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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리스>가 비극적인 세계와 단절된 우리의 모습을 비추는 방식

상실의 망각과 마주하기

<러브리스>의 내용은 단순하다. 사랑하지 않는 부부, 그 사이에 한 아이가 있다. 자신이 부모에게 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아이는 그다음 날 종적을 감춘다. 남편과 아내는 아이를 찾기 위해 애쓰지만 아이는 결국 찾지 못한다. 영화의 중요한 지점은 존재가 아니라 부재에 있다. 문제는 이 부재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하는 점이다.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존재일 뿐이기에 부재는 존재를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다. 즉, 부재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할 자리를 보여주는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영화평론가 김소희는 “부재의 시간은 부모가 수색구조 단체와 함께 숲과 폐건물, 병원을 옮겨 다니며 알로샤(마트베이 노비코프)를 찾는 장면으로 채워진다”고 말한다 (<씨네21> 1204호 <러브리스> 영화비평). 부재가 현현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찾아 공간을 떠도는 주체가 있어야 한다. <리바이어던>(2014)의 빈 공간은 부재를 찾아 떠도는 주체의 자리에 관객을 위치하게 한다. 따라서 빈 공간을 응시하는 관객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상실했다는 점을 깨닫게 되는데, 여기서 관객은 또 다른 불쾌한 자각과 마주한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알지만,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모른다는 점이다.

이들의 연애는 쇼핑과 다르지 않다

러시아 문화부 장관 블라디미르 메딘스키는 <리바이어던>이 비현실적이며, ‘진짜 러시아’를 보여주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러브리스>는 국가 폭력을 직접적으로 지칭하기보다는, 좀더 보편적인 비판, 예컨대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인간성 상실을 지적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메딘스키의 비판과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러브리스>의 보편성은 특수성 내부에서 발현하고 있다. 이 점은 <리바이어던> 또한 마찬가지다. <리바이어던>이 그리는 공간은 지역적인 의미에서 러시아가 아니었기에, <리바이어던>이 ‘진짜 러시아’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메딘스키의 비판은 틀리지 않았지만 유용한 비판도 아니다. 즉 <리바이어던>의 질문은 ‘러시아란 어떠한가?’가 아니라, ‘러시아란 무엇인가?’ 혹은 ‘러시아란 존재하는가?’였다.

안드레이 즈뱌긴체프 감독은 <리바이어던>에 이어 <러브리스>에서도 국가의 부재를 지적한다. 예를 들어 <리바이어던>에서 경찰은 시장의 무단침입에 항의하는 콜랴(알렉세이 세레브리아코프)를 유치장에 감금하고, <러브리스>에서 경찰은 아이의 실종에 무관심하다. 공권력이 국민을 위해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리바이어던>의 제목 ‘리바이어던’은 단지 부패한 시장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부패한 시장의 횡포를 막을 수 있는 국가(리바이어던)의 부재를 말하고자 함이다. 이 부재 속에서 인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늑대가 된다. <리바이어던>의 인물들이 겪고 있는 신경증, 그리고 <러브리스>에서 제냐(마리아나 스피바크)와 보리스(알렉세이 로진)의 신경증과 그들이 매몰된 각자도생이라는 신화 또한 국가의 부재와 무관하지 않다.

국가와 국민의 관계는 부모와 아이의 관계와 유사한 지점이 있다. 즉 제냐와 보리스가 국가와 맺고 있는 관계는 알로샤가 제냐, 보리스와 맺고 있는 관계와 유사하다. 따라서 알로샤가 제냐와 보리스의 방치에 의해 추방될 수 있다면, 제냐와 보리스는 국가의 방치에 의해 추방될 수도 있다. <리바이어던>이 보여주는 것은 후자의 지점이다. 국가는 국민에 대해 (부모가 아이에 대해 그러하듯) 억압하거나 보호하는 위치에 있으며, 종종 양자는 구별이 힘든 모습으로 나타난다. 제냐는 (보리스의 표현에 따르면) “스탈린 같은” 엄마에게서 도망치려고 보리스와 결혼했다. 제냐의 엄마가 제냐를 억압하는 사람이었다면 제냐는 알로샤에게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것은 러시아에 대한 환유이기도 하다(마지막 장면에서 제냐는 ‘러시아’라고 쓰여 있는 옷을 입고 있다). 제냐와 보리스는 (부재하는 국가의) 국민인 동시에 알로샤에게는 부재하는 국가 자체이기도 하다. 국가는 국민의 의식에 영향을 미치고, 국민은 다시 국가의 부분을 이루는 순환적인 관계가 형성된다. 공권력의 무능 앞에서 권력은 자본으로 넘어간다. 보리스는 회사의 방침 때문에 이혼을 하지 못하고 화목한 가정을 연기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회사는 직원에게 업무와는 상관 없는 익스트림 스포츠를 강요하기도 한다. 예전의 러시아가 국민들에게 요구했던 특정한 정체성을 이제는 회사가 직원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개성이 다양해진 것이 아니라 강요가 다양해졌을 뿐이다. 영화는 보리스와 동료가 밥을 먹는 과정을 이상할 정도로 오래 보여준다. 그들은 한줄로 서서 빵이나 수프, 음료 따위를 선택하고 계산을 한 뒤 밥을 먹는다. 그리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어길 수 없는 회사의 방침에 대해서다. 그들은 빵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는 자유를 가지지만, 이혼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자유를 가지지 못한다. 또한 보리스와 마샤(마리나 바실레바)가 마트에서 쇼핑하는 장면도 계산하는 모습까지 자세히 보여주고 있는데, 이들의 자유와 선택이 오직 마트 안에서만 가능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진부한 일상에도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다르게 말하면 일상의 진부함은 인간을 부품으로 만드는 보이지 않는 힘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진부함은 삶을 파탄으로 이끄는 원인이기도 하다.

보리스가 자신을 무화하는 참을 수 없는 진부함으로부터 도피하는 방법은 연애였다. 또한 그런 보리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제냐가 선택한 방법 또한 안톤(안드리스 카이스)과의 사랑이었다. 제냐는 엄마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보리스와 사랑에 빠졌던 것처럼, 언젠가는 안톤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다른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또다시 안톤과의 사랑을 부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보리스와 제냐의 사랑은 징후적이며, 그렇기에 사랑 또한 진부함 그 자체가 되고 만다. 이들의 연애는 쇼핑과 다르지 않다.

세계에 대한 부적응의 징후

영화는 파편화된 공간을 통해 단절된 인물들을 표현한다. 알로샤가 있었던 파편화된 공간은 세계와 접속되지 못한 알로샤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파편화된 공간을 방황할 수밖에 없는 제냐와 보리스 또한 알로샤처럼 세계와 접속하지 못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뉴스에 등장하는 폭격 당한 사람의 울부짖음은 제냐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또한 제냐와 보리스의 히스테리, 영화 마지막에 드러나는 피로와 절망감은 세계에 대한 부적응의 징후다. 다시 말해 알로샤의 부재가 드러내는 것은 제냐와 보리스의 부재하는 세계다. 영화의 마지막은 처음에 알로샤가 있었던 공간으로 돌아간다. 지금은 텅 빈 공간, 죽은 공간이 된 장소다. 이 죽은 공간을 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그 공간을 방황했을 알로샤의 시선과 일치한다. 알로샤의 시점으로 본 텅 빈 공간에 부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의 부재, 관계의 부재다. 또한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세계의 부재다. 즈뱌긴체프가 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어떤 비극이 아니다. 비극적인 세계와 단절된 우리의 모습을 영화라는 거울을 통해 비춰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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