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영화의 클리세가 지워진 영화, 그것이 바로 <하이 라이프>다. 클레르 드니는 일반적인 SF영화의 관습을 따라갈 마음이 없다. 에덴동산을 연상시키는 우주선의 정원을 비추며 시작한 영화는 자신만의 창세기를 써내려간다. ‘종의 종말’의 위기, 새로운 ‘종의 기원’을 모색하는 창세기, 그것이 바로 <하이 라이프>다.
자폐적 욕망의 창조주
7호 우주선에 탑승한 승무원들은 모두 사형수다. 죽음이 예정된 이들은 ‘재활용’이라는 미명하에 우주 실험에 동원된다. 그들의 첫 번째 임무는 블랙홀에서 에너지를 추출하는 것이고, 두 번째 임무는 인공수정을 통해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이들은 ‘도구로서의 삶’을 택함으로써 죽음을 잠시 미룬다. 영화는 왜 그들에게 이러한 임무가 부여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지만, 어쩌면 이 임무 자체가 인류가 처한 위기의 징표일 것이다. 실제로 플래시백을 통해 보이는 지구의 풍경은 사멸의 계절을 맞은 듯 삭막하고 을씨년스럽다. 우주선 안에는 지구에서 송출한다는 영상물이 나오지만, 그것이 지구로부터 온 것인지 우주선에 프로그램된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동일한 영상물이 반복된다는 점을 놓고 보면 후자의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고, 이는 지구의 생존을 장담할 수 없게 한다.
클레르 드니는 우주선을 폐쇄적인 공간으로 묘사한다. 밀폐된 사각의 박스형으로 디자인된 우주선의 모습 역시 이러한 느낌을 강화한다. 폐쇄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것은 공간만이 아니다. 우주선에서는 성행위가 금지되어 있고, 오직 자신의 몸을 스스로 자극하는 자위를 통해서만 성적 쾌락을 얻을 수 있다. 우주선이 폐쇄적이라면 인물은 자폐적이다. 실제로 (윌로의 출생 이후의 몬테를 제외한다면)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타인과 교류가 불필요한 (또는 불가능한) 자폐적 욕망에 빠져 있다. 자폐적 욕망에 갇힌 인간이 타인과 우호적 관계를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그들에게 타인은 욕망의 실현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더구나 <엑스페리먼트>(감독 올리버 히르비겔, 2001) 등에서 다루어졌듯이 외부와 차단된 폐쇄적 공간에서 욕망은 더 적나라해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서사의 양 끝에 위치한 인물이 딥스(줄리엣 비노쉬)와 몬테(로버트 패틴슨)다. 자신의 아이와 남편을 죽인 사연뿐만 아니라 머리를 허리까지 길게 내린 딥스의 모습은 그리스 신화의 메데이아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특히 자위방에서 묘사된 딥스의 모습은 원초적인 욕망에 자신의 몸을 제물로 바치는 ‘마녀의 제의’라 불러도 좋을 만큼 강렬하고 인상적이다. 딥스는 우주선에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임무에 집착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그 어떤 일도 서슴지 않는다. 그녀에게 동료 승무원은 인공수정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딥스는 선과 악의 도덕적 이분법 따위에 구속받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오로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어쩌면 그것이 클레르 드니가 이 세계의 ‘창조주’를 바라보는 태도일 것이다. 흥미롭게도, 클레르 드니는 오로지 자신의 목적만을 추구하는 자폐적 욕망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창조주와 메데이아를 한 인물에 겹쳐놓는다. 클레르 드니가 보기에 창조주는 인간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창조적 행위에 집착했을 뿐이다.
원죄를 이겨낸 삶
딥스와 반대 지점에 위치한 인물이 몬테다. 몬테는 자신의 애완견을 죽인 여동생을 죽였다. 어쩌면 클레르 드니는 ‘원죄 이후의 인류’라는 기독교적 서사를 우주공간의 우화로 펼쳐보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성행위 없이, 그리고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윌로를 잉태하고 출산한 보이스(미아 고스)는 성모 마리아의 메타포인 셈이다. 다만 클레르 드니는 보이스를 성스러운 어머니가 아닌 오로지 자기 목적의 실현만을 추구하는 창조주의 희생자로 여긴다.
딥스는 몬테의 몸에서 정자를 강제로 빼내 보이스의 몸에 넣는다. 흥미로운 것은 그 장면 이후에 등장하는 일련의 숏들이다. 마치 보이스의 자궁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는 듯한 숏에 이어 보이스의 뱃속에 잉태된 윌로의 모습처럼 보이는 실루엣이 무한의 우주와 겹쳐 보인다. 그리고 이어지는 윌로의 탄생. 클레르 드니는 우주라는 영도의 공간에서 새로운 생명이 발아하는 이 장면을 통해 미래라는 영도의 시간에서 우리가 어떠한 세계를 잉태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초반부에 몬테가 어린 딸에게 인형을 건네며 ‘터부’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은 <하이 라이프>를 이해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실마리 중 하나다. 특이한 것은 <하이 라이프>에서 터부를 지키는 일이 공동체의 안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구 분출하는 욕망을 통제하는 일종의 ‘자기 수련’ 과정처럼 그려진다는 점이다(그것이 몬테가 수도승이라 불리는 이유다). 딥스는 우주를 향해 자신의 몸을 던지기 전에 몬테에게 윌로가 그의 딸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이는 터부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유혹이며, 메데이아이자 창조주였던 딥스가 아담과 이브를 유혹한 ‘뱀’으로까지 그 정체를 확장한다는 의미이다(실제로 영화 속에는 딥스의 얼굴 위로 빛이 반사되어 뱀의 형상처럼 그려지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러한 면에서 <하이 라이프>는 자기 파멸로 향하는 자폐적 욕망과 자기 수련의 의지가 대결하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우주 방사선에 의해 잉태된 아이가 금세 죽어버리는 우주선 안에서 윌로가 탄생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긴 하지만, 클레르 드니가 궁극적으로 보여주려는 진짜 기적은 여전히 사람과 사람이 내밀한 관계를 맺으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에 있다. 그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터부를 지키는지 여부가 아니라 타인의 삶에 대한 충실성이다. 타인과 관계 맺기는 타인을 도구화하는 자폐적 욕망을 뿌리치는 일이자, 과거의 상처라는 거대한 괴물의 관성적 힘에서 벗어나려는 의지의 실현이다. 클레르 드니는 몬테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부터 현재의 시간에 불쑥 솟구치며 떠오르는 과거의 사건을 반복적으로 삽입한다. 몬테는 그렇게 과거의 상처에 사로잡혀 있다. 따라서 몬테가 윌로를 지켜내는 행위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잃고 복수심에 사로잡혔던 과거의 상처와 싸우는 일이고, 그리고 그것이 ‘몬테 크리스토 백작’에게서 그 이름을 빌려온 이유일 것이다.
절멸의 위기 앞에서 노아의 방주가 구원받았듯이, <하이 라이프>는 블랙홀을 향했던 몬테와 윌로에게 새로운 빛의 문이 열리는 것으로 끝맺는다. 그들이 당도한 곳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없다 해도, 그들이 이제 새로운 삶의 시작 지점에 서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면에서 <하이 라이프>는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의 또 다른 변주라 할 수 있다. 우주공간에서 새로운 종의 기원을 꿈꾸며 끝맺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물론 우리는 그들이 그 미지의 땅에 어떠한 욕망과 터부의 지도를 그려나갈지 알 수 없다. 동일한 것의 반복일까, 아니면 새로운 시작일까? 그 결정은 창조주의 영역이 아니라 살아남은 인간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