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피터 잭슨 / 출연 이언 매켈런, 마틴 프리먼, 리처드 아미티지 / 제작연도 2012년
<반지의 제왕>과 <호빗> 시리즈를 좋아한다. 그리고 <반지의 제왕>보다 <호빗>을 더 좋아한다. <반지의 제왕>이 절대악에 맞서 다양한 종족들이 정의로운 연합을 구성해 어렵사리 승리를 거두는 이야기라면 <호빗>은 욕망과 상처를 가득 품은 채 몰락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몸부림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호빗>의 주인공인 참나무방패 소린(리처드 아미티지)은 한때 에레보르 왕국의 난쟁이 왕자로서 엄청난 부와 영광을 누렸지만 자신보다 더욱 탐욕스럽고 강력한 존재인 용 스마우그에게 왕국의 모든 것을 빼앗긴 뒤, 마지막까지 충성을 맹세한 몇 안 되는 가신들과 함께 세상을 떠돈다. 그는 왕국을 잃어버린 왕자, 즉 살았지만 죽은 존재이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그를 살아가게 하는 것은 오직 명예다. 탐욕스런 용으로부터 왕국을 되찾아 패배의 오명을 벗어던지고 종족들을 모아 다시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겠다는 소린의 순수한 욕망은 그를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로 만들지만 동시에 쓰라린 패배와 배반, 상실의 경험은 그의 영혼을 지독하게 휘감는다. 소린은 용감하지만 무모하고, 강하지만 독선적이다. <반지의 제왕>의 영웅 아라곤이 번뜩이는 지성과 인내를 가진 존재라면 소린은 바로 그 반대, 어디서 불타오를지 모르는 격정 그 자체에 가깝다. 그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방법은 결코 지혜롭지 않다. 앞이 천길 낭떠러지라 하더라도 뒤로 물러서는 것은 용납할 수 없기에 일단 발을 허공으로 내딛고 그다음을 생각하는 것이 소린의 방식이다. 그는 죽은 듯이 살아가기를 거부하고 사는 것처럼 살기 위해 목숨을 건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는 그 무엇이라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 목숨을 몇번이나 건져주는 것은 다름 아닌 <호빗>의 영원한 좀도둑 호빗 빌보 배긴스(마틴 프리먼)다. 샤이어의 안락한 삶을 사랑하는 빌보에게 명예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몰락한 왕국의 재건이라는 엄청난 운명을 스스로 짊어지고 있는 소린과 달리 빌보에게 중요한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자기 자신이다. 소린은 왕자로서 생각하지만 빌보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으로서 생각한다. 소린에게 있어 세계는 적과 동지로 이루어져 있지만 빌보에게 모든 이들은 친구이거나 친구가 아닌- 결코 적이 아닌- 존재이다. 빌보는 누군가를 적으로 규정하고 공격하는 것을 낯설고 어려워한다. 빌보에게 희생은 선택지가 아니다. 그는 슬픈 일을 미리 각오하지 않는다. 그의 재능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능력이다. 긴 여정의 시작과 끝에 이르기까지 빌보 역시 일관된 욕망을 보여준다. 멋진 모험을 잘 마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욕망, 일상을 향한 욕망이다.
이렇게나 다른 두 인물이 서로 엮고 엮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자연히 나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떠오른다. 승리보다는 패배의 이야기, 소중한 것을 지켜내기보다 잃어버린 이야기가 더 많이 들려오는 지금의 날들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살아가고 싶기에, 가능하면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기에 나는 요새 <호빗>을 다시 본다.
● 장혜영 영화감독. 발달장애가 있는 동생과의 탈시설 프로젝트를 담은 다큐멘터리 <어른이 되면>(2018)을 만들었다. 유튜브 채널 <생각많은 둘째언니>를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