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토론토영화제는 전체 상영작의 36%가 여성이 감독/공동감독하거나 기획된 영화임을 자랑스럽게 밝혔다. 더불어 ‘여성의 여정에 동행하라’(Share Her Journey) 캠페인을 기간 내내 진행해 관객과 게스트들이 여성의 영화를 지원하는 모금에 참여하며 메시지를 보내고, 여성 영화인의 작품을 매표함으로써 후원하도록 유도했다.
<히든 피겨스> <콜레트> <세상을 바꾼 변호인> 등이 보여준 대로,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실존 여성 인물을 스크린으로 호출하는 영화는 여전히 트렌드다. <페르세폴리스>를 만든 마르잔 사트라피 감독의 <라디오액티브>는 과학자 마리 퀴리의 전기물. 영화는 1934년 연구소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후송되는 67살의 마리 퀴리의 머릿속으로 들어간다. 로저먼드 파이크가 연기하는 마리는 오만에 가까운 지독한 자아몰입도와 고집을 가진 천재다. 사랑하는 남편이자 연구 파트너 피에르 퀴리에게 그는 말한다. “당신의 지성은 훌륭해요. 우연히도 내 지성이 더 훌륭할 뿐.” 사트라피는 마리 퀴리가 어떤 성격의 여성이었기에 우리가 아는 위대한 과학자가 될 수 있었는지 보여준다. 남성 독점 클럽인 당대 과학자 사회를 실력으로 항복시킨 마리는, 피에르를 여읜 후 연애사건으로 손가락질 받을 때에도 고개 숙이지 않는다. 피에르가 자신의 충실한 후원자임을 알면서도 출산 직후 공동수상한 노벨상을 받으러 혼자 다녀온 남편을 뒤늦게 원망하는 모습이나, 소르본대 교수직도 죽은 남편에게서 계승했다는 결벽증적 갈등을 드러내는 장면은 어려서 읽은 위인전은 말해주지 않은 이야기다. 교과서적 전기물로 예상됐던 <라디오액티브>는 뜻밖에도 애니메이션 <페르세폴리스>의 영락없는 자매다. 회상의 액자 구조, 컴퓨터그래픽을 사용한 애니메이션적 판타지, 마리 퀴리의 생애 바깥에 일어난 방사능과 관련된 사건- 1954년의 히로시마와 1957년의 방사선 항암치료- 을 영화 속에 아우르는 역사적 관점이 그렇다.
아마존 스튜디오가 제작하고 톰 하퍼(<우먼 인 블랙>)가 감독한 <더 에어로너츠>(The Aeronauts)와 프랑스 감독 알리스 위노쿠르의 <프록시마>(Proxima)는 각기 19세기와 근접 미래를 배경으로 허구의 여성 캐릭터를 창공으로 쏘아올린다. <세상을 바꾼 변호인>의 펠리시티 존스는 <더 에어로너츠>에서 <사랑에 관한 모든 것>의 파트너 에디 레드메인과 팀을 이뤄 기구를 타고 인간의 비행 고도 기록에 도전하는 여성 아멜리아 렌으로 분했다. 아멜리아는 남편의 뒤를 이어 프로 기구 비행사가 된 소피 블랜차드와 영국의 기구 엔터테이너 마거릿 그레이엄 같은 실존 인물을 종합한 캐릭터. 에디 레드메인은 과학적 기후 예보를 연구하기 위해 성층권에 도전하는 과학자 제임스 글레이셔 역이다. 탐험 중 사고로 남편을 잃은 아멜리아는 제임스의 청으로 비행에 재도전하고, 자신이 하늘을 사랑한 이유가 사랑 때문만이 아니었음을 확인한다. 영화는 결정적 한 차례 비행의 이륙부터 착륙까지로 현재시제의 시간을 제한하고 초창기 기구 비행의 단순성과 위험성에서 서스펜스를 자아낸다. 파일럿 역의 펠리시티 존스가 액션을 전담하며 과학자 파트너를 지켜낸다. 플랫폼 부문에서 <마틴 에덴>에 이어 특별 언급된 <프록시마>는 에바 그린의 진면목을 즐길 수 있는 드라마이자 지면에 단단히 두발 딛은 SF다. 항공우주국 엔지니어이자 파일럿인 사라(에바 그린)는 프록시마 탐사계획에 대원으로 발탁돼 평생의 꿈을 이루지만 훈련과 탐사를 위해 이혼 후 혼자 키우는 8살 딸과 장기간 떨어져 있을 것이 근심스럽다. 반면 판이한 처지의 동료 남성 파일럿들은 “우리는 운이 좋다. 요리 잘하는 프랑스 여자가 동행하니” 같은 무례한 농담을 축사랍시고 던진다. <프록시마>는 <그래비티>의 샌드라 불럭이 우주로 쏘아올려지기 전에 겪었을 만한 과정을 그린다. 다국어 연기를 구사하는 에바 그린은, ‘우주 관광객’이라는 부당한 딱지와 싸우기 위해 완벽해지려는 강박과 멀어지는 딸을 붙들려는 안간힘 사이에서 분열하는 여성을 호연한다. <프록시마>는 우주에서 여성 비행사의 생리 문제까지 언급되는 꼼꼼한 프로세스 영화이며 젠더 관점의 변화가 동일한 소재에서도 얼마나 다른 이야기를 캐낼 수 있는지 입증한다.
<소녀는 어떻게 완성되나> courtesy of TIFF
여성 서사는 이제 훌륭한 여자들의 그것에 머물지 않는다. 캐나다 감독 헤더 영의 데뷔작 <웅얼거림>은 작은 발견이다. 와인병 코르크가 빠지지 않자 능숙하게 망치로 병목을 깨서 거름종이로 유리 조각을 거르는 모습으로 알코올중독자의 일상을 보여주는 오프닝부터 절묘하다. 음주운전의 벌로 동물보호소에서 사회봉사를 하게 된 노년 독신여성이 살아날 가망없는 동물을 하나둘씩 거두면서 애니멀 호더가 되어가는 과정을, 4:3 화면의 프레이밍과 최소한의 대사, 효율적인 이미지로 담담히 스케치했다. 영국 감독 코키 기드로익의 <소녀는 어떻게 완성되나>(How to Build a Girl)는 노리치 서민 가정의 글재주 있는 소녀 조애나(비니 펠드먼)가 교만한 젊은 남자들의 ‘클럽’인 록음악 비평계에 진출하는 이야기. ‘명랑 소녀 성공기’로 쾌활하게 달려가던 영화는 조애나가 10대다운 실수를 통해 무너지면서 관객을 조마조마하게 한다. 과연 소녀는 오류를 통해 성장할 수 있을까? 비니 펠드먼은 작은 돌개바람처럼 화면을 누비고 에마 톰슨의 카메오는 기다릴 가치가 있다. 일찍이 <와즈다>(2012)로 소녀영화와 사우디아라비아 영화사에 한획을 그은 하이파 알 만수르 감독의 신작 <완벽한 후보>(The Perfect Candidate)도 베니스국제영화제를 거쳐 토론토에 왔다. 여성 운전이 허락된 사우디아라비아가 배경인 <완벽한 후보>의 주인공은 의사 마리암(밀라 알 자흐라니). 세 자매의 맏이인 마리암을 괴롭히는 문제는 많지만 그중에서도 여성 의사보다 남자 간호사를 선호하는 환자들의 편견과 포장되지 않은 병원 앞 도로가 으뜸이다. 나은 일자리로 이직하기 위해 여행을 계획한 마리암은, 성인임에도 여성은 보호자 동의가 갱신돼야 출국할 수 있다는 규정에 걸리고 공무원 친척에게 부탁을 하러 간 길에 얼떨결에 선거에 입후보 등록하게 된다. 그러나 마리암이 공익을 말해도 유권자들은 그에게서 여자를 보고, 여성 시민들은 공감을 표하면서도 남편의 뜻에 따라 기권하거나 시키는 대로 투표할 거라고 말한다. <와즈다>의 자전거가 자전거 이상이었던 것처럼 마리암은 선거를 통해 여성의 정치 진출이 특정 문제를 해결하는 일회적 수단 이상임을 깨달아간다.
대부분의 영화는 남자가, 고전으로 꼽히는 영화의 대다수도 남자가 만들었다. 그러나 영화사 시초부터 여자들도 영화를 연출해왔으며 영화사 최고작의 일부는 여자들의 것이다. 우리는 여성의 영화에서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영국의 평론가이자 다큐멘터리스트인 마크 커즌스의 <여자, 영화를 만들다: 시네마를 여행하는 새로운 로드 무비>는 14시간에 달하는 여성 영화사다. 단 시대순으로 뛰어난 여성감독을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여성 영화 예술가들이 사랑, 죽음, 유머, 정치, 음악을 다루는 방식을 동서고금 183명 감독의 작품에서 골라낸 클립을 통해 예시한다. 감독이 빼어난 안목을 지닌 평론가라는 사실이 더없이 고마워지는 영화다. 한국 관객도 환대하지 않을까 상상해봤다. 만만찮은 러닝타임이지만 130년 여성영화의 내적 역사를 14시간에 황홀하게 일람할 수 있다면 유혹적인 거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