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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말싸미> 조철현 감독, "가장 가까운 세 사람의 갈등, 충돌, 화해가 핵심이다"
장영엽 사진 최성열 2019-08-01

“품격의 영화. 의미가 재미를 넘어선다.” 조철현 감독의 오랜 영화적 동지인 이준익 감독은 <나랏말싸미>를 보고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의 말대로, 무엇보다 재미를 우선으로 하는 여름영화 대전에서 <나랏말싸미>가 차지하는 위치는 꽤나 독특하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 스님의 도움이 있었다는 가설로부터 출발한 이 작품은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는 이들의 치열한 연구와 고뇌를 세밀한 필치로 보여준다. 조철현 감독은 이러한 선택이 필연적이었다고 말한다. “세종대왕이 위대하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나는 그의 위대성이 어떻게 형성되어 완성되어가는지 그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나랏말싸미>는 <황산벌>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평양성> <사도> 등 이준익 감독 영화의 제작자, 각본가, 기획자로 이름을 알린 조철현 감독의 첫 영화 연출작이다. 책상을 떠나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었다는 그는 최근 고 전미선 배우의 안타까운 죽음, 출판사로부터의 상영금지 가처분 소송, 역사 왜곡 논란(인터뷰 이후의 시점이다)을 연달아 겪으며 혹독한 데뷔전을 치르는 중이다. 그러나 <나랏말싸미>에는 영화인 이전에 인문학 애호가인 감독의 내공과 환갑이 넘어 데뷔하는 신인 연출자의 진정성이 담겨 있다.

-그동안 제작자, 기획자, 각본가로 참여한 작품의 개봉을 숱하게 경험했다. 연출작의 개봉을 기다리는 마음은 좀 다른가.

=많이 다르다. 연출을 한다는 건 감독의 내면과 재능이 다 드러나는 거잖나. 그걸 들키는 것에 대한 걱정이 아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또 <나랏말싸미>는 시장에서 관객과 호흡하며 좋은 성과를 내려고 만든 영화인데, 제작자, 투자자, 배우, 스탭 등 그분들의 경력에 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걱정 때문에 마음이 굉장히 무겁고 잠이 안 온다. 내가 40대였다면 ‘다음에 또 잘하면 되지’ 생각할 텐데, 환갑에 영화감독이 되니 다음에 더 잘해서 보상할 기회조차 없을까 걱정된다.

-감독이 되니 어떤 점들이 새롭게 다가오던가.

=늘 궁금했다. 신인감독들이 현장에 가면 급격히 말수가 적어지고 힘들어하는 이유 말이다. 왜 그러냐고 물어봐도 다들 대답도 잘 안 하고 씩 웃기만 하더라. 이번 영화를 만든 뒤에야 왜들 그랬는지 알게 됐다. 감독이 되면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없다. 프리 프로덕션 과정에서 생각나는 대로 아이디어를 던졌다가 스탭들이 내 말을 듣고 뭔가를 준비해오는 경험을 몇번 해보니 아찔했다. 현장에서 감독이 말을 많이 하면 재앙이 된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영화 촬영을 시작하는 첫날, 내가 머릿속에서 그렸던 장면을 현장에서 그대로 구현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등골에 식은땀이 쫙 흘렀다. 책상머리에서만 영화를 하다 현장에 가보니, 모든 감독님들이 무척 훌륭하게 느껴졌다. (웃음)

-영화적 동반자 이준익 감독에게 들은 조언은 없나.

=이준익 감독에게 물어봤다. “영화 연출은 어떻게 해야 해요?” 그랬더니 “아, 뭐 고민하지 마. 시나리오 쓰고 캐스팅 완료하면 80~90%는 끝나는 거야. 거기서 뭘 더하려고 하면 안 돼”라고 하더라. “그럼 나머지 10%는요?”라고 물으니 “그것도 고민하지 마. 가서 하다보면 알게 돼” 하는 거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현장에 가서야 깨달았다. (웃음) 내가 머릿속에서 그리던 상상의 세계를 버리고, 지금 배우와 스탭들이 현장에서 만들어내는 순간 중 한 컷을 선택하는 것. 그게 감독의 역할이더라. 노자의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는 구절을 현장에서 비로소 이해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 훈민정음 창제 과정을 소재로 한 영화를 구상했다고 들었다.

=사극영화의 소재를 찾던 중, 우리나라의 가장 자랑스럽고 위대한 업적이라고 생각했던 훈민정음 창제 과정을 왜 아무도 영화로 만들지 않는지 의아했다. 언젠가는 팔만대장경과 훈민정음에 대한 사극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으로, 훈민정음과 관련된 시중의 책은 거의 다 읽은 것 같다. 또 음운학 권위자인 최영애 교수님을 만나뵙고, 세종대왕이 눈병 치료를 위해 머문 초정리에서 마을 소년에게 한글을 가르친다는 내용의 동화 <초정리 편지>의 판권을 구입해 각색을 시도했다. 그러다가 <사도>의 개봉 즈음 인문사회과학 서적 출판사 휴머니스트에서 팟캐스트를 진행한 인연으로 역사책들을 보내줬다. 그때 받은 책 중 <용재총화>에 언급된 훈민정음과 산스크리트어의 관계가 흥미로웠다. 마침 존경하는 선생님께 신미 스님의 평전 <훈민정음의 길: 혜각존자 신미 평전>을 쓴 박해진 작가를 소개 받았는데, 이 평전에는 신미 스님이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 관여했을 거란 추측이 나와 있었다. 팔만대장경과 훈민정음, 세종대왕과 신미 스님의 관계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이 영화는 시작됐다.

-세종과 신미 스님이 우리말 소리를 수집하고 분류하며 압축해나가는 과정에 대한 묘사가 굉장히 상세하다. 상업 사극영화로서는 대담한 시도였다는 생각이 든다.

=맞다. 어찌 보면 굉장히 모험적이고 도발적인 시도일 수 있다. 문자를 만드는 과정을 영화로 만든다는 게 말이다. 하지만 나는 훈민정음이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게 아니라, 학문적으로 굉장히 정교하고 치열한 연구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언어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 훈민정음에는 음운학, 음성학, 언어학뿐만 아니라 수학, 기하학, 천문학의 원리가 다 들어가 있다. 오죽하면 전세계 언어학자들이 지구상의 문자 하나를 타임캡슐에 담아 보낸다면, 한글을 선택하고 싶다는 말을 하겠나. 이처럼 세상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간단명료하며 쉬운 언어가 과학적인 사고와 분석, 철저한 연구의 과정을 통해 탄생했다는 점이 현재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외세의 압박, 신하들의 반대 등 한글 창제를 둘러싼 외적 갈등을 최대한 배제한 채 세종대왕과 신미 스님, 소헌왕후의 행보에 주목한다.

=그렇다. <나랏말싸미>는 가장 가까운 세 사람 사이의 갈등과 충돌, 화해가 핵심인 드라마다. 이 영화에는 외부의 안타고니스트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도>의 시나리오를 쓴 뒤 내러티브적으로 좀더 진전된 방식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내면의 갈등과 욕망을 가진, 서로가 서로의 동지이자 적인 사람들의 관계를 다뤄보고자 했다. 영화에서 세종대왕은 죽음에 다가갈수록 수도승처럼 변한다. 마치 목숨까지 내던져 진리를 구하려 하는 수도승처럼, 세종은 자신의 모든 걸 다 내걸고 새로운 언어의 창제에 힘쓴다. 반면 역적의 가문 출신으로 조선이라는 사회에서 더이상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었던 신미는 세종을 만나 문자를 만드는 과정에서 품위를 되찾게 된다. 영화가 전개될수록 두 사람의 언어가 닮아간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거다. 소헌왕후는 충돌과 갈등으로 인해 파국으로 치닫는 두 사람의 관계를 복원시켜주는 존재인 한편, 훈민정음 창제를 도우며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넘어서고자 하는 복합적인 인물이다.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사가 아름답다. 오랜만에 대사의 말맛을 음미할 수 있는 영화가 나온 것 같다. 시나리오 작업은 어떻게 진행했나.

=<사도>를 함께한 이송원 작가가 메인 작가를, 금정연 작가가 보조 작가를 맡았고 나는 감독으로서 두 사람의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시나리오를 완성할 때까지 내가 세종 역할을, 이송원 작가가 신미 역할을 맡아 아이디어를 냈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당뇨, 고혈압, 눈병 등 세종대왕이 앓았다고 알려진 병을 나도 앓아왔다. 그러다보니 이러한 질병이 세종의 심경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송원 작가는 기질적으로 신미와 굉장히 비슷했다. 둘이서 상대방의 감정 밑바닥까지 후벼파며,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싸우기도 하면서 대사를 만들었다. 대사가 액션이고 사건이며 심리인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금정연 작가는 서평가로 더 유명한데, 영화사 아침 직원의 남편이라 내가 결혼식 주례를 섰던 인연이 있다. 순발력이 뛰어나고 세련된 어휘를 구사하는 분이었다.

-배우 송강호가 병들고 지친, 그러나 강한 정신적 의지를 가진 세종대왕을 연기한다.

=이번 작품에서 감독과 배우로 만나 함께 작업하며 송강호씨에게 많이 놀랐다. 세종을 표현할 때 자신의 희로애락을 바깥으로 안 드러나게끔 하려고 끊임없이 감정을 억누르더라. 그런 강호씨의 연기를 통해 세종의 번민과 고통, 그리고 품격이 고스란히 보는 이에게 전달되는 걸 느꼈다. 세종이 아들에게 “나는 내가 죽은 다음에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불멸의 자취를 남기고 싶다”고 고백하는 장면이 있는데, 강호씨가 대사를 끝까지 안 하고 중간에서 끊더라. 따로 디렉션을 주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당뇨병 때문에 망막이 아파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연기하면서. 이건 거의 신의 경지에 가까운 연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해일 배우는 절도 있고 왕 앞에서도 단호한 신미 스님으로 분했는데.

=관객에게 진짜 스님처럼 보이고 싶다, 최소한 스님을 연기하는 느낌을 안 주고 싶다는 걸 본인 연기의 베이스로 삼더라. 머리를 삭발하던 날부터 마지막 촬영이 끝날 때까지 단 한순간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절에 가서 스님들과 함께 생활했는데, 당신들보다 더 스님 같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또 두상이 매우 아름다워 스님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다. (웃음) 특히 해일씨의 서서 걸어가는 뒷모습이나 앉아 있는 뒷모습은 감탄스러울 정도로 진짜 스님 같았다.

-전미선 배우가 연기한 영화 속 소헌왕후의 모습은 그의 안타까운 죽음을 떠올리게 하더라.

=우리에게는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었다. 영화의 내용과 고인이 처했던 현실이 뒤섞이는 느낌을 받아서 견디기가 굉장히 힘들다. 나는 그분과의 작업이 정말 좋았다. 현장에서 누굴 힘들게 하는 모습을 한번도 못 봤다.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을 편하게 해줄까 배려하며,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조용히 분위기에 스며드는 분이었다. 젊은 스탭들에 대한 배려도 대단했다고 전해 들었다. 여러모로 소헌왕후와 비슷한 성품을 가진 분이었다. “소헌왕후의 대사 속에 평상시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다”는 얘기를 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자신의 마음을 너무 점잖게 억누르고 계셨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백성들은 더이상 당신을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왜 이제 와서 신하들 눈치를 봅니까”라는 소헌왕후의 대사를 직접 만들기도 했다.

-<훈민정음의 길: 혜각존자 신미 평전>(저자 박해진)을 출판한 도서출판 나녹은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나랏말싸미>의 상영금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이에 대한 입장을 듣고 싶다(인터뷰 이후인 7월 23일, 영화사 두둥은 재판부가 “영화 <나랏말싸미>는 <훈민정음의 길: 혜각존자 신미 평전>의 2차적 저작물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고 전했다).

=<훈민정음의 길: 혜각존자 신미 평전>은 신미 스님의 일대기를 성실히 잘 정리해놓은 참고자료라 생각한다. 평소 사극을 만들며 인문학자, 역사학자의 저술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그분들을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하고 존중한다. 그래서 <나랏말싸미>의 시나리오 기획 단계에서도 평전의 저자인 박해진 작가에게 상당한 자문료를 지급하고 좋은 대우를 해드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 책이 이 영화의 원안이라고 볼 수는 없다. 신미 스님에 대한 연구는 이전에도 있어왔고, 평전에 기술된 신미 스님의 일대기를 영화적 이야기로 구체화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재판까지 가지 않고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려 했으나, 그러지 못해 안타깝고 아쉽다.

-신미 스님은 세종대왕에게 “타협할 때가 있고 하늘이 무너져도 원칙을 지켜야 할 때가 있다”고 말한다. 첫 영화를 연출하는 과정에서 타협과 원칙의 순간이 있었다면.

=원칙이 있었다. 훌륭한 배우, 스탭들을 뽑았으니 그들의 말을 따르자는 거다. (웃음) 내가 결정할 수 없을 때에는 그들의 느낌을 따르고, 쓸데없는 고집으로 토를 달지 말자는 게 원칙이었다. 그 원칙을 지켰더니 현장이 무척 재미있고 즐거웠다. 전반적으로 한국 스탭들의 수준이 굉장히 높다. 현장에 가보니 좋은 이야기와 열린 마음만 있으면 신인감독도 일정 수준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어 있더라.

-앞으로의 계획은.

=최근의 관심사는 현상적으로 보이는 비주얼, 표정, 눈빛, 사운드, 목소리를 통해 무의식의 어떤 지점이 노출되는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거다. 단순히 한 장면만 그런 게 아니라 전체 구조 속에 무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작품을 해보고 싶다. 사극에 한정하지 않고, 다양하게 가능성을 열어두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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