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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속 세 여성이 보여주는 격렬한 감정
이주현 2019-03-07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는 18세기 영국의 앤 여왕을 중심으로 한 세 여성의 권력 다툼과 사랑 이야기다. <송곳니>(2009), <더 랍스터>(2015), <킬링 디어>(2017) 등을 통해 지독한 현실 풍자와 잔인한 우화를 보여준 란티모스 감독은 자신의 첫 시대극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에서 또 다른 비극의 서사를 써나간다. 세 여성 캐릭터가 보여주는 너무도 인간적인 비극을 생각해보았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과 배우 올리비아 콜먼, 레이첼 바이스, 에마 스톤, 니콜라스 홀트의 인터뷰에서 발췌한 말도 함께 실었다.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이하 <더 페이버릿>)는 10개 부문 후보에 올라 단 하나의 상만을 가져갔다. 여우주연상 부문의 올리비아 콜먼에게 주어진 트로피가 유일했다. <그린 북> <로마> <블랙팬서> <보헤미안 랩소디>가 각각 3관왕 이상을 차지한 데 견주면 <더 페이버릿>에 대한 아카데미의 평가는 다소 박하게 느껴진다. 아카데미의 안전한 선택을 성토하려고 꺼낸 얘기는 아니다. <더 페이버릿>에 돌아간 상이 감독상도 미술상도 각본상도 촬영상도 편집상도 아닌 배우상이라는 사실의 의미를 곱씹어보고 싶어 꺼낸 얘기다. 잠깐 샛길로 빠지면, <더 페이버릿>은 앤 여왕(올리비아 콜먼), 앤 여왕의 오랜 친구이자 앤을 대신해 정치적 힘을 행사하는 사라(레이첼 바이스), 앤 여왕의 환심을 사 신분 상승을 꾀하는 하녀 애비게일(에마 스톤) 세 캐릭터가 각각 팽팽하게 삼각형의 한변을 지탱하는 영화다. 따라서 세 캐릭터를 두고 주·조연을 가리는 건 애초에 성립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앤 여왕을 연기한 올리비아 콜먼은 여우주연상 후보에, 사라를 연기한 레이첼 바이스와 애비게일을 연기한 에마 스톤은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주연상과 조연상을 가르는 기준에 대한 의문은 <그린 북>의 마허샬라 알리가 남우조연상을 받으며 더 커졌고, 그 기준이 출연 분량인지 기여도인지 피부색인지 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와 그의 비극들

본론으로 돌아와, 어떤 작품이 배우상을 수상했다는 건 기본적으로 배우가 좋은 연기를 펼칠 수 있는 좋은 캐릭터가 있었다는 얘기다. 평범한 캐릭터를 비범하게 만드는 것도 배우의 능력이고 비범한 캐릭터를 평범하게 만드는 것도 배우에게 달렸지만, 우열을 가려야 하는 시상식에선 캐릭터의 힘도 무시할 수 없다. <더 페이버릿>의 앤 여왕은 감정적인 부분부터 기술적인 부분까지 섬세함이 요구되는 캐릭터다. 깊은 슬픔이 우스꽝스러운 변덕으로 변모할 때 앤 여왕의 품위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지지만, 또한 그럴 때 앤 여왕의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은 기묘한 슬픔의 형태로 보는 이의 마음에 어떤 자국을 남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는 기괴하거나 잔혹한 부조리를 제시하고 비극으로 치닫는 결말로 귀결되곤 한다. 비극적 엔딩은 <더 페이버릿> 역시 마찬가지다. 앤 여왕을 꼭짓점으로 한 세 사람의 삼각관계는 결국 허물어진다. 사라는 영국 땅을 떠나야 하고, 애비게일은 신분 상승과 무관하게 여왕의 저린 다리를 주물러야 하는 현실을 자각한다. 사랑을 잃은 앤에게 남은 건 지긋지긋한 신체의 통증이다. 앤의 얼굴에 어지러이 포개지는 토끼의 이미지는, 17마리 토끼로도 모자라다는 듯 끊임없이 번식하는 슬픔과 고통을 상징한다(앤 여왕은 자신이 키우는 17마리 토끼에게 사산하거나 먼저 떠나보낸 자식들의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이 결말은 란티모스의 다른 영화의 결말과 사뭇 다른 감흥을 안긴다. <송곳니>처럼 비극에 앞서 서늘한 실소를 자아내지도 않고, <더 랍스터>처럼 인간을 혹은 사랑을 더욱 냉소하게 하지도 않으며, <킬링 디어>처럼 끝까지 잔인하게 불안을 조장하지도 않는다.

란티모스의 비극적 서사는 그가 그리스인이라는 점과 자주 결부되어 얘기된다. 사람들은 그리스 비극이라는 거대한 문화유산의 영향을 그의 영화에서 찾으려한다. <킬링 디어>가 그리스신화 중 이피게네이아의 비극을 모티브로 함에도 정작 감독 본인은 그리스 비극과 관련한 질문에 자신의 독창적 세계를 창조하려 했다는 답으로 무언가와 비교되길 거부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창조해온 세계는 일관되게 비극적이며 신화적인 세계다. 그 세계에서 그는 세계를 지배하는 신이 된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라는 신이 창조한 인간은 현실 세계를 반추하게 만드는 상징적 기호로 이용되기 때문에, 인위적인 상황극에 놓인 듯한 캐릭터들에게 관객이 감정적으로 동조할 여지는 비교적 적었다. 란티모스의 잔인하리만치 시니컬한 태도는 자신이 만든 세계를 굽어보는 듯한 전지적 시점에서 기인하기도 한다. 인간의 불행과 고통을 일정 거리를 두고 굽어보는 듯한 태도 자체가 때론 선득하고 섬뜩하게 느껴진다.

<더 페이버릿>은 란티모스가 연출하는 첫 번째 시대극이자 그가 직접 각본을 쓰지 않은 첫 번째 영화다. 알다시피 영화가 차용하는 역사는 18세기 영국 스튜어트 왕조의 마지막 군주 앤 여왕의 이야기다. 언제나 가상의 영화 세계를 설계하고 그 세계에 엄격한 법칙을 심어놓은 란티모스이기에 그가 역사를 재료 삼아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흥미롭게 다가온다. 그가 기존에 만들어온 영화적 세계 또한 현실의 단면을 반영한 결과지만 그 세계는 다소 도식화된 모사의 세계였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비극으로 귀결되는 폐쇄적 회로의 세계는 뜨거운 감정으로 들끓는 세계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 때문인지 란티모스의 영화를 보면 인물이 아니라 인물이 상징하는 바, 인물의 행동이 은유하는 바, 인물을 작동하는 시스템의 원리 같은 것이 두드러져 보인다. 인물의 감정보다 세계의 시스템과 시스템을 만든 감독이 선명하게 보이는 영화가 란티모스의 영화였다.

역사에 변형을 가한 <더 페이버릿>에선 인물이 보인다. 절대권력을 쥔 여성을 중심으로 한 궁중 암투 서사와 러브 스토리가 요르고스 란티모스를 만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기란 쉽지 않다. <더 랍스터>에서 사랑을 지독하게 조롱한 그가 아닌가. 사랑을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는 조건에서 바보처럼 갈등하는 인간과 바보 같은 선택을 종용하는 사회를 조롱했던 란티모스가 <더 페이버릿>에선 기꺼이 인물들에게 감정이입할 여지를 준다. 앤 여왕의 침실, 사라가 장악한 의회, 애비게일의 처지를 보여주는 하녀의 방, 이들이 거니는 길고 어지러운 복도를 카메라는 끊임없이 오가며 세 여성의 심리가 어디로 향하는지 보여준다. 인물들을 로 앵글로 잡는 숏만큼 자주 사용한 빠른 180도 패닝숏은 앤 여왕의 변덕스러운 심리나 사라와 애비게일의 빠른 태세 전환, 호의란 바람처럼 그 방향을 쉽게 바꾼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치로 쓰인다.

<더 페이버릿>의 인물들은 살아 있다. 란티모스가 창조한 그 어떤 캐릭터보다 인간적이다. 사랑을 갈구하며 욕구불만 속에 삐뚤어지려 하고, 파란색 케이크를 먹고 파란색 토사물을 게워내는 앤 여왕에겐 연민 이상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망아지처럼 날뛰는 야당 총수에게 마스카라나 고치라고 일갈하며 국정에 매진하는 사라의 기질 앞에선 호쾌하게 웃게 된다. 자신이 호의를 베푼 애비게일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아 얼굴에 나이키 문양의 상처를 새긴 채 앤 여왕에게 러브레터를 써나가는 사라의 모습에선 인생무상마저 느끼게 된다. 여자는 한달에 28일씩 생리를 한다는 말로 자신을 돈으로 산 배불뚝이 남편을 속인 애비게일은 그 영민함을 악취 나는 진흙과 양잿물을 덮어써야 했던 과거와 작별하는 데 사용한다. 높은 곳을 바라보며 신분 상승의 꿈을 이뤄낸 애비게일은 처세의 달인이다. 성공신화의 모델이 된 애비게일을 보며 사람이 성공하려면 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려나. 어쨌든 <더 페이버릿>의 세 여성에겐 격렬한 감정이 있다. 붉은 피가 도는 사람 같다. 이들의 욕망이 얽히고설키는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도 가상의 이야기도 아닌 현실의 이야기로 다가온다.

이토록 뜨거운

충격적인 열린 결말을 선호했던 란티모스 감독의 다른 영화와 달리 <더 페이버릿>의 엔딩은 열린 결말도 아니고 시각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지도 않는다. <더 페이버릿>의 비극은 인간적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실존한 역사 속 인물인 세 여성, 치열하게 사랑과 권력을 다툰 세 여성의 삶에서 특별한 감정들을 보았던 것 같다. 역사서에 기록된 팩트 대신, 헐렁한 잠옷 바람으로 침실과 서재에서 은밀히 나눴을 감정들, 꼭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닌 감정들, 질투와 배신과 악행의 동기들. 란티모스가 꾸준히 다뤄온 생존 투쟁과 잘못된 선택의 이야기가 결국 <더 페이버릿>에서도 일관되게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더 페이버릿>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애정 시퀀스로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앤 여왕은 자신보다 국정에 더 신경쓰는 사라에게 시위하기 위해 침실 창틀에 매달린다. 급한 일이라는 전갈을 받고 앤 여왕 앞에 도착한 사라는 말한다. “떨어지려면 돌 위로 떨어져. 잔디는 푹신하니.” 그러면 앤은 말한다. “매정한 것.” 사라는 또 답한다. “그만 좀 집착해.” <더 페이버릿>을 보고 나니, 집요하게 비극에 집착해온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랍스터의 푸른색 피가 아닌 붉은색 피가 도는 사람으로 느껴진다. 이제야.

●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감독과 배우들의 말말말

◆ 요르고스 란티모스_ “이 영화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이 9년 전이었는데,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세 여성의 이야기였다. 이 세 여성이 수많은 사람의 삶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권력을 쥐고 있다는 점, 세 여성의 행동이 전쟁의 경로와 한 국가의 운명까지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 올리비아 콜먼_ “놀랍지 않은가! 보통의 시대극과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지지만 놀라울 정도로 역사적으로 정확한 이야기라니.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하겠지만 대부분 사실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역사보다는 잉태했던 아이들을 전부 잃은 여인의 이야기, 그 여인의 다른 여인들에 대한 사랑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 레이첼 바이스_ “세 여성은 서로 경쟁 관계지만 그 안엔 사랑과 질투도 있다. 이 작품 또한 여성들이 서로에게 못되게 구는 클리셰를 가지고 놀지만 실은 그 이상이다. 여왕과 사라의 진정한 러브 스토리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카사블랑카>까지는 아니지만 진정한 사랑이 존재한다.”

◆ 에마 스톤_ “권력과 사랑을 향한 욕망은 시대의 영향을 받는다. 이 영화가 현대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현재의 감정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인간에 관한 변하지 않는 주제를 다루는 영화다. 여러모로 도전적인 작품이었다. 캐릭터 자체가 흥미로운 여정을 계속하기도 하지만 배우들 중 나 혼자 미국인이라는 사실도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 니콜라스 홀트_ “모든 출연진이 한 공간에서 2주 동안 리허설을 했다. 형광펜으로 표시해가며 영화 속 시대와 캐릭터, 장면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 아니었다. 다른 배우들 앞에서 서로가 우스꽝스러워지는 시간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데 익숙해지게 만드는 이상하고 기이한 연습법과 대본 리딩을 많이 했다. 2주 동안 유대감이 쌓였다. 그래서 촬영이 시작됐을 때 곧바로 달려들어 바보 같은 짓을 할 수 있었다.”

(※ 제작사에서 제공한 공식 인터뷰와 프로덕션 노트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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