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보다 스크린이 친숙한 사람들은, 제이알(JR)을 아녜스 바르다 감독이 생애 처음 선택한 공동 감독으로 소개받았다. 사진 이미지를 공공 공간에 설치하는 도시 아티스트이자 거리 아티스트인 JR은, 사람들이 보지 않는 동안 파리의 옥상과 외벽, 지하철에 그래피티를 남기는 작업으로 10대 중반에 경력을 시작했다. 2007년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경계를 이루는 긴 벽에 같은 직업을 가진 양국 시민의 초상 사진을 둘씩 짝지어 붙였고, 2008년 시작한 ‘여자들이 영웅이다’(Women are Heroes)프로젝트에서는, 고통스러운 과거를 끌어안고 관대하게 세상을 지탱하는 여성의 얼굴을 브라질 촌락과 대양을 건너는 배에 입혔다. 비일상적 크기로 확대돼 노동과 삶의 공간 전면을 점령한 보통 사람들의 클로즈업 흑백사진은 “여기 인간이 있다”고 웅변했고, 지역사회의 맥락과 만나 풍성한 메시지를 생성했다. 숨은 얼굴을 전면(façade)에 드러냄으로써 이미지의 위계를 뒤엎는 JR의 작업은, 세계 곳곳의 자원자들이 카메라를 든 ‘인사이드 아웃’ 프로젝트로 여전히 진행 중이다. 본인이 찍은 사진에 한정하지 않는 JR의 설치 작업으로는 아카이브 이미지를 역사적 구조물에 얹은 ‘언프레임드’(2009~) 프로젝트도 있다. JR은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들이 검역을 받고 수용됐던 엘리스섬의 버려진 병원 내벽에 당시 기록사진을 설치해 잊힌 건국의 역사를 이야기했다. 엘리스섬 프로젝트(사진③)는 2015년 로버트 드니로가 출연한 단편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이어 2018년에는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에 2층 건물 세배 높이의 비계(scaffolding)를 세우고 독일 통일 직전 장벽 위에 올라탄 청년들과 경비병을 찍은 사진을 부착했다. 난민 수용 범위를 두고 논란을 벌이고 있는 한 세대 후 독일인들에게 보이지 않는 장벽을 일깨운 것이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2017)이 개봉하고 반년 만에 JR이 서울을 찾은 까닭은, 최근 작업의 청사진과 제작 과정을 공개한 ‘Unveiling(베일을 걷다)’(1월17일~3월9일, 갤러리 페로탱 서울)을 소개하기 위해서다. 루브르 박물관 피라미드의 정면을 뒤쪽에 자리한 시계동의 전면 이미지로 덮어 특정 포인트에 서면 피라미드가 사라지는 환영을 연출한 <JR at the Louvre>(2016, 사진④), 미국 데스 밸리 황야에서 보이는 산의 일부를 흑백 이미지 빌보드로 대체한 <Giants, Death Valley>(2017, 사진⑤) 등의 설계와 결과물 10점이 관람객을 만난다. 촬영과 설치는 JR에게 있어 작품의 첫 두 마디 모티브일 뿐이다. 미술관을 보러 왔지만 셀피를 찍기 위해 정작 대상을 등지는 관광객들을 돌려세우고 싶다는 아이디어로 시작된 루브르 프로젝트는 군중의 휴대폰 카메라 속에서 완성됐다. 한편 밴드 아케이드 파이어의 앨범 《Everything Now!》의 커버로 쓰인 데스 밸리 프로젝트는 스피커를 부착해, 음반에 인쇄된 번호로 전화를 걸어온 팬들과 사막까지 찾아온 팬들의 통화로 음향의 차원을 더했다. 영화로 익숙한 페도라와 검은 안경을 착용하고 매치스틱 맨 같은 실루엣으로 등장한 JR은 노래하듯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용은 작품 설명이었지만, 아녜스 바르다와 절창의 듀엣을 이루었던 톤은 영락없이 “이리로 와서 함께 놀아요!”라고 꾀는 장난꾸러기의 그것이었다.
사진① View of the exhibition JR à Tecate 2017, Tecate Mexico, 2017 © Courtesy of the artist & Perrotin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서 아녜스 바르다 감독은 당신에게 선글라스를 벗으라고 계속 청하고 결국 성공한다. 프로젝트에 모델로 참여한 사람들도, 당신은 그들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는데 당신과 눈을 맞추지 못한다는 점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것 같은데.
=아, 나와 작업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색안경을 쓰지 않은 눈을 본다. 현장을 촬영하는 카메라가 있을 때만 색안경을 쓴다. 지금도 안경 옆으로 내 눈이 보일 것이다. 불운하게도 익명이 되기 위해 선글라스는 필요하다. 가령 멕시코-미국 장벽 작업의 경우 내 얼굴이 알려졌다면 국경을 넘을 때 제재와 방해를 받았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모자와 안경은 내 얼굴을 가리지만 이것을 써야만 사람들은 내가 JR임을 알아본다. 잠복할 때는 색안경을 벗는다.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할 때 공중으로 떠오르는 자세를 자주 취하더라. 이유가 궁금하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에 대한 오마주인가? (웃음)
=오마주는 아니고 점프할 수 있는 한 뛰어보려고 한다. 언젠가는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때가 올 테니까. 카메라와의 놀이이기도 하고 보는 사람을 궁금하게 만드는 이미지를 만들고 싶다. 그다지 깊은 생각에서 나온 행동은 아니다.
-당신의 대다수 작품은 지역성과 불가분의 관계(site-specific)에 있다. 이번에 서울에서 전시하는 루브르 미술관 피라미드, 데스 밸리 프로젝트의 경우는 심지어 특정 시점에서 보아야만 의도한 효과를 낸다. 스트리트 아티스트로서 실내 갤러리에서 관람객을 만나고 전시하는 활동은 어떤 의미인가.
=나는 브랜드나 기업의 협찬을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킨다. 10대부터 거리에서 시작한 내 작업의 중심 매체는 사진이었다. 설치된 작품 사진을, 갤러리를 통해 컬렉터들에게 판매한 수익이 활동을 지속하는 제작비의 유일한 출처다. 그러므로 내게 거리의 작업과 갤러리 전시는 밀접하게 결합돼 있다.
-도시의 외벽이 당신의 전시장이고 캔버스다. 벽에 관해서라면 세계 최고의 전문가다. 서울에서 고작 이틀을 보냈지만 거리의 벽과 도시 전경에서 받은 인상이 있는지.
=건물보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 먼저다. 한 도시 혹은 구역 전체에 사는 사람들의 관계와 흐름이 중요하다. 멕시코-미국 국경에 설치한 <키키토>(2017, 사진①)의 모델은 장벽 옆 언덕에 사는 어린아이였다. 만약 아이의 사진이 서울 한복판에 설치됐다면 모델도 사진의 의미도 달랐을 것이다. 서울을 다시 방문한다면 건축물보다 사람들의 흐름부터 주의 깊게 보고 싶다. 내 작품의 깊이감은 조형적 밀도와 층위보다 작품과 사람들이 마주쳐 만드는 우연한 사건들에 의해 생긴다.
예술은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이죠
-작품의 다수가 거대한 규모다. 그래서 사람들이 시선을 피할 수 없다. 스케일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각 프로젝트의 적절한 사이즈는 어떻게 결정하는가.
=작품의 크기는 맥락에 따라 완전히 상대적이다. 이를테면 아프리카 라이베리아는 건물들이 아담해서 우리가 앉아 있는 이 사무실의 벽만 한 사진도 지나치게 커 보인다. 반면 서울이나 파리, 뉴욕에 설치한다면 광고 이미지와 경쟁해서 눈에 띄어야 한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는 철거를 앞둔 광산촌의 여성 재닌이 집 전면에 붙은 본인의 커다란 사진을 처음 보는 순간 울컥하는 광경이 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당신과 바르다 감독은, 거대한 초상 이미지를 통해 노동하는 보통 사람들에게 합당한 위엄과 숭고함을 돌려주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과한 해석은 아니다. 우리의 의도는 공적 공간에 놀라움을 창조하는 것이지만 그 놀라움은 인간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발생한다. 광산촌의 재닌에게는 자신의 이야기와, 강제 이사 명령과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현실의 자신보다 큰 존재가 되려는 그녀의 소망을 지지한다고 이해했다. 그래서 집으로 초대해 가족의 역사를 들려주었다. 우리는 작업을 통해 그와 연결되고 보답할 수 있었다.
-영화에서 정유공장의 설치작품을 본 출근길 직원이 “예술은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이겠죠. 맞죠?”라고 한 말에 동의하는 셈인가.
=매우 훌륭한 예술의 정의였다. 게다가 그는 확신하지도 않았다. “맞죠?”라고 질문했다.
-1인 초상 사진의 경우 28mm 렌즈를 고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활동 초기 소유한 유일한 렌즈여서 그렇게 된 것인가, 아니면 28mm로 찍은 얼굴이 가장 아름답다는 생각이 있나.
=초기에 내가 가진 유일한 렌즈이기도 했고 나를 피사체에게 무척 가까이 다가가도록 만들어준다. 나는 정규 미술학교를 다니지 않았기에 작업을 해나가는 동시에 방법론을 만들었다.
사진② Gigantic Picnic at the US-Mexico border, 2017 © Courtesy of the artist & Perrotin
-그럼 지금은 다양한 렌즈를 목적에 맞게 쓰나.
=그렇다. 여전히 인물 사진에서는 주로 단초점렌즈를 쓰지만 벽에 대형 작업을 할 때면 멀리 떨어져서 사람을 찍어야 한다. 근거리에서 찍으면 대상의 왜곡이 생겨서 벽에 설치된 작품을 바라보는 관람자의 시야를 교란하게 되니까. 그래서 카메라는 멀리 설치하고 리모컨과 모니터용 아이패드를 쓴다. 그렇게 피사체 가까이에서 커뮤니케이션 하면 원하는 포즈를 얻어내면서도 실루엣은 왜곡되지 않는다.
-흑백은 현대영화에서 비현실, 추상, 판타지를 의미하곤 한다. 블랙 앤드 화이트를 선택하고 고집하는 미학적 이유가 있나.
=초기에는 돈이 없어서 흑백을 택했다. 거리에 붙일 사진을 컬러로 인화하려면 흑백보다 비쌌다. 인화된 사진이 아니라 사진을 종이에 복사한 흑백 이미지도 썼다. 경제적 이유가 먼저였고 나중에는 거리에 범람하는 컬러 광고 이미지와 차별화하는 데 흑백이 유효했다. 미학적 이유가 출발점이 아니었지만 작품이 축적되면서 스타일이 되었다.
-초기 스트리트 아트 활동에서는 서명을 남겼다. 지금은 하지 않는다.
=우리는 작가의 이름을 모른 채 스트리트 아트를 본다. 사람들이 모두 내 인스타그램을 구독하는 건 아니다. 한편 작품에 호기심이 생겼다면 인터넷에 키워드와 주소를 넣어 아티스트를 검색해볼 수 있다. (맞은편 벽의 사진을 가리키며) 저 사진의 작가를 나는 모르지만 원하면 물어볼 수 있다. 광고는 반대다. 무엇을 사야 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낱낱이 분명히 지시하며 어떤 선택의 여지도 남기지 않는다. 예술은 작품과의 거리를 포함해 우리에게 선택권을 준다. 나 역시 그 점을 존중하려고 한다.
-오늘날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셀카를 찍는다. 어떤 사람들은 셀카 문화를 제일 매끈한 모습만 전시하는 자기도취적 행태라고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당신이라면 디지털 시대의 자화상 사진에 대해 다른 의견이 있을 법하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을 찍는 동안 우리도 많은 사람들에게 이유를 물었다. 가까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법이기도 하고, “내가 이곳에 존재했다”고 보여주며 애정의 화답을 기다리는 방식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아녜스는 원래 셀피(스마트폰 등으로 찍은 자신의 사진)에 부정적인 입장이었지만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다르게 이해하게 됐다.
사진③ Unframed, Hygiene Conference Delegates reviewed by JR, Ellis Island, USA, 2014 Colour print, mounted on dibond, mat plexiglas 125×187cm | 49 1/4×73 1/2 in © Courtesy of the artist & Perrotin
노 브랜드, 노 로고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 등장하는 대형 프린터가 장착된 포토부스 밴은 언제부터 이용했는지 궁금하다. 원래 있던 기계를 튜닝한 것인지 당신의 발명인지. 포토부스 밴이 당신의 작품에 더해준 바는 무엇인가.
=2011년 TED에서 상을 받고 상금으로 ‘인사이드 아웃’ 프로젝트(세계 각지에서 인물 사진의 옥외 설치로 메시지를 표현한 작업)를 시작하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포토부스는 본래 미술관 안에 설치돼 있던 시설인데, 트럭에 장착한 다음 그 힘을 깨달았다. 미술관 포토부스의 이용자들은 사진은 찍지만 남이 보도록 전시하지는 않는다. 트럭을 쓰면 인화된 사진을 건네며 어디에 쓸 건지 묻는다. 그냥 집에 가져간다는 사람들에게 벽에 붙이면 더 재미있지 않겠냐고 제안하며 풀과 붓을 주면 많은 사람들이 동조한다. 아녜스는 이 차에 반했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 쓴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나라와 문화에 따라 트럭 옆구리에서 출력되는 본인의 대형 사진을 보는 사람들의 반응이 다를 것 같은데.
=만국 공통으로 “와우!”다. 나는 마법 트럭이라고 부르는데, 그저 얼굴을 크게 보여줌으로써 얼마나 많은 미소를 창조할 수 있는지 모른다. 지금은 브라질에 1대, 미국에 2대, 유럽에 1대, 일본에 1대의 마법 트럭을 갖고 있다. 일본인들도 즐겁게 반응했을 뿐 아니라 외벽에 많이 붙였다. 한 일본 작가는 지진과 쓰나미 재해를 입은 후쿠시마 지역을 돌며 같은 작업을 했다. ‘인사이드 아웃’ 프로젝트는 나 없이도 확장되고 있다. 이제는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사진을 찍어서 보낸다. 우리 스튜디오는 그들이 보낸 파일을 메일로 받아 무료로 인화한 다음 찍은 사람들에게 돌려보낸다. 사진의 규격은 포스터 크기로 통일했다. 그러나 어떤 참여자는 인화 방법을 찾아 원하는 크기로 출력하고 배너에 인화해 천막으로 쓰기도 한다. 그럼에도 스스로 ‘인사이드 아웃’의 일부라고 말한다. 흑백사진이고 특정 브랜드나 단체와 연관되지 않는다는 원칙만 지키면 수용한다.
-예전부터 영화에 관심이 깊었나? 당신의 단짝을 제외하고 좋아하는 프랑스 감독이 있다면.
=늘 관심은 있었지만 시네마를 잘 알지는 못했다. 처음 나를 시네마와 연결해준 영화는 13살 때 본 마티외 카소비츠의 <증오>다. 나 자신이 영화의 배경인 파리 변두리에서 자란 이유도 있지만 언제나 텔레비전을 통해 보통 컬러영화만 보았던 터라 다른 심도와 영화적 코드를 구사한 흑백 작품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영화를 다르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도 최초로 깨닫게 됐다. <증오>는 오늘날까지도 내 레퍼런스다.
-아녜스 바르다 감독은 도시에서만 작업한 당신을 시골로 데려가고 싶었다고 영화에서 말했다. 하지만 이전에도 아시아의 시골에서 작품을 만들지 않았나.
=우리가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하던 시점이어서, 아녜스는 도시에 설치된 내 작품에만 친숙했을 뿐이다. 우린 그저 함께 여행을 떠날 핑계를 찾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시력을 잃어가는 아녜스가 무엇을 보는지 이해하고 싶었고 그는 도움을 주는 한쌍의 눈으로 나를 썼다.
-당신이 일종의 포커스 풀러였던 셈인가.
=맞다. 영화의 사진들은 네개의 손과 네개의 눈이 만들어낸 결과다. 아녜스가 카메라를 잡고, 내가 물고기를 프레임 안에 들어가도록 움직이고 같이 셔터를 누르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사진④ JR at the Louvre, La Pyramide, selfie, Ink on Wood . 2016 Photographer: Guillaume Ziccarelli Courtesy the Artist and Perrotin Ⓒ jr-art.net
-시력 상실은 두렵고 슬픈 일인데 당신들은 자연스럽고 밝게 표현했다.
=눈은 아녜스에게 작업을 위한 주된 도구지만 이제 때가 온 것뿐이다. 그럼에도 그는 항상 낙천적이고 긍정적 비전을 유지한다. 존경하는 바다.
-아녜스 바르다는 전설적 거장 시네아스트로서는 경이로울 만큼 자기중심적 태도가 없다. 그의 정체성은 살면서 만난 사람과 사물들로 이뤄져 있는 것처럼. 그리고 당신에게도 작품에서 자기를 부각시키지 않는 태도가 있다.
=직접 그것을 화제로 대화한 적은 없지만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우리의 접근법이 비슷함을 느꼈다. 유사성을 하나씩 발견할 때마다 기뻤고 더 일찍 만나지 못해 안타까웠다. 아녜스 역시 광고와 거리를 두고 타인을 존중하며 독립적으로 작업한다.
-아녜스 바르다가 카르티에 재단 갤러리에서 가진 회고전을 구경한 적이 있긴 하다.
=나와 만나기 전 일이라 자세히는 알 수 없다. 내 경우는 그처럼 브랜드가 갤러리 이름에 포함된 경우도 극히 조심스럽다.
-두 사람의 또 다른 공통점은 친화력이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단시간에 친해지고 프로젝트에 참여하도록 설득해낸다. 결과는 같아도 사람에게 다가가는 방식은 다를 듯한데 비교할 수 있나.
=우리 둘 다 타인에게 관심이 많지만 사람들도 예술가를 궁금해하고 무슨 일을 하는지 다가와서 묻고 싶어 한다. 젊은 남자와 나이 든 여성이 짝지어 다니는 점도 흥미로워했다. “할머니랑 손자 사이예요?” “아뇨. 이 사람은 JR이고 내 작업 파트너예요.” “어머, 미안해요.” 이런 식으로 일이 시작되곤 했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서 찍은 과정이 궁금한 대목이 있다. 루브르 미술관 전시실에서 당신이 아녜스 바르다의 휠체어를 밀고 달리는 시퀀스다.
=루브르의 피라미드를 사라지게 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을 때 아녜스가 나를 촬영했다. 매주 화요일이 미술관 휴관일인데, 설치 중인 아티스트인 내겐 입장 패스가 있었다. 미술관 직원이 달리지 말라고 했지만 아녜스가 “오, 하지만 내 친구 고다르를 위해 비디오를 꼭 찍고 싶은 걸요? 한번만 뛰게 해줘요”라고 졸랐다. 직원은 어쩔 수 없이 “난 저쪽에 가 있을 테니 찍어요. 그렇지만 조심해요”라며 자리를 떴다. (웃음)
-말이 나온 김에, 영화 마지막에 만나지 못한 장 뤽 고다르로부터 그 후로 다른 소식은 없었나.
=없었다. 하지만 아녜스가 말하기를 고다르는 늘 시네마를 끝까지 밀어붙이는데 덕분에 우리 영화를 예측 못한 방식으로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고 고마워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만약 그가 우리에게 문을 열어줬더라면 영화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사진⑤ Giants, Death Valley, Billboard. 2018 Courtesy the Artist and Perrotin Ⓒjr-art.net
나는 싸운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
-스트리트 아티스트로서 당신은 작품의 보존을 의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당신에겐 무엇이 남는가? 작업과정을 항상 사진과 비디오로 남기나.
=스케치와 사진이 남는다. 그래서 전시회가 아주 중요하다. 작품을 산 누군가가 이미지를 소유하고 세대를 이어 전해질 테니까.
-그렇다면 카피라이트에 관한 입장은 무엇인가.
=예컨대 루브르 피라미드 프로젝트가 설치돼 있는 동안 누구든 자유롭게 사진을 찍고 인화할 수 있다. 내가 파는 것은 직접 서명한 사진뿐이다. 카피라이트는 없는 셈이다.
-상업적 영화나 광고의 배경에 당신의 작품이 포함되는 경우는.
=소송을 한다. 자동차, 보험회사 등 여러 차례 승소해서 돈도 많이 벌었다. (웃음) 맞다. 우리 변호사는 훌륭하다. 그가 기업에 전화를 걸어 내용증명을 보내겠다고 하면, 그들은 우리에겐 35명의 변호사가 있고 20년은 재판을 끌어갈 돈이 있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러나 우리에겐 광고 기획단계에서 받은 메일과 우리가 보낸 거절 메일이 있다. 그들이 모르는 척 촬영을 진행한 것이다. 때로 나는 법을 넘어 작품을 설치한다. 그러고는 그 이미지의 불법적 이용에 대해 고소하는 셈이니 패러독스다.
-영어권 매체는 몰래 도시의 거리에 이미지를 전시하는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출발했다는 점에서 뱅크시와 비교한다. 그러나 지금은 루브르, <타임>이 당신에게 작품을 의뢰하고 가수 퍼렐 윌리엄스 등 여러 셀러브리티와 공동작업을 한다. 제도권 내부로 흡수되고 길들여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없나.
=그렇지 않다. 내가 23살 때 뱅크시가 런던의 자기 갤러리에 첫 전시를 하도록 초청했다. 같은 해에 나는 테이트 모던에서도 전시회를 열고 미술관 외벽에 작품을 설치했다. 그런데 나중에 내가 몰랐던 스폰서 닛산이 있음을 알고 로고를 떼도록 싸워야 했다. 활동 초기부터 그랬지만 기존 제도권 안팎을 막론하고 작품이 전시되는 프레임을 방어하기 위해 나는 싸운다. 멕시코-미국 국경의 작품도 미국 비자를 빼앗기고 미국 내 스튜디오를 닫을 위험을 감수했다. 하지만 그것은 좋은 공포다. 예술은 회사 경영과 다르다. 더 큰 수익과 고용을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를 창조하고 실패할 준비를 하고 탐색한다. 내 작업이 다치기 쉽다는 위험을 인식하고 미래를 알지 못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위험한 곳에 머무르는 것이 예술가에겐 안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