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2017)의 김지용 촬영감독은 전세계 촬영감독들을 대상으로 그해 최고의 촬영을 가리는 폴란드의 제26회 에너가 카메리마주 영화제에서 최고상에 해당하는 황금개구리상을 수상했다. 매년 11월경에 열리는 에너가 카메리마주 영화제는 수상작들 상당수가 이듬해 초 오스카 시상식 촬영상 부문에 진출해 ‘촬영계의 아카데미’로 불리며 권위와 전통을 인정받고 있다. 한국인으로서는 첫 수상의 영광을 안은 김지용 촬영감독과 함께 경쟁부문에 오른 올해 촬영감독은 브루노 델보넬(코언 형제의 <카우보이의 노래>), 리누스 산드그렌(데이미언 셔젤의 <퍼스트맨>), 폴 토머스 앤더슨(<팬텀 스레드>), 베누아 델놈(줄리언 슈나벨의 <앳 이터너티스 게이트>) 등 쟁쟁한 거장감독들이었다. <달콤한 인생>(2005)의 촬영감독으로 입봉해 김지운, 황동혁, 장준환, 임필성 감독 등과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온 김지용 촬영감독의 지난 작업은 한 가지 색깔, 혹은 고정된 특징으로 쉬이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그가 이전에 작업했던 어떤 영화와 비교해도 가장 꾸밈이 없는, 민낯 그대로의 카메라워크를 보여줬다. 즉 뭘 더하려고 하지 않는 태도에서 드러나는 간결하고 선명한 움직임이야말로 <남한산성>의 촬영이 보여준 미덕이었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정통 사극을 표방하고 있는 <남한산성>이 유럽 영화인들에게도 그 의미가 잘 전달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정직한 카메라의 힘 덕분이 아니었을까.
<씨네21>은 <남한산성>의 촬영에 대해 이미 2017년 연말결산 당시 ‘올해의 촬영상’으로 선정한 바 있는데, 그때 김지용 감독은 “과감한 도전이 현명하게 풀린 케이스”라고 말했다. 데뷔작 <달콤한 인생>을 비롯해 <음란서생>(2006), <헨젤과 그레텔>(2007), <라스트 스탠드>(2013), <수상한 그녀>(2013) 등 화려한 액션과 장르적 특징을 강조하던 영화를 줄곧 작업해왔던 점을 돌이켜보면, “더하지 않고 무엇을 뺄지를 고민했던” <남한산성>으로 인해 그의 촬영을 재평가하게 됐다는 점이 흥미롭다. 어느덧 10여년 넘게 작업하면서 다져진 기교가 맨살을 드러내 보이는 순간, 더욱 단단해진 느낌이랄까. 그가 <남한산성>을 끝낸 직후 선택한 <스윙키즈>의 감각적인 촬영을 보게 된다면 두 영화가 같은 촬영감독의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로 색깔을 자유자재로 숨기거나 드러내는 데 능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될 것이다. 카메라의 무빙이나 조명은 촬영감독의 손끝에서가 아니라 언제나 시나리오의 첫장에서 결정된다는 김지용 촬영감독만의 촬영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듣기 위해 만남을 청했다. 창과 칼 대신 말과 논쟁으로 시대의 비운에 맞서 싸운 이들의 기록, <남한산성>을 써내려간 그의 카메라를 되짚어봤다.
-먼저 수상을 축하한다. 에너가 카메리마주 영화제는 한국영화들이 자주 출품하는 영화제인가. 아니면 영화제측에서 <남한산성>을 보고 출품을 권유했나.
=모든 영화제가 마찬가지겠지만 다른 경쟁작에 비하면 <남한산성>은 인지도가 없기 때문에 출품 권유를 받은 것이 아니라 (사)한국영화촬영감독조합(CGK)에서 먼저 출품했다. 2017년에 <남한산성>이 매년 CGK가 선정하는 촬영상을 수상했는데 그것을 기념해 조합 차원에서 한번 출품해보자고 했다.
-심사위원단은 <남한산성> 촬영의 어떤 점에 주목하던가.
=콕 집어서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는데 프로덕션 예산 규모를 많이들 궁금해했고, 제작비를 듣고는 정말 놀라워했다. 동양적인 미를 예찬하는 식의 아시아영화에 대한 시선을 드러냈다면 사실 촌스럽다고 느꼈을 것 같은데 그런 시각에서는 확실히 벗어난 느낌이었다.
-<남한산성>의 전체 촬영 컨셉이나 방향을 결정하는 데 중요하게 작용한 점은 무엇인가.
=소설의 첫장을 읽고 난 느낌이 아주 강렬했다. 황동혁 감독과 만나 영화에 대해 처음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영화가 추워 보여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입김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사공이 죽는 장면은 꼭 멀리서 찍자, 세트를 짓지 말고 밖에서 찍자는 등의 기본 컨셉을 만들어나갔다.
-촬영 스펙은 어떻게 정했나. 카메라나 렌즈, 화면 사이즈 등을 결정할 때 무엇을 고민했나.
=대개 카메라나 렌즈는 직관적으로 결정한다. 이유가 필요한 경우도 있는데 <남한산성>의 경우에는 직관적이었다. 클로즈업이 많은 영화는 넓은 화면을 선호하는 편이라 1.85:1 사이즈보다는 2.35:1 비율이 낫겠다는 판단을 했다. 줌렌즈를 많이 썼다.
-소설 첫 문장의 무게처럼, 영화의 첫 장면을 어떤 구도에서 어떻게 찍을 지를 결정하는 것도 중요했을 것 같다. 블루레이에 수록된 부가영상을 보니, 갑론을박하는 신하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빈 궁궐을 보여주는 실제 첫 장면이 따로 있었다. 영화의 엔딩 장면과 수미상관을 이루는 장면이었던데, 말에 올라탄 최명길(이병헌)의 어깨너머로 청나라 군대가 일렬로 늘어선 모습이 보이는 지금의 장면으로 바꾼 이유도 궁금했다. 이 바뀐 첫 장면을 김훈 작가가 굉장히 좋아했다던데.
=황동혁 감독과 촬영 들어가기 며칠 전에 콘티 작업을 다시 했다. 영화를 여는 시작이 산만하다는 느낌이 들었고, 보다 간결한 시작으로 바꾸자고 의견을 모았다. 원작에 없던 장면은 구성하기가 어려웠다. 원작을 보면 그림이 그려지기 마련이었는데 첫 장면은 어려웠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김상헌(김윤석)과 사공이 강을 건너는 롱숏이 등장한다.
=사실 그 장면도 그저 그래야 될 것만 같아서 멀리 떨어져 찍었다. 이유야 나중에 뭐라도 덧붙일 수 있겠지만 역시나 직관적인 선택이었다.
-이유를 덧붙일 수 있는 설정으로 죽은 사공의 모습과 중반부 북문 전투 직전에 죽은 사슴의 모습, 그리고 마지막 상헌의 최후까지 유사한 이미지가 반복된다. 남한산성의 상황, 혹은 결말을 환기하기 위해 보여주는 듯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최명길과 김상헌, 궁궐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다. 상헌의 경우, 카메라가 멀리 빠지는 것도 이렇게 이야기하면 촌스러울지 모르겠지만 나라가 처한 상황을 비롯한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남한산성>은 숏이 많은 영화는 아닌데 정리하고 집중한 결과, 메시지 전달이 더 잘된 것 같다.
-남한산성의 성곽과 산세를 함께 보여주는 전경숏도 정서와 배경이 잘 어우러지는 구도를 고민한 결과 같다. 인물 클로즈업이 많이 쓰인 이 영화에서 인물이 아닌 배경을 보여줄 때의 원칙 같은 것이 있었나.
=우선은 촬영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어려움이 있었다. 실제 남한산성에서 상당 부분 찍었지만 당시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많지 않다. 그래서 부분적으로 세트를 짓기도 했다. 시대극을 처음 해본 것은 아니지만 이전 영화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데다, 실제 역사적 배경인 장소에서 찍다 보니 카메라가 지닌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인서트컷이든 전투 장면이든 역동적이거나 혹은 아름답게 담자는 식의 접근을 할 수가 없었다. 인서트컷을 찍을 때도 아름답게 지는 해보다는 힘들어 보이게, 추워 보이게, 어두워 보이게 찍으려고 노력했다.
-영화 전체에 감도는 푸르스름한 색감은 어떤 의도를 표현하기 위함이었나.
=기본 배경 설정인 새하얀 눈과 추위를 표현하기 위해 푸르스름한 톤을 갖췄다. 비극적인 역사에 걸맞은 톤을 자연스럽게 잡아나간 경우다. 행궁 안에서 많은 일이 벌어지기 때문에 어두운 느낌이길 바랐고, 또 영화가 시작함과 동시에 이미 남한산성에 들어가게 된 이후의 상황, 즉 소설 첫장에서의 느낌이 펼쳐지길 원했다. 과거에는 필터를 대거나 조명을 바꾸는 식으로 색감을 표현했는데 요새는 후반작업에서 밝기 단계를 구분지어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색을 따로 조절할 수 있다. 전반적으로 푸르스름한 느낌이 강한 이유는 저녁 장면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두워지기 직전의 이미지랄까. 원래는 밤 장면이었는데 너무 캄캄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시나리오상에서 저녁 정도의 시간대로 바꿔 촬영한 장면도 많았다.
-대부분의 배우들이 무릎을 꿇고 고개 숙인 상황에서 대사를 하는 클로즈업 위주의 장면이 많다 보니 상황에 맞게 혹은 지루해지지 않게 여러차례 앵글을 바꿔 구성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갓을 쓰고 있는 상황에서 갓 너머로 보이는 인물의 눈빛이 마치 현대극에서 선글라스 너머의 눈빛을 잡을 때처럼 표현된다.
=왕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인물들의 표정이 안 보이면 어쩌나 걱정했다. 카메라도 밑으로 내려가는 데 한계가 있으니까. 행궁에서 첫날 촬영할 때 갓의 긴장감을 살리면서 표정도 놓치지 않기 위해 조명에 신경 썼다. 갓 너머로 눈이 보일 때는 특히 눈 조명에 집중했는데 기본적으로 얼굴 조명은 정면에서 비추지 않는다. 조명이 너무 밝으면 얼굴 전체가 밝아지니까. 그래서 피부보다 반사도가 많은 눈만 밝혀주기 위해서 눈에 반사를 만들어주는 캐치라이트를 아주 신경 써서 작업했다.
-총 4번의 전투 장면이 등장한다. 날쇠(고수)와 칠복(이다윗)이 얽히는 산에서의 롱테이크 신을 비롯해 전반적으로 규모보다는 고통의 묘사에 집중한 듯했다.
=전투의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라서 수위 조절하는 게 어려웠다. 초반 두번의 전투 외에 세 번째 전투부터는 주인공들이 등장하지도 않는 전투라서 더 걱정이 많았다. 전투 도중에 눈이 내리는 설정도 아니었지만 찍다 보니까 그림을 채워줄 요소가 필요해 눈을 추가로 뿌리기도 했다.
-상헌이 마지막 자결하는 장면에서는 그 순간의 상헌과 벽에 비친 그의 그림자를 동시에 보여준다. 촬영감독의 야심이 느껴지는 숏이었다.
=그날도 어떻게 찍을지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원래 그런 장면은 배우가 다 알아서 만들어가지 않나. 그 장면은 뭘 더할 생각보다 뭘 덜어낼지를 고민했다. 여러 개의 꽉 찬 숏이 붙어 있는 것보다 헐렁한 숏을 보여주다가 얼굴이 확 들어올 때가 중요한 거니까.
-마지막 명길의 표정을 찍을 때는 어땠나.
=촬영 막바지라서 마냥 좋을 때 찍었다. (웃음) 명길이 과연 무슨 표정을 지을까가 고민이었는데 황동혁 감독의 디렉션은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난다. 찍는 순간,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게 만드는 표정을 지었다. 좋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떤 점이 <남한산성>의 촬영을 돋보이게 했다고 생각하나.
=카메라의 태도였던 것 같다. 사실적인 게 뭔지를 고민했다. 어차피 그것 역시 상상해서 만들어야 하는 것이지만 <남한산성>은 프레임도 조명도 필요 없는 것을 추려내는, 즉 빼는 작업이었다.
-나만의 시그니처 촬영 스타일 같은 걸 고민하며 찍는가.
=개인적으로 클로즈업숏을 찍을 때 가장 즐겁다. 배우들의 얼굴을 찍을 때. 영화가 지닌 가장 강력한 힘은 결국 배우의 얼굴이니까.
-<밀정>(2016)에서도 이정출(송강호)의 클로즈업숏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강호 선배가 생각보다 카메라와 조명에 대한 이해가 깊다. (웃음) 필요한 곳에 딱 잘 맞춰서 선다. 배우에게 위치 같은 디테일한 요구를 하기가 어렵다. 연기에 방해될지 모르니까. 강호 선배를 비롯해 <남한산성>의 배우들 모두 워낙 매체에 맞춰서 연기하는 강점을 지녔다.
-시나리오를 보면서 촬영에 관한 어떤 것을 가장 먼저 고민하나.
=이야기를 관통하는 빛의 질감이다. 소프트한지, 풍부한지, 거칠게 떨어지는지, 그림자를 많이 잡을지, 영화 전체의 컨셉을 잡기 전에 빛을 고민한다.
-촬영감독으로서 어떤 촬영을 추구하는가.
=시나리오를 받으면 그중에서 선택을 하게 되는데 어떤 시나리오를 고르느냐가 그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선택한 시나리오가 가야 하는 길이 있다면 거기에 따라야지 내 방식대로 할 수는 없으니까.
-미국영화연구소(AFI)를 졸업했다. 어떤 이유로 유학길에 오르게 됐나.
=어릴 때부터 영화를 할 생각으로 떠난 건 아니었다. 필라델피아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LA에 가서 제작사 사무실에 취직했다. 그런데 버겁더라. 적성에도 맞지 않고. 현장 나가서 일을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때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게 제작부나 조명부 일이었다. 이후 영화에 대한 생각이 달라져 AFI에 들어갔고 촬영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달콤한 인생>으로 촬영감독 경력을 시작해, 김지운 감독과는 이후 그의 할리우드 진출작 <라스트 스탠드>도 함께했다.
=김지운 감독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웃음) 그전에 단편영화를 몇편 찍었지만 경험치가 부족했다. 류성희 미술감독의 소개로 함께하게 됐는데 그 당시에 김지운 감독이 젊은 신인 촬영감독과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어 했다. 그에게서 영화 만드는 프로세스를 배웠다.
-강형철 감독과 함께한 <스윙키즈>는 어떤 작업이었나.
=즐겁게 찍었다. 춤이 중요한 영화인 데다 시각적으로 풀기도 쉽고. 시대극을 했더니 조금은 현대로 가고 싶었다.
-현재 프리 프로덕션 단계인 차기작 <백두산>은 어떤 영화인가.
=이해준·김병서 감독이 공동 연출하는 재난영화다. 이렇게 시각특수효과(VFX)가 전면에 나오는 영화는 처음이다. 프리 프로덕션 작업할 게 굉장히 많다. 하정우·이병헌·마동석 등 배우들도 기대된다.