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의 영화가 장르를 변주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봉준호의 영화에서 중요한 지점은 장르를 변주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장르 변주의 필연성에 있다. 이 필연성으로 인해 봉준호의 영화는 영화를 사유하는 영화가 된다. 지난 <씨네21> 1210호 <기생충> 비평 기획에서, 김영진 평론가가 이미 지적했듯, 봉준호는 “삶이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또 다른 형태의 프로파간다”로서의 장르를 이탈한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장르적 규범은 현실을 왜곡하는 프로파간다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추리물은 근대적 사법제도와 합리적 이성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사건 해결을 통해 사회가 다시 안정을 찾는 결말이 있어야 한다. 이런 장르는 사회의 불합리에 대한 일종의 예방주사인 동시에 사회의 불합리가 교정되고 있다는 믿음을 주는 보수적 프로파간다이기도 하다. 만약 봉준호의 영화처럼 경찰이 진범을 찾는 것에 관심이 없거나, 피의자들을 고문해서 범인을 찾으려 한다면 이 장르는 추리물에서 벗어나게 된다. 봉준호의 장르 변주가 보여주는 것은 장르에 담을 수 없는 현실의 비합리성이자 장르의 한계점이다.
<플란다스의 개>(2000)에서부터 장르 이탈이라는 봉준호의 특징은 명확히 드러난다. 이 영화는 살해범을 뒤쫓는 탐정영화에 대한 변주인데, 변주의 시작점은 희생자가 인간이 아니라 강아지라는 사실이다. 즉 경찰은 강아지 실종 사건에 관심이 없기에 아파트 관리실 경리 직원인 현남(배두나)이 대신 나서게 되는 것에서부터 장르 변주가 시작된다. <마더>(2009)도 마찬가지다. 경찰은 진범을 찾는 데 관심이 없기에 피의자의 엄마(김혜자)가 탐정 역할을 수행하게 되지만, 그녀의 위치로 인해 진범을 밝히는 데 실패하게 된다. <플란다스의 개>에서의 희생자는 강아지고, <마더>에서 희생자는 가난한 여학생이지만, 국가가 보호하지 않는 생명이라는 점에서 양자는 다르지 않다. 또한 이 점에서 <살인의 추억>(2003)의 희생자들, <괴물>(2006)에서의 강두(송강호)의 가족 또한 이들과 다를 바 없다. 인간은 동물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며, 봉준호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노숙인은 동물과 같은 인간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어울리지 않음의 문제
<플란다스의 개>에서 노숙인은 진범 대신 잡힌다는 점에서 희생자이지만, 희생자인 강아지를 잡아먹는다는 점에서 가해자이기도 하다. 포식자로서 그저 살기 위해 인간을 잡아먹었던 <괴물>에서의 괴물과 유사하며, 또한 자식을 살리기 위해 타인을 죽이는 <마더>에서 엄마와도 비슷하다. 돌연변이 괴물이자 도시를 파괴하거나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옥자>(2017)의 옥자와도 비슷하다. 다시 말해서 봉준호 영화에서 가해자 또한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따라서 가해자와 희생자는 이분법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법의 보호 바깥에 있는 자들이다. 이 점은 <기생충>에서도 반복된다.
<기생충>에서도 동물의 모습을 한 인간들이 등장한다. 기택(송강호)은 꼽등이 혹은 바퀴벌레에 비유된다. 기택은 꼽등이를 잡기 위해 방역가스를 집 안으로 들이지만 괴로워하는 것은 기택의 가족들이다. 근세(박명훈) 또한 네발로 기어 올라가는 벌레의 이미지로 등장한다. 주인이 아닌 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벌레처럼 혹은 귀신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여야 한다. 이들은 혐오스러운 존재인 동시에 보이지 않는 존재이기에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문광(이정은)의 결핵처럼 근거 없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연교(조여정)와 동익(이선균)은 문광이나 기택의 삶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문광이나 기택이 한명의 인간으로서 자신 앞에 존재하길 원치 않는다. 봉준호 영화가 장르의 규범을 벗어나는 이유는 영화 속 인물들이 장르의 규범이 요구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생충>의 초반부, 기택은 피자 박스를 능숙하게 접는 영상 속 사람을 흉내낸다. 겉보기엔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박스를 회수하러 온 피자 가게 사장은 4개 중 1개의 비율로 제대로 접히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기택은 겉모습만 흉내냈을 뿐 실질까지 따라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기택뿐만 아니라 기우(최우식)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말과 행동 같은 보이는 것들은 따라하지만 보이지 않는 냄새를 지우지는 못한다. 기우는 자신이 들고 다니는 산수경석처럼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기우는 기정(박소담)이 동익의 저택과 잘 어울린다고 말한다. 동익과 기정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해고당한 윤 기사의 삶에는 관심이 없다는 점, 그리고 나중에 살해당한다는 점이다. 이 두개의 사실은 인과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정은 해고된 윤 기사를 걱정하는 기택에게 윤 기사를 걱정하지 말고 우리 걱정만 하자며 소리친다. 이때 마치 천벌이라도 내리듯이 천둥이 치고 비가 쏟아진다. 이것은 실제로 천벌인데, 비 때문에 동익의 가족이 집으로 돌아오게 되고, 이로 인해 다친 문광을 그대로 두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고, 근세가 복수로 기정을 살해하기 때문이다. 비만 오지 않았어도, 혹은 어떤 계획을 세웠다면, 기택과 근세는 서로 화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기택에게는 계획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장르의 규범이 요구하는 인간은 계획을 세우는 자들이다. 어떤 상황 속에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인간들이다. 그러나 계획이란, 미래가 보장된 사람들이 세우는 것이기에 한치 앞의 미래를 볼 수 없는 기택은 계획을 세울 수 없다. 이것은 기택이 사회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회에서 배제된 자들은 장르의 규범에도 속할 수 없다.
기택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모른다. 이 점은 영화를 보는 관객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돈을 벌어 동익의 저택을 사겠다는 기우의 계획이 허황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은 안다. 그러나 기우가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모른다. 관객은 기택과 기우처럼 무력할 뿐이다. 이것은 정치적이다. 즉 영화라는 허구속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부유한 사람들의 횡포에 저항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보다, 우리는 모두 기우처럼 힘이 없는 존재이며, 추방당한 사람들이라는 점을 자각하는 것이 더 정치적인 일이다. 긴 잠에서 깨어난 기우는 끝없이 웃는다. 현실이 마치 거대한 농담이나 코미디 같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부르주아적 무기력과는 다른 종류의 무력감과 불쾌감이 발생한다.
복기를 통해 알게 되는 것들
요컨대 <기생충>은 실패하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다. 우연히 사건에 휘말린 인물들은 필연적으로 실패하고 인물들의 실패는 장르의 실패로 이어진다. 장르의 실패라는 이질감 앞에서 관객은 왜 실패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기 위해 영화를 복기하게 된다. 복기를 통해 인물들의 실패의 이면에 있는 것들을 보게 되고, 그때 비로소 영화는 끝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