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여성감독들의 영화가 온다. 한국영상자료원은 8월 20일부터 9월 1일까지 시네마테크KOFA에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독일여성영화감독전’(이하 ‘독일여성영화감독전’)을 연다. 이번 기획전은 한국영상자료원이 베를린국제영화제(이하 베를린영화제) 회고전 섹션을 맡고 있는 도이체 키네마테크, 주한 독일문화원과 함께 주최하는 행사로, 울라 슈퇴클의 1968년작 <아홉번의 삶을 사는 고양이>부터 크레세티아 뒨서, 마르티나 되커가 공동 연출한 1999년작 <나의 피부아래>까지 독일 여성감독들이 연출한 12편의 영화를 상영한다. 특히 이들 상영작은 <아홉번의 삶을 사는 고양이>, <모든 면에서 축소된 인격-리듀퍼스>(1978), <독일 자매>(1981)를 제외하면 모두 국내에서 처음으로 소개되는 독일영화이기에 주목할 만하다.
<자전거> ⓒDEFA Stiftung, Dietram Kleist
베를린을 뒤흔들었던 화제의 라인업
'독일여성영화감독'’의 상영작 대다수는 올해 2월 열린 베를린영화제 회고전 섹션에서 먼저 관객을 만난 바 있다. 근래의 베를린영화제는 회고전 섹션을 통해 독일 여성감독들의 커리어를 재조명하고 그들이 남긴 작품의 의미를 새롭게 정립하고 있다. 이에 따라 영화제는 ‘독일 1966’을 주제로 서독 여성감독들의 초기 커리어를 조명한 2016년 회고전에 이어 올해는 ‘스스로 결정하다. 여성감독들의 시각’(Self-determined. Perspectives of woman filmmakers)이라는 슬로건 아래 동독, 서독, 통일독일 시기에 등장한 주목할 만한 독일 여성감독들의 작품을 소개했다.
한국영상자료원의 ’독일여성영화감독전’이 선보이는 작품 12편 중 11편은 올해 베를린영화제 회고전 상영작 가운데 “제작 시기와 작품의 스타일, 주제적인 측면을 폭넓게 고려해 여성감독들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엄선한 것”이라고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팀의 오성지 팀장은 말했다. 그의 말처럼 ‘독일여성영화감독전’의 상영작은 시기별로는 1968년부터 1999년까지, 동독, 서독, 통일독일에서 제작된 여성감독의 작품이 고르게 분포되어 있으며 작품의 형식 또한 극영화부터 다큐멘터리, 실험영화까지 다양하다. 베를린영화제 회고전에서 소개되지 않은 작품 중 이번 기획전에서 상영되는 1편은 동독 감독 헬케 미셀비츠가 연출한 <겨울에의 작별>(1988)이라는 다큐멘터리로, 독일 다큐멘터리 특유의 진솔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기에 상영작으로 선정되었다는 후문이다. 오성지 팀장은 이들 12편의 작품이 “관객에게 도전 의식을 요하는 영화”라고 말한다.
<겨울에의 작별> ⓒDEFA Stiftung, Michael Loewenberg
통렬하게 사회를 비판하고 당대의 담론을 지적으로 사유하는 독일 여성감독들의 작품은 서사영화의 기승전결에 익숙한 관객에게 다소 이질적이고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독일 여성감독들의 작품은 여러모로 한국 관객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오성지 팀장은 덧붙였다. 그들의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여성의 입지에 대한 문제의식, 분단을 경험한 국민으로서 정체성의 문제”는 현재의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고민과도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독일영화사에서 여성감독의 존재가 대중에 알려지기 시작한 건 무성영화 시기의 일이다. <제복의 처녀>(1933)를 연출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출신의 여성감독 레온티네 사간과 실루엣애니메이션의 창시자 로테 라이니거, 천재 다큐멘터리 감독과 나치를 위한 선전영화 연출자라는 두 가지 면모를 가진 논쟁적 감독 레니 리펜슈탈이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여성감독들이 본격적이고 지속적으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건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다. 독일이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어 있던 1960년대 말, 동독에서 여성감독들은 국가가 운영하는 포츠담-바벨스베르크의 영화학교와 동독영화주식회사(이하 DEFA)의 스튜디오 시스템을 통해 영화를 만들었다. 이전까지 동독에서 여성 연출자에게 주로 할애됐던 영화가 어린이 관객을 대상으로 한 작품이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1960년대 말 이후 등장한 동독 여성감독들의 영화에 담긴 사회비판적인 문제의식은 대담하고도 놀랍다.
<아홉번의 삶을 사는 고양이> ⓒStiftung Deutsche Kinemathek
이번 기획전에서는 이리스 구스너 감독의 <지붕 위의 비둘기>(1973), 에벨린 슈미트 감독의 <자전거>(1982), 헬케 미셀비츠 감독의 <겨울에의 작별> 등 동독 출신 여성감독 세명의 영화를 만날 수 있다. 먼저 <지붕 위의 비둘기>는 동독의 여성 해방을 주창하고 여성의 역할을 탐구한 이리스 구스너의 데뷔작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동독 남부 건설 현장의 관리자로 일하는 여성이 주인공으로, 그는 학생 신분의 열정적인 청년과 공사 현장의 베테랑 인부의 구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에만 몰두한다. 이 작품은 ‘노동자 계급의 뒤틀린 이미지’를 보여준다는 이유로 동독에서 상영이 금지되고 컬러 네거티브필름이 파기되는 등의 수난을 겪었다. <자전거> 또한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다. 동독에서 각박한 삶을 살아가던 싱글맘이 딸의 병원비조차 내지 못할 상황에 처하자 보험료를 받기 위해 거짓으로 자전거를 잃어버린 척하며 벌어지게 되는 소동을 다루고 있다. DEFA 스튜디오의 마지막 시기에 활동했던 에벨린 슈미트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계급과 성차별이 없는 사회를 지향한다는 동독 사회의 이상이 여성에게는 신기루에 불과했음을 폭로하고 있다. <자전거>는 동독 사회의 어두운 면을 담았다는 이유로 해외 영화제 출품이 금지됐다. <겨울에의 작별>은 통일을 앞둔 동독 사회의 여성들을 있는 그대로 담아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다큐멘터리다. DEFA 스튜디오에서 극영화를 연출하고 싶었으나 거절당한 헬케 미셀비츠 감독은 다큐멘터리로 눈을 돌려 <겨울에의 작별>을 만들었다. 그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1년여 전, 기차를 타고 동독을 가로지르며 다양한 연령과 배경을 가진 여성들을 인터뷰했다. 가출한 두명의 펑크족 소녀, 활발한 사교댄스 강사, 결혼 50주년을 맞은 83살 여성 등 미셀비츠의 카메라를 마주한 동독의 다양한 여성들은 그들의 공적·사적 문제, 꿈과 소망을 이야기한다. <겨울에의 작별>은 <자전거>와 마찬가지로 모든 분야에서 평등을 주장했던 동독 사회의 실체를 날카롭게 폭로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처럼 동독 여성감독들의 영화는 폐쇄적인 사회주의국가의 한복판에서 저항의 목소리를 높였던 여성 창작자들의 저력을 발견할 수 있게 한다.
<나는 하와이를 자주 생각한다> ⓒStiftung Deutsche Kinemathek
한편 서독에서는 1968년 유럽을 휩쓴 학생운동, 여성운동과 뉴저먼 시네마의 새로운 물결 속에서 다수의 여성감독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2차 세계대전을 여성의 관점으로 이야기하고 68혁명의 좌절된 꿈을 논하며 서독 사회 속 여성의 입지에 대해 가차 없는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등 다채로운 활약상을 보여주었다. 이번 기획전에서 상영하는, 비전문배우를 기용하고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 기법을 극영화에 도입하는 등 전통적인 영화 문법에 반기를 든 여성감독 울라 슈퇴클의 <아홉번의 삶을 사는 고양이>는 서독 최초의 페미니즘영화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은 전문직 미혼 여성, 이혼한 뒤 미래를 걱정하는 여성, 남편에게 배신당한 여성 등 다섯 여성의 일상과 성적 욕망, 판타지를 몽환적인 필치로 보여주고 있다. <독일, 창백한 어머니>로 국내 관객에게도 잘 알려진 거장 감독, 헬마 잔더스 브람스의 <포석 아래 해변>(1975)은 68혁명 이후 방황하는 연인을 조명하며 정치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의 충돌을 이야기한다. 사회적 변혁을 꿈꿨으나 68혁명 이후 크게 달라지지 않은 현실에 당황한 연인은 낙태 법안을 위한 투쟁을 새롭게 시작하려 하지만, 갑작스러운 임신 소식에 혼란을 겪는다. 성, 정치, 사랑, 노동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심도 깊은 질문을 던지는 이 작품은 ‘독일 페미니즘 운동의 컬트작’으로 평가받는다. 1970~80년대 독일 여성운동과 여성영화 담론을 주도한 헬케 잔더의 <모든 면에서 축소된 인격-리듀퍼스> 또한 이번 기획전에서 만날 수 있다. 분단된 도시 베를린을 배경으로 여성 예술가, 엄마, 친구, 시민으로 살아가는 한 여성의 초상이 펼쳐진다. 헬케 잔더는 여성주인공 에다를 직접 연기하며 독일 사회 속 여성 예술가가 처하게 되는 현실을 자기반영적인 필치로 보여준다. 사회복지사 출신의 감독 헬가 라이데마이스터의 <운명인가?>(1979)는 그가 서베를린 위성구역에 거주하는 노동자들과 함께 만든 다큐멘터리다. 장애 연금에 의존해 베를린 변방의 복지주택에서 살고 있는 48살 이레네 라코비츠 가족의 일상을 비추는 이 작품은 카메라 앞에서 이토록 가감 없이 가족의 치부를 폭로한다는 게 가능할까 반문하게 되는 논쟁작이다. 독일 여성촬영감독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엘피 미케쉬의 다큐멘터리 <나는 하와이를 자주 생각한다>(1978)는 <운명인가?>와 흡사하게 베를린 변방의 주택가를 조명하나 흑백, 컬러 이미지의 대비와 여성주인공의 독특하고 화려한 의상, 나른한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 등 감각적이고 시적인 연출 스타일이 인상적이다. 뉴 저먼 시네마의 대표적인 여성감독인 마가레테 폰 트로타의 <독일 자매>는 독일 적군파의 일원이었던 여성 구드룬 엔슬린의 삶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적군파로서 그의 활동보다 엔슬린 자매의 우정에 초점을 맞춘다.
지빌레 쇠네만 감독과의 대화
<잠금된 시간> ⓒDEFA Stiftung, Michael Loewenberg
통일 이후, 독일 여성감독들은 변화하는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러한 변화가 여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까지 질문을 확장했다. 지빌레 쇠네만 감독의 <잠금된 시간>(1991)은 감독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작품으로, 분단과 통일의 순간을 온몸으로 관통한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1984년에 더이상 동독에서 원하는 영화를 만들 수 없게 되자 서독으로 이주 신청을 한 쇠네만 감독은 국가안전교란죄로 12개월형을 받는다. 그는 풀려난 뒤 감방 동기, 교도관, 판사, DEFA 스튜디오의 디렉터, 변호사 등을 찾아가 자신을 기억하겠냐고 묻는다. 분단국가에서 여성이 겪어야 했던 수난, 그 고통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현실은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8월24일 <잠금된 시간> 상영 뒤에는 쇠네만 감독이 내한해 관객과의 대화를 가질 예정이다. 더불어 베를린영화제 회고전 큐레이터이자 도이체 키네마테크의 원장을 맡고 있는 라이너 로터가 한국 관객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고 ‘독일여성영화감독전’ 상영작을 소개하는 시간도 마련되어 있다(자세한 내용은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 참조).
“요컨대, 여성이 도착한 그 어디에나, 아주 짧은 시간에, 혼란과 충격 그리고 흥분되는 일만이 일어날 뿐이다.” 독일 여성감독 헬케 잔더가 남긴 말이다. 그의 전언처럼 기획전에서 소개한 독일 여성감독들은 드라마틱했던 20세기 독일 역사의 변곡점을 함께하며 시대의 풍경을 조망하고,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며,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해내고, 자신과 다른 여성들의 삶을 카메라를 통해 기록함으로써 역사가 간과했던 ‘허스토리’를 그들만의 시선으로 써내려갔다. 지극히 사적이면서 지극히 정치적인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