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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회 베를린국제영화제의 수상작과 경향 현지 리포트

베를린에도 여성의 물결 거셌다

<시너님스>

화려함은 줄었지만 실속은 커졌다. 제69회 베를린국제영화제가 지난 2월 7일부터 17일까지 베를린 포츠다머플라츠에서 열렸다. 집행위원장 디터 코슬릭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이번 영화제는 20편을 훌쩍 넘기던 경쟁부문 상영작을 17편으로 줄였다. 장이머우 감독의 <원 세컨드>가 영화제 도중 돌연 참가를 취소하는 일이 발생했고, 현지 언론은 그 이유를 중국 당국의 검열 문제라 짐작하는 등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아쉽게 불참을 선언한 <원 세컨드>를 제외한 16편의 경쟁부문 상영작 대부분이 어떤 작품이 수상하더라도 손색없을 만큼 수작이었다는 점이 올해 영화제의 성취다.

제69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의 영예는 프랑스 누벨바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이스라엘영화에 돌아갔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이스라엘 출신 감독, 나다브 라피드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시너님스>가 그 작품이다. 이 영화는 미국 영화지 <스크린>에서 가장 높은 별점을 받으며 경쟁부문 상영작 중 가장 유력한 수상작으로 점쳐졌다. 영화는 이스라엘 청년이 프랑스 파리에서 살아가며 새로운 자신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다룬다. 자유분방한 파리의 분위기 속에서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주인공의 고뇌가 불협화음을 이루며 독특한 분위기를 발산한다. 흔들리는 카메라가 담아내는 파리 풍경, 주인공이 강박적으로 중얼거리는 프랑스어 단어들, 간간이 삽입되는 이스라엘에서의 기억의 편린들이 관객을 주인공이 겪었을 혼돈의 세계로 이끈다. 영화는 주인공이 왜 모국어와 모국을 버렸는지 그 이유를 암시할 뿐이다. <시너님스>는 이방인이 자유분방한 서구 사회에서 부딪히는 모순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상황을 포착하는 재기도 놓치지 않는다. 독일 일간지 <쥐트도이체차이퉁>은 “가장 훌륭한 영화에 상이 주어졌다”고 평했고 주간지 <슈피겔>은 “영화는 유럽 사회에 통합되고 싶은 이주민들에 대해 유럽사회가 얼마나 닫혀 있는지에 관해 다룬다”고 전했다.

<시너님스>

여성 영화인의 강세

올해의 베를린국제영화제는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영화제였다. 유럽을 대표하는 두 여배우, 줄리엣 비노쉬와 샬롯 램플링이 각각 심사위원장과 황금명예곰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샬롯 램플링의 경우 주요 작품 11편이 황금명예곰상 수상 기념으로 상영되었다. 또한 회고전 섹션에서는 ‘스스로 결정하다. 여성들의 전망들’이라는 타이틀로 1968년부터 1998년에 이르기까지 동서독 여성감독들의 영화 50편이 상영됐다. 경쟁부문에 참여한 여성감독의 수도 7명에 달했다. 베를린국제영화제 역사상 경쟁부문에 진출한 여성감독의 비율이 이렇게 높은 건 처음이다. 전세계적으로 ‘미투 열풍’이 분 지난 영화제 당시 여성 영화인, 예술인들 문제로 패널간 토론이 활발하게 열렸던 것도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여성 영화인들이 강세를 보일 수 있었던 배경으로 보인다.

<바이 더 그레이스 오브 갓>

경쟁부문 상영작의 면면을 보아도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들이 유독 눈에 띄었다. <시너님스>와 더불어 유력한 수상작으로 점쳐지던 마케도니아영화 <갓 이그지스트, 허 네임 이즈 페트룬야>도 그중 하나다. 영화는 마케도니아에서 해마다 남자들만 참여하는 전통 종교 행사를 우연히 지나치던 여성 페트룬야가 강에 던져진 십자가를 먼저 손에 넣게 되면서 일어나는 해프닝을 그린 코미디물이다. <스크린>은 “이 영화는 가부장제에 도전하는 여성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여러 형식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전통적인 풍습에 대항하는 영리하고 열정적인 입장 표명”이라고 평했다. 왕취안안 감독의 <공룡단>은 거친 자연 속에서 혼자 사는 30대 중반 유목 여성을 조명한다. 영화는 홀로 사막 한가운데에서 낙타를 타고 다니며 양을 치고, 총으로 늑대를 쫓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여성의 강인한 생명력을 그려내고 있다. 이사벨 코익세트 감독의 <엘리자와 마르셀라>는 100년 전쯤 실존했던 레즈비언 커플 이야기다. 수도원 학교에서 만나 서로에게 끌려 깊은 사랑을 나누게 된 엘리자와 마르셀라는 레즈비언 커플로 살며 여러 어려움을 겪는다. 연인과 함께하기 위해 엘리자는 남장을 하고 신분 세탁을 해서 결혼까지 하지만 결국 발각되면서 위기에 처하게 된다. 넷플릭스가 제작한 이 작품은 영화제 기간 중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 영화가 경쟁부문에서 상영된 것을 두고 180명의 극장주가 독일 문화부에 공개 서한을 보낸 것. <엘리자와 마르셀라>의 상영 첫날 이들은 넷플릭스 규제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왕샤오슈아이 감독의 <소 롱, 마이 선>은 여우주연상과 남우주연상을 나란히 수상해 화제가 됐다. 영화는 30여년에 걸친 어느 가족의 비극을 세 시간의 러닝타임 안에 다양한 시점으로 조명한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같은 공장에 다니며 정을 나누었던 동료이자 이웃이 어떻게 상처를 입고 입히며 서로 멀어진 채 긴 세월 동안 그 아픔을 잊지 못하는지를 그린다. 플래시백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이 작품은 이야기의 퍼즐 조각을 조금씩 공개하며 사건의 전말을 드러낸다. 영화는 1979년경 중국의 한 자녀 정책, 자본주의가 들어와 급격하게 개발되는 시대의 풍경이 개인의 상처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탐구하고 있다. 독일 주간지 <디차이트>는 “이런 상처가 얼마나 깊고 치유하기가 힘든지, 그리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고통이 없어질 수 있는지를 잘 짜여진 이야기 안에서 보여준다”고 썼다.

<아이 워즈 앳 홈, 벗>

현실 고발과 자전적 이야기

한편 경쟁부문에 초청된 독일 여성감독 세명 중 두명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은곰상 감독상을 받은 앙겔라 샤넬렉 감독의 <아이 워즈 앳 홈, 벗>은 그녀의 자전적 이야기다. 개, 당나귀, 토끼가 등장하는 우화적 상징 장치로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이 작품은 시적 아트하우스 영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남편을 잃고 혼자 아이들을 키운 감독의 경험의 단편들이 영상으로 구현된다. 영화는 초등학교 교실에서 진행되는 <햄릿> 리허설 장면과 주인공 여성이 일상에서 겪는 에피소드를 교차한다. 집 나갔다 돌아온 아이를 둘러싼 이야기,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춤, 주인공이 히스테리를 부리는 장면, “연극은 가식적이어서 가치가 없는가”라는 철학적 논쟁까지 <아이 워즈 앳 홈, 벗>은 다양한 속도의 다양한 장면으로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하지만 개성 넘치는 영화임엔 틀림없다. <슈피겔>은 “몽타주의 예술에 대한 오마주이자 예술 자체에 대한 오마주”라고 극찬했다.

독일 감독 노라 핑샤이트의 데뷔작인 <시스템 크래셔>는 알프레드 바우어상을 받았다. 분노조절장애를 가진 9살 소녀 베니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는, 소녀의 분노와 함께 절망과 슬픔까지 강렬하게 전달한다. 담담히 소녀를 응시하던 영화는 소녀의 감정이 분노로 변할 때 그의 격렬한 감정을 반영하듯 요동친다. 하드록 사운드와 아이의 고함 소리까지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다. 베니는 분노조절장애로 인한 폭력 때문에 엄마와 살지 못하고 시설에 들어간다. 베니의 분노는 어디서 시작된 걸까. <슈피겔>은 이 영화를 “안티 가족영화”라 칭하며, “날것의 덜 다듬어진 에너지가 영화제에 생기를 돌게 한다”고 평했다.

<소 롱, 마이 선>

프랑수아 오종의 <바이 더 그레이스 오브 갓>은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실제로 현재 진행 중인 프랑스 사제의 아동 성추행 사건 재판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만든 작품이다. 남성들의 ‘미투 운동’이라고 해야 할까.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바이 더 그레이스 오브 갓>은 가톨릭 교회 캠프에서 사제에게 성추행당했던 소년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고통받으며 서로 만나 연대하고, 법인을 만들어 법정투쟁에 나서는 과정을 보여준다. 피해자들은 어린 시절의 피해 사실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면서 자신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해나간다. <디차이트>는 “주인공들의 관점을 이동시키며 프랑수아 오종은 세명의 서로 다른 남자들을 사건의 중심에 서게 한다. 결국 감독은 개인적 트라우마를 다루는 것과 사건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둘 다 성공했다”고 호평했다. 나폴리에 사는 15살 소년이 조직 범죄단에 얽혀 들어가는 메커니즘을 보여준 <피라나스>는 각본상을, 2차 세계대전 당시 15살 스웨덴 소년이 노르웨이 숲에서 겪은 이야기를 다룬 <아웃 스틸링 호시즈>는 예술공헌상을 받았다.

자전적 이야기나 실화를 다룬 영화가 많았다는 점, 지역과 정체성을 주제로 다룬 영화가 눈에 띄었다는 점이 올해 영화제의 한 경향일 것이다. 하지만 독일 언론의 기사들은 18년간 지속된 디터 코슬릭 시대의 베를린국제영화제를 분석하며 그가 영화제의 규모를 키워놓은 공로는 인정하나, 올해 영화제는 예년에 비해 할리우드 스타의 등장이 적어 초라한 데다 경쟁부문 라인업도 칸국제영화제에 비해 아쉬웠다고 비판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어쨌거나 심사위원장 줄리엣 비노쉬가 디터 코슬릭에게 대형 곰인형을 안겨주며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디터 코슬릭 시대의 베를린국제영화제는 막을 내렸다. 내년의 베를린에서는 또 어떤 드라마가 관객을 기다릴까. 새 시대의 베를린국제영화제를 보게 될 날이 머지않았다.

● 주요 수상작: 황금곰상 최고작품상_ <시너님스> 나다브 라피드 감독 / 은곰상 심사위원대상_ <바이 더 그레이스 오브 갓> 프랑수아 오종 감독 / 은곰상 알프레드 바우어상_ <시스템 크래셔> 노라 핑샤이트 감독 / 은곰상 최고감독상_ 앙겔라 슈넬렉 감독 <아이 워즈 앳 홈, 벗> / 은곰상 최고여자배우상_ 용메이 <소 롱, 마이 선> / 은곰상 최고남자배우상_ 왕징춘 <소 롱, 마이 선> / 은곰상 최고각본상_ 마우리치오 브라우치, 클라우디오 지오바네시, 로베르토 사비아노 <피라나스> / 은곰상 예술공헌상_ 라스무스 비데백 촬영감독 <아웃 스틸링 호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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