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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 조소연 큐레이터의 <지옥화>
조소연(큐레이터) 2019-08-13

'나쁜 여자, 이상한 여자, 죽이는 여자'의 시작

감독 신상옥 / 출연 김학, 조해원, 최은희 / 제작연도 1958년

나는 운명론자는 아니다. 운명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선택, 어떤 노력을 하느냐에 따라 어느 정도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 편이다. 하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만난 소중한 사람들 또는 사건들을 떠올려보면, 운명이라는 것이 아예 없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현재 오랜 기간 몸담고 있는 한국영상자료원도 내게 운명처럼 다가왔다. 졸업 후 5년여간 모 기관에서 일하면서 ‘내가 과연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회의감에 갈팡질팡하고 있을 무렵, 우연히 알게 된 한국영상자료원은 한순간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마어마한 콘텐츠가 쌓여 있지만 그 진가가 아직 드러나지 않은 곳, 영화를 소재로 한 도서관, 박물관, 미술관이 합쳐진 것 같은 곳, 보람과 재미를 느끼며 일할 수 있을 것 같은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채용 공고가 떴고, 고맙게도 영상자료원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다. 운명이라는 것이 없다면 영상자료원과의 인연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입사 후 일주일간 부서를 돌며 교육을 받게 되었는데, 당시 상영 담당 부서에서 영상자료원 후원 행사가 열리고 있던 안국동 아트선재센터의 서울아트시네마로 교육생들을 데려갔고, 그곳에서 관람한 영화가 바로 신상옥 감독의 1958년작 <지옥화>다. 영화 보기를 즐겨하긴 했지만 한국고전영화에 대한 관심과 경험이 거의 없었던 당시, 극장 스크린을 통해 처음 접한 흑백영화 <지옥화>는 그야말로 놀라움 그 자체였다. 특히 5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지옥화>의 여주인공 쏘냐(최은희)의 과감하고 능동적인 모습,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모습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신선했다. 쏘냐는 미군 남성에게 성을 파는 여자로, 어떠한 죄의식이나 부끄러움 없이 그저 남성들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삼는다. 그녀가 ‘여보’라고 부르는 기둥서방 영식(김학)은 미군의 PX 물건을 훔쳐 살아가고, 영식을 찾으러 고향에서 올라온 순수한 동생 동식(조해원)은 쏘냐의 유혹의 대상이다. 쏘냐는 동식과의 새로운 삶을 꿈꾸며 영식을 배반하고 죽음으로 내몰지만, 영식의 손에 죽는다.

분명 ‘나쁜 여자’임이 분명한데, 왜 나는 쏘냐의 이미지와 행동에 매혹당한 것인지, 그 충격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했고, 한국 고전영화에 대한 긍정적인 호기심이 생겨나는 계기가 되었다. 마음 한구석에 한국영화 속에 재현된 ‘여성 캐릭터’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고, 언젠가 기회가 되면 <지옥화>의 쏘냐를 포함한 멋진 여성 캐릭터들을 다뤄보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이러한 충격은 2005년 중국전영자료관에서 발굴돼 모습을 드러낸 1936년작 <미몽>의 애순(문예봉)을 통해 또 한번 경험할 수 있었다. 2003년 입사 이후 KMDb 구축, VOD 서비스, 디지털시네마 아카이빙 도입, 파주보존센터 건립, 필름 디지털 복원 등 새로운 일들을 만들어가며 충분히 기쁘고 보람된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했지만 올해 초 뜻하지 않게 한국영화박물관 전시업무를 맡으면서 갓 입사했을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옥화>를 보며 들떴던 마음이 생각났고, 급기야 전시 주제를 한국영화 속 ‘악녀’로 정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본의 아니게 전시 홍보를 하게 되어 민망하지만, 기획전시 <나쁜 여자, 이상한 여자, 죽이는 여자: 여성 캐릭터로 보는 한국영화 100년展>이 한국영화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기획 의도에서 밝힌 바와 같이 여성 캐릭터에 대한 관심과 담론이 확장되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면 더이상 바랄 게 없겠다. 뭔가 원풀이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후련하다.

●조소연 큐레이터. 한국영상자료원 연구전시팀 차장. 한국영화박물관 전시 큐레이터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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