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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시네마 ④] 조던 필 감독의 <어스>, <겟 아웃>에서 달라진 것과 달라지지 않은 것
임수연 2019-03-27

여기 차별이, 악이 있다

데뷔작으로 많은 상을 받은 감독이 감수해야 하는 운명이 있는데, 바로 두 번째 작품이 그간의 호평에 걸맞은지 검증하려는 무리와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인종차별 문제를 독창적인 호러 문법으로 풀어낸 <겟 아웃>(2017)은 아카데미 시상식 각본상을 포함해 전세계 각종 영화 시상식에서 147개의 상을 휩쓸었고, 배우 겸 감독 조던 필은 할리우드의 가장 유망한 신인으로 떠올랐다. 차기작으로 좀더 큰 프로젝트를 선택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그는 <블랙클랜스맨>(2018)의 연출을 선배 스파이크 리에게 양보했고 어느 슈퍼히어로영화 연출을 제안받았으나 고사했다. 그리고 조던 필이 2년만에 다시 블룸하우스 프로덕션과 협업한 호러물로 돌아왔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어스>는 <겟 아웃>의 성취를 복제하지 않으면서 소포모어 징크스를 보란 듯이 깨는 수작이다. 감독의 시야는 더 넓어졌고, 전작의 쟁점까지 포괄하는 논의를 품는다.

1986년 미국 샌타크루즈 해변, 어린 애들레이드 윌슨(매디슨 커리)은 가족과 놀이공원에서 시간을 보낸다. 아빠가 두더지 게임에 정신이 팔려 무관심한 사이, 애들레이드는 혼자 방황하다 “영혼의 여행. 당신을 찾으세요”라는 간판이 걸린 어트랙션에 들어간다. 겹겹이 방을 에워싼 거울이 시야를 흐트러뜨리는 이곳에서, 애들레이드가 거울에 비친 상인 줄 알았던 건너편 누군가가 움직인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도플갱어를 마주한 애들레이드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밝히지 않은 채, 영화는 현재 시점으로 이동한다. 애들레이드(루피타 니옹고)는 남편 게이브(윈스턴 듀크)와 딸 조라(샤하디 라이트 조셉) 그리고 아들 제이슨(에반 알렉스)과 함께 샌타크루즈 해변 인근의 별장을 찾는다.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완벽하게 벗어나지 못한 애들레이드는 이곳에 머무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그리고 그날 밤, 1986년 애들레이드가 마주쳤던 도플갱어를 비롯해 윌슨 가족과 꼭 닮은 무리(영화에서는 ‘묶인 자들’(Tethered)로 일컫는다.-편집자)가 집 앞에 찾아오고, 원시 동물에 가까운 그들은 다짜고짜 윌슨 가족을 공격한다.

미국 안의 악

똑같이 생긴 이중의 존재를 뜻하는 도플갱어의 등장은 스토리텔링의 역사만큼 오래됐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카’(Ka)로 불리며 살아있는 존재와 기억, 경험, 감정을 공유하는 영적 분신의 물리적 구현으로 나타나는 등 거의 모든 문화와 신화에 등장한다. 조던 필 감독은 “도플갱어는 항상 공포의 근원이었다. 개인의 필멸성과 이어져 있는 것 같다. 둘이 공존할 수 없으니 한명은 죽어야 한다. 신화에서 도플갱어는 흔히 불길한 징조이며 누군가의 죽음을 암시한다. 나는 이 원초적 공포를 보여주고 이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싶었다”며 <어스>의 출발점을 설명했다. 조던 필 감독이 참고했다고 언급한 로드 설링의 <환상특급>(1959) ‘거울 이미지’ 에피소드부터 필립 카우프먼 감독의 <외계의 침입자>(1978)에 이르기까지, 도플갱어는 공포 장르의 단골손님이었다. 여기에 <퍼니 게임>(1997)으로 대표되는 ‘가정 침입’ 스릴러가 혼합되고, 해변을 무대로 삼아 일정한 원 무늬가 그려진 비치타월, 똑같이 생긴 간이 화장실 등을 낯설게 비추며 도플갱어의 이미지를 다각적으로 확장한다.

<겟 아웃>에 이어 <어스>에서도 적극적인 인종 문제를 읽어내려는 이들이 당혹스러워하는 것이 이 지점이다. 자신과 같은 얼굴을 가진 상대를 두려워한다는 발상은 이질적인 존재를 배척하는 인종차별과 일견 대치된다. 대신 자리를 채우는 것은 현대 미국 사회를 겨냥한 포괄적인 질문이다. 당신은 누구냐는 애들레이드의 질문에 그의 도플갱어는 “우리는 미국인”이라고 답한다. <어스>(Us)는 ‘우리’ 그리고 ‘미국’(United States)을 의미하는 이중적 타이틀인 셈이다. 조던 필 감독은 아예 “<어스>는 이 나라에 대한 영화”(<인디와이어>)라고 정리했다. “우리를 죽이고 직업을 빼앗을 것만 같은 미스터리한 침입자든,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투표한 이들이든, 서로를 두려워하는 시대에 서 있다. 서로 손가락질만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정말 봐야 할 괴물은 우리의 얼굴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어쩌면 악은, 우리일 수 있다.” 이민자 배척으로 대표되는 도널드 트럼프 시대의 병폐는 특정한 절대 악에서 배태된 것이 아니다. 미국의 자성으로 엉킨 실타래를 풀어야 한다는 것이 조던 필의 주장이다.

영화 초반 브라운관 TV를 통해, 그리고 후반부 어느 장면에서 재현되는 ‘미국을 가로지르는 손’(Hands Across America, 1986년 15분간 손을 잡는 퍼포먼스로 굶주린 사람들을 위한 기금 모금을 독려한 캠페인이다.-편집자) 역시 이 맥락에서 재해석된다. 조던 필 감독은 <배너티 페어>와 인터뷰하며 “‘미국을 가로지르는 손’은 미국의 낙관주의와 희망을 보여주는, 손을 잡으면 우리가 해낼 수 있다는 레이건 스타일의 아이디어다. 하지만 그것으로 굶주림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자선사업은 개인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더 어두운 이미지와 결부된다. 그때 챌린저호 참사가 벌어졌고, 나는 호러영화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행복과 순수함, 그리고 가장 어두운 것을 함께 떠올리게 하는 80년대의 이미지들이 있다”고 설명했다. 보여주기식 퍼포먼스는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오히려 진짜를 흐릿하게 한다. 윌슨 가족이 해변가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고 어설픈 요트라도 소유할 여유가 있고, 그들의 백인 친구 키티 타일러(엘리자베스 모스) 부부는 그보다 더 유복하다는 설정 역시 의도적이다. 아메리칸드림의 수혜자들은 자신의 특권을 자각하지 못하고, 그사이 사회화의 기회를 누리지 못한 원시적 존재는 고통받고 공격성을 키운다. <어스>는 <겟 아웃>의 ‘침잠하는 곳’(sunken place, 영화에서는 흑인 노예화의 은유, <겟 아웃> 흥행 이후 인지되지 않는 인종 억압을 의미하는 신조어가 됐다.-편집자)에 대응하는 상징적 공간을 후반부에 등장시켜 이 정치적 메시지를 배가한다. 요컨대 <어스>의 도플갱어는 ‘미국 안의 악’을 상기하는 존재이자 은폐된 불편한 진실이다. 조던 필 감독은 “미국은 모든 사람이 평등한 곳이지만, 그것은 피비린내 나는 대량학살하에 일군 것이다. 그래서 현대 미국인이 가진 특권을 기회와 함께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죄의식도 함께 가져야 한다”(<배너티 페어>)고 비판한다.

포스트 트럼프까지 생각하다

하지만 <겟 아웃>이 그랬던 것처럼 <어스> 역시 묵직한 주제를 환기하는 감독 특유의 재치가 틈입한다. 2012년부터 마이클 키와 함께 호흡을 맞춘 스케치 코미디 쇼 <키 앤드 필>에서 단련한 감독의 유머 덕분이다. 음성인식 기능을 장착한 음악 플레이어는 14분 후에 도착한다는 경찰이 오지 않아 분노하는 상황에서 N.W.A.의 ‘경찰 엿먹어’(F ** k The Police)를 재생하고, 윌슨 가족과 도플갱어가 목숨 걸고 벌이는 혈투는 촌극이 된다. 이 영화가 가장 죄책감 없이 조롱하는 것은 가부장제다. <어스>의 아버지들은 두더지 게임에 정신이 팔려 어린 딸을 방치하거나, 싸구려 보트로 허세를 떨거나, 힘을 과시하려다 봉변을 당하는데, 결국 아내에게 “이제 당신에게 결정권은 없다”는 말을 듣는 남자는 <어스>의 팽팽한 긴장을 푸는 윤활유지만 주도적 역할을 하지는 못한다. 그 밖에 흑인 윌슨 가족이 백인 도플갱어를 처치하는 시퀀스가 유독 폭력 수위도 높고 뉘앙스가 짓궂다는 점에서 노골적인 의도를 읽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또한 TV 쇼에서 많은 패러디를 시도한 조던 필은 다채로운 레퍼런스를 찾는 것을 즐기는 감독이며, <어스> 촬영 전 배우들에게 참고할 작품 리스트를 전달하기도 했다. <어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샤이닝>(1980)의 그림자다. 샌타크루즈의 별장으로 향하는 윌슨 가족의 차를 찍은 부감숏부터 제이슨의 ‘죠스’ 티셔츠(<샤이닝>의 ‘아폴로 11’ 스웨터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타일러 부부 쌍둥이 딸의 섬뜩한 이미지까지 곳곳에 <샤이닝>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윌슨 가족의 도플갱어들이 별장에 침입해 그들을 위협하는 장면은 <퍼니 게임>과 노골적으로 흡사하다. <퍼니 게임>의 게오르그가 골프채에 다리를 맞고 쓰러진 것처럼, 게이브 역시 야구 방망이를 맞고 다리를 다친다. 후반부에는 M. 나이트 샤말란의 <해프닝>(2008)이 겹치는 설정도 있고, 도플갱어와 윌슨 가족의 추격전은 같은 촬영감독이 찍은 <팔로우>(2014)의 영향이 보인다. 샌타크루즈 해변배경은 감독 스스로 밝혔듯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향을 받았다. “샌타크루즈는 놀이공원과 해변 산책로가 있는 무척 재미있는 곳이고, 나는 목가적 장소를 뒤집는 것을 좋아한다. 샌타크루즈 해변은 히치콕의 <>(1963)를 떠올리게 하는데, 이 장소를 파격적으로 뒤집은 최초의 영화이기도 하다. 흡혈귀 무리가 등장하는 <로스트 보이>(1987)도 고맙다.” 마지막으로 무대 위에서 <호두까기 인형> 발레 공연을 하는 애들레이드와 레드를 교차편집한 장면에서는 <블랙스완>(2010)의 광기가 비친다.

그리고 인종 문제를 다룬 데뷔작으로 이름을 알린 흑인 감독이 흑인 배우들을 내세워 만든 영화가 관객의 기대를 꺾는 것은 또 다른 우회적 메시지를 담는다. 조던 필 감독은 <가디언>과 인터뷰하며 “사람들은 인종 문제에 대한 언급을 기다리며 <어스>를 보다가, 원하는 것이 나오지 않았을 때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내가 왜 흑인이 나오는 영화는 꼭 흑인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아마 이것이 탈인종 시대로 나아가는 발걸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어스>는 인종 문제에 포커스를 맞춘 호러물이 아니지만 인종문제를 아우른다. 이 세계에서는 미국인을 상징하는 캐릭터가 흑인이며 미국 전체의 성찰과 자성을 촉구하는 메시지도 흑인이 전달하는 동시에 백인이 수십년간 독식한 호러 레퍼런스가 흑인 버전으로 재구성되는 모습을 보는 재미까지 있다. 영화 외적으로는 북미 개봉 첫주 4500만~5천만달러의 수익을 예고하며 현재 가장 인기 있는 할리우드 호러영화 감독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공고히 할 전망이다. <겟 아웃>은 흑인의 신체적 매력을 숭배하는 시선이 또 다른 차별이라는 점을 세련되게 보여준 공포영화다. 그사이 <블랙팬서>는 북미에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보다 더 높은 수익을 올렸고, 현존하는 가장 큰 미디어 그룹의 차세대 메인 캐릭터로 흑인이 거론되는 시대가 됐다. <어스>는 더 나아가 백인이 독식하던 자리를 흑인이 완전히 대체해도 아무 문제 없고, 더 본유적인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는 사실까지 보여준다. 트럼프 이후 다음 시대 미국이 가야 할 방향까지 자신만만하게 담아낸 이 신진감독에게는, 소포모어 징크스보다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야심을 살피는 쪽이 어울리는 듯하다.

조던 필 감독.

● 조던 필의 차기작은?

2003년 <매드TV>를 통해 만난 마이클 키와 함께 2012년부터 스케치 코미디 쇼 <키 앤드 필>을 진행하고 있다. 누구로나 변신해 연기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 두 사람이 정체성에 관한 한 명확하지 않은 출발점을 가졌다는 데서 온다”(<가디언>)고 조던 필 감독은 전한다. 마이클 키와 조던 필 두 사람은 모두 혼혈인데, 소속 집단에서 항상 ‘흑인’으로 구분되어 정체성을 부여받고 “인종 구분의 부조리를 느끼고, 나 자신이 외부자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가디언>)는 것이다. 인종 문제를 주로 코미디로 승화했던 그는 호러영화 <겟 아웃>으로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조던 필은 현재 할리우드에 가장 많은 러브콜을 받는 아티스트다. 15년 만에 교도소에서 출소한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 <TBS> 드라마 <더 라스트 OG> 시즌2, SF 장르의 유튜브 오리지널 시리즈 <위어드 시티>, <CBS>의 <환상특급> 리부트판, J. J. 에이브럼스가 제작하는 <HBO> 호러 드라마 <러브크래프트 컨트리> 등이 그가 이름을 올린 작품이다. 조던 필은 <겟 아웃>의 ‘침잠하는 곳’과 <어스>의 ‘묶인 자들’이 연결될 수 있고,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또 다른 작품이 나올 수 있음을 암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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