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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신과 함께
김혜리 2019-05-01

*<퍼스트 리폼드>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일런스>

폴 슈레이더의 옛 동료 마틴 스코시즈의 <사일런스>(2016)는 <퍼스트 리폼드>와 훌륭한 동시상영의 짝을 이룰 법하다. 1640년 예수회 신부 세바스티안 로드리게즈(앤드루 가필드)는 박해가 극심한 일본에 도착한다. 숨어 살며 동굴에서 말씀을 전파하지만, 고문으로 느리게 죽어가는 신도들의 비명과 노회한 관리의 회유, 배교한 선배 신부의 논리는 로드리게즈를 시험한다. 그런데 기나긴 간구에도 응답하지 않던 신은, 거꾸로 매달려 죽어가는 신도를 살려주는 대가로 예수의 부조를 밟으라는 명을 받은 신부 곁에서 비로소 침묵을 깬다. “나를 밟아라. 나는 밟히기 위하여 세상에 왔으니.” <사일런스>의 하나님은 승리하는 영광의 신이 아니라 약한 인간을 위해 우는 신이다. 적절하게도 스코시즈는 로드리게즈가 보는 예수 이미지로 엘 그레코의 여위고 창백한 예수 초상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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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슈레이더는 비평가로서 예찬했던 영화의 모티브들을 드러내놓고 ‘리폼’했다. 톨러 목사(에단 호크)는 로베르 브레송의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1950)의 병든 신부처럼 술에 의존하며 일기로 스스로를 분석하고 무자비하게 반박하고 의혹을 표하고 다시 지운다. 그리고 지운 흔적을 지우지 않는다. 잉마르 베리만의 <겨울빛>(1963)의 목사 토마스가 그랬듯 가족을 잃고 회의에 빠져 있으며 세속적 행복을 주겠다고 다가오는 여성을 가혹하게 밀어낸다. 토마스는 핵으로 인한 종말을 두려워하는 신도를 상담하고 톨러는 환경 파괴에 절망한 교구민을 카운슬링한다. 그러나 <퍼스트 리폼드>는 갈데없는 2010년대 영화고 미국의 이야기며 감독 슈레이더의 집대성이다(디지털로 촬영된 <퍼스트 리폼드>는 고전적인 1.37: 1 화면 비율을 취하는 동시에 필름과 유사한 톤을 추구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디지털 이미지를 보여준다). 250주년을 맞는 톨러의 교회는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의 그것과 달리 영적 길잡이 기능을 잃고 21세기 미국 거대 교회에 관리받는 관광지다. 교회를 구경하러 온 한 남자는 톨러 목사에게 팁을 건넨다. 한편 톨러는 <겨울빛>의 토마스 목사와 달리 환경운동가 마이클의 절망에 감염되고, 나아가 미수에 그친 마이클의 테러를 완수하는 행위를 삶의 마침표로 선택한다. <퍼스트 리폼드>에서 세상의 종말은, 신경증의 산물이나 계시록의 예언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긴박한 위협이다. 톨러는 “이런 어둠은 새롭지만, 어둠 자체는 새롭지 않다”고 타이르지만 그 역시 알고 있다. 우리는 지구의 남은 수명에 관한 구체적 수치를 받아든 최초의 세대라는 것을. 인명 살상이 포함된 톨러 목사의 마지막 계획은 말할 것도 없이 기독교 정신에 반하지만, <보혈에 씻김 받았나요?>(Are You Washed In the Blood?)라는 제목의 극중 찬송가가 드러내듯, 피로 정죄한다는 관념은 기독교의 오랜 잠재의식이기도 하다.

착시를 일으키기 쉽지만 <퍼스트 리폼드>는 최근 유럽과 아시아 예술영화를 논의하는 주요 개념으로 쓰인 슬로 시네마에 속하지 않는다. 폴 슈레이더는 ‘일물일어설’을 신봉하는 시인처럼, 필요하다고 판단한 길이의 정확한 이미지를 이어나간다. 장식품은커녕 커피 테이블 하나 없는 톨러의 거처처럼. <퍼스트 리폼드>의 사물들은 반드시 쓸모를 다한다. 걷어낸 철조망은 가시 면류관으로 쓰이고 배관 세제는 극약의 구실을 한다. 1.37:1 비율의 프레임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인물이 들고 나는 방향을 의미심장하게 만든다. 톨러는 (관객 시점에서) 프레임 왼쪽에서 교회 철조망에 걸린 토끼의 사체를 발견하고, 마이클의 시신을 발견한다. 얼마 후 마이클의 아내이자 흔들림 없는 신자인 메리(아만다 사이프리드)와 나눈 초월적 경험으로 계시를 받은 톨러는, 동틀 때까지 바깥에서 배회한다. 오염된 부두에서 바다를 바라보다 프레임 왼쪽으로 빠져나간 톨러는 다시 화면으로 들어와 그동안 진홍으로 변한 하늘을 응시한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고 톨러는 반대 방향으로 프레임을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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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리폼드>에는 리얼리티를 초월하는 두 차례의 에피소드가 있고 모든 계기는 메리다. 하나는 메리와 죽은 남편이 마음의 평화를 위해 치렀던 ‘마술적 미스터리 여행’의 의례다. 두 사람이 옷을 입은 채 몸을 맞대고 누워 눈동자 움직임까지 일치시키는 이 의식을 통해 톨러의 정신은 공중 부양하고 신이 의도한 대로의 아름다운 자연을 본다. 그러나 거기서 멈출 수 없는 톨러는, 구태여 얼굴에 드리워진 메리의 머리칼을 걷고 ‘휘장’ 밖을 본다. 인간으로 말미암아 신음하는 대지의 풍경은 톨러에게서 찰나의 지복을 걷어가고 결단을 요구한다. 두 번째 초월적 사건은 마지막 장면이다. 본래 폴 슈레이더는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처럼 목사가 죽음을 맞고 십자가가 프레임에 남는 엔딩을 고려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 평론가의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식 결말은 어떻겠느냐?”는 말에 깨달음을 얻어 현재의 엔딩을 연출했다. 환경오염 기업 사주를 포함한 주요 인사가 모이는 교회의 250주년 봉헌식에서 자살 폭탄 테러를 준비하던 톨러의 눈에, 예기치 않게 예배당으로 들어서는 만삭의 메리가 보인다. 어떤 저울질도 없이 즉각 폭탄조끼를 벗어던진 톨러는 대신 자신에게 최대한의 고통을 줄 가시철망을 두르고 (예수의 성의를 연상시키는) 흰 로브를 걸친다. 그리고 위스키 잔에 독을 따른다. 그러나 홀연히 문턱에 나타난 메리를 본 그는 잔을 떨어뜨리고 메리와 뜨거운 포옹과 키스를 나눈다. 포옹이 깊을수록 가시도 깊이 박힐 것이다. 카메라 역시 지금까지 미동도 삼가던 내적 규율을 완전히 벗어나 한 덩어리가 된 둘의 주변을 격렬히 휘돈다. 같은 시각 예배당에서 성가대가 부르고 있는 찬송가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가 사실적 볼륨을 넘어선 크기로 영화를 덮는다. 화면 밖 음악도 아니지만 정확히 화면 안 음악도 아닌 셈이다. 이 장면을 실제로 일어난 일로 받아들이고, 살아 있는 특정한 인간에 대한 사랑이 구원으로 통한다는 메시지를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슈레이더는 메리가 문턱에 출현하기 직전 다른 목사가 톨러를 찾아 목사관 문고리를 돌리다가 실패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현관이 잠겨 있음을 알린다. 메리가 열쇠를 갖고 있을 가능성도 거의 없다.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는 <오데트>를, 죽은 여인이 예수를 자처하던 ‘미친’ 남자에 의해 부활하는 기적으로 맺었다. 폴 슈레이더 역시 설명을 생략하고 인과율을 뛰어넘는 초월적 형식을 인용하지만 톨러의 기적은 이미 독을 들이켠 그의 비전이거나, 환상과 리얼리티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영화가 창조한 차원에서 벌어지는 사건처럼 보인다. 이 의견은 <오데트>의 엔딩에도 적용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게 <오데트>의 기적은 세계 자체가 들림을 받는 엑스터시였던 반면, <퍼스트 리폼드>의 그것은 ‘이후’를 결코 떠올릴 수 없는 마침표였다. 다시 말해 폴 슈레이더는 끝나는 시점까지 나를 정확히 톨러의 죽음을 향해 데려갔기 때문에, 영화가 끝난 후 살아남은 톨러를 상상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퍼스트 리폼드>의 마지막 숏은 정확히 말해, 포옹과 음악과 카메라의 운동을 갑작스럽게 중단시키는 암흑이다. 인물도 음악도 카메라도 종말을 예견하지 않을 때 스스로의 의지를 행사하며 강림하는 어둠. 나는 순간 어렴풋이 톨러 목사의 일기가 북 뜯기는 음향을 들었다.

<미성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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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년>의 영주(염정아)는 남편 대원(김윤석)이 외도를 했고 아기까지 생겼음을 알게 된다. 관객은 둘이 어떻게 결혼했고 부부 사이에 어떤 부침(浮沈)이 있었는지 듣지 못하지만, 공동(空洞)을 품은 염정아의 얼굴과 영주가 야무지게 가꾼 아파트의 실내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영주는 사랑의 배신보다 함께 가정을 경영하는 파트너가 가한 모욕에 휘청거린다. 하지만 쓰러지기에 그의 자존심은 턱없이 강하다. 상대를 확인하기 위해 남편 애인 미희(김소진)의 식당을 찾아간 영주의 차림새와 행동은 캐릭터의 성격과 정황을 낱낱이 전달한다. 골라 입을 겨를 없이 무심히 걸친 옷과 구두는 사치스럽거나 눈에 띄지 않지만 단정히 관리돼 있다. 굽 낮은 구두를 가지런히 벗고 좌식 식탁에 앉은 영주는 방석을 꺼내 앉기 전에 손날로 슬쩍 먼지를 쓸어낸다. 그리고 비로소 영주는 자신이 올 나간 스타킹을 신고 왔음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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