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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 유태경 감독의 <열혈남아>
유태경(영화감독) 2019-05-07

엇갈림의 멜로

감독 왕가위 / 출연 유덕화, 장만옥, 장학우 / 제작연도 1988년

나는 하숙생으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갓 상경한 대학 새내기 시절, 하숙집에서 선배들의 머슴(?) 생활을 했는데 그들은 밤에 나를 종종 불러 재밌는 이야기를 시키곤 했다. 처음 며칠은 무사히 넘겼지만 레퍼토리는 바닥났고 재미가 없거나 준비된 얘기가 없으면 난감했다. 몇주 뒤 새로 선배 한명이 입주했는데 그와는 늘 영화 이야기를 나누며 잠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로드쇼>나 <스크린> 같은 영화 월간지를 탐독하던 나였지만 대학에서 학사경고를 받아가며 영화 생각만 하던 선배가 해주는 얘기는 신세계가 따로 없었다. 그런 선배 덕분에 비디오방에서 재발견한 영화가 <열혈남아>(원제 <몽콕하문>)다. 이미 중학생 때 친구집에 모여서 봤던 영화다. <영웅본색>이나 <첩혈쌍웅>을 기대했던 친구들에게 온갖 비난을 들었지만 이 영화를 몰라본다고 스스로를 위안했던 경험이 있다. <열혈남아>는 다른 홍콩영화들과 달랐고 비현실적이지만 지극히 현실적이며 설익은 청춘과 닮았다. 그래서 이 영화와 왕가위 감독이 좋아졌다.

어린 시절 사람을 죽이고 뒷골목 건달로 살아가고 있는 소화(유덕화)는 불안하지만 자신을 따르는 동생들을 보살피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어느 날 먼 친척뻘인 아화(장만옥)가 병원을 다니러 소화 집에 머물고, 아화는 거칠고 불안한 모습의 소화에게 연민과 애정을 느낀다. 소화 역시 아화를 마음에 두지만 자신의 불안한 미래를 함께할 수 없을 거라 직감한다. 멜로는 엇갈림의 서사다. 김영하 작가가 어느 글에서 “엇갈리지 않고 오다 가다 만나면 그건 텔레토비지 멜로가 아니다”라고 얘기했던 게 기억난다. 사실 멜로가 엇감림의 서사라는 대목보다 텔레토비는 오다 가다 만날 수 있나, 라는 궁금증으로 기억되는 문장이지만 아직도 멜로를 대할 때면 슬며시 떠오르는 말이다. <열혈남아>는 내게 멜로영화다. 필연적으로 비극으로 끝날 걸 알면서도 마음 한쪽에서 엇갈리지 않기를 러닝타임 내내 바라면서 보게 된다. 이 영화에는 두 가지 엇갈림이 있다. 첫째는 소화와 아화가 보여주는 사랑의 엇갈림이다. 애초에 소화는 사랑 때문에 다른 걸 저버릴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화는 번번이 엇갈리는 결정을 하지만 그런 소화에게 나 역시 연민을 느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소화와 창파(장학우)가 보여주는 의리의 엇갈림이다. 잠시라도 영웅으로 살고 싶어 하는 창파는 자신이 믿고 따르는 소화를 위해 잘해보려 하지만 매번 일을 그르치면서 상황을 비극으로 몰고 간다. 나의 대학 초년 시절은 엇갈림에 대한 감상에 몰두하던 시기였다. 감정이 풍부해서 그랬을까. 나의 불안한 미래에 대한 고민을 그런 식으로 소독하며 지냈던 것 같다.

가끔 대학 시절 감정에 흠뻑 빠져 써놓은 글들을 읽게 될 때가 있다. 그 문장은 나 스스로도 낯설 만큼 짙은 감정들이지만 억누르지 않은 솔직한 감정들로 채워져 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는 망설여지지만 날 나처럼 이해해줄 것 같은 사람들에게는 꺼내 보이고 싶은 글들이다. 내게 <열혈남아>는 그런 글들과 같은 영화다.

유태경 영화감독. VR툰 <조의 영역> <살려주세요>를 연출했다. 현재 중앙대학교 예술공학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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