을 사는 김지영은 자기 이야기의 첫 문장을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이 문장은 실제 소설에서 가져온 것이다. 달리 말해 영화의 결말이 보여주는 건 소설에서 나온 영화가 다시 소설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이다. 주목되는 것은 이 과정에서 지영의 목소리로 소설의 문장이 발화된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제3자의 시선 아래 놓인 소설 속 지영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 지영으로 탈바꿈된다. 소설과 영화 속 김지영은 분리되는 동시에 새로운 연결성을 갖는다. 김지영의 목소리는 객관적 서술을 고백의 서사로 치환하는 동시에, 1인칭 고백체가 아닌 3인칭 화법을 고수한다. 김지영의 목소리가 배우 정유미의 목소리로 발화되는 순간, 캐릭터간의 접합과 분리에 더해 배우와 캐릭터의 관계 역시 연속되는 동시에 갈라진다. 이 때문에 지영의 자아가 가장 비대해지는 순간에, 지영은 배우로부터 분리되어 관객에게로 향한다. 분리되었으되 완전히 다르지 않고, 연결되었으되 완전히 같지 않은 캐릭터 창조의 세심함은 그 자신이 배우이기도 한 김도영 감독의 장점이 발휘된 결과다. 영화는 한 인간의 보고서에 가까운 선형 서사를 관계의 서사로 돌려놓았을 뿐 아니라, 영화를 넘어선 새로운 관계가 생성되는 양상을 내포한다. 어쩌면 이것은 오늘날 가장 핍박받는 서사를 구원하기 위한 가장 사려 깊은 방식의 연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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